전출처 : 이방인의눈 > japan and china

Japan and Greater China: Political Economy and Military Power in the Asian Century, Greg Austin and Stuart Harris. London: Hurst & Company, 2001.

By John W. Garver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The China Quarterly, Jan., 2004, pp187., Translated by Park Jongchol (May, 2005).

 

책은 중일관계의 포괄적, 공평한, 예리한 분석

그리고 연구는 중국인연구자나 비중국인학자의 기존의 연구에 기초하지만, 분야의 선행연구를 뛰어넘었다. 저자는 파괴자로서가 아니라, 진실하고 좀더 논쟁이 빛을 발휘하도록 다른 학자의 의해 발전한 아이디어를 많이 인용

중일의 상호작용에 초점, 그러나 중일간의 대만문제에 대한 논문과 홍콩반환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대한 고려는 대중국이라는 제목으로 합리화

상호이익, 그리고 경제영역과 전략영역의 일치에 대한 증명하지만, 책은 중일관계의 한정적인 작업으로서 위치한다.

 두 저자는 중일간의 다중적 분열을 정의하고 추적: 30-40년대의 전쟁의 기원과 상징성을 넘어서는 차이; 인권과 민주주의을 넘어서는 차이; 중국 군사력의 건설; 핵실험과 비확산 이슈; 지역의 지렛대로서 일본의 대중 개발원조의 사용을 넘어서는 차이.

 이 책는 다음을 연구

1, 아시아태평야지역에 군사적 영향을 포함한 거대한 영향력을 추구하는 일본에 대한 중국의 불쾌함, 2, 일본의 중국에 대한 마지못한 최선진 공업기술의 이전, 3, 일본의 대만에 대한 규준에 벗어나는 정책

아시아에서 중일간의 경쟁은 1, 중국이 권력을 확장하고, 2, 일본이 국제 규범의 확장을 추구함으로 증가.

그러나 저자들은 아시아에서 리더쉽과 지배을 위한 중일의 경쟁 모델을 거부, 그리고 강하게 억제된 세력의 행동과 결합된 이익의 광범한 집중(converge)은 중일관계를 대립보다 협력으로 유도

세계질서와 관련된 증가하는 집중에 관한 실례

1949-1971, 동경과 북경은 동서진영의 다른 편

1971년의 변화이후에도 중국은 글로벌 시장 경제를 거부

1978년부터 북경이 글로벌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현상유지가 광범하게 손상됨으로써,

특정하게 병렬된 이익을 변형, 1. 병참조직의 해양경계에 대한 안보, 2, 홍콩의 인민공화국으로의 안정적인 반환, 3, 한반도와 같이 민감한 지역의 평화의 지속

 

 

 

 

 

저자는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의 팽창은 상호협조관계를 지속시킨다고

아시아의  다른 국가는 두 개의 대국과의 좋은 관계를 희망하고, 중일의 충돌을 바라지 않는다..

두 대국의 어느 쪽의 움직이든지, 아시아의 소국들이 따라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화해에서 (소국들에게) 인지된 (양국의) 노력은 지역 명성을 확보하게 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는 중일경쟁을 견제(완화) 동경과 북경은

동경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지역 리더쉽에 편안함을 느끼지만, 북경은 미국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거부하고, 실제적으로 미국이 없다면 일본은 좀 더 강건한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려 할 것이다.

 

 

대만문제는 중일 분쟁으로 가는 남겨진 이슈, 그러나 북경조자도 위안을 위한 공간을 있다. 초기 몇 십 동안, 중국의 지도자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경제적,문화적 일본의 세력범위로 포함되는 것을 우려

(Garver의 의견) 경제적으로 대만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과 통합되고 있고, 문화적으로 대만인들은 중화세계에도 서양세계에도 속해있지 않다고 본다. 일본은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으로서 대다수의 대만인에게 인지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체성이 있는 대만인은 대부분은 구세대이고, 그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dohyosae > 비스켓

세상이 컬러가 아니라 흑백으로 묘사되던 시절에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곧잘 회자되었다. 이른바 등용문 고사의 한국판 해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개천은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했고, 용이란 이 신분적 굴례속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용어였다. 당시 개천파들이 용이 되고자하는 출구는 오직 하나였다. 즉 행정. 사법. 외무고시라고 불리우는 3대 고시 가운데 하나를 패스해야만 그 지긋지긋한 개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진입할 수 있었다. 고시라는 단어가 지금은 없어져야만 하는 과거의 유습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 고시는 개천파들이 용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그리고 이 고시는 학력, 신분, 성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고시를 목표로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60년대의 흑백 영화 속에는 <검사와 여선생>과 같은 일견 치졸해 보이는 화면속에서도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라는 한국적 꿈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이런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 단어가 사라진 싯점이 80년대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상한 것이다. 사실 이 80년대를 기점으로 개천과 일반의 땅과는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의 편중과 정보의 편중이 보여준 극심한 경제적 격차는 80년대의 한 단면이었다. 이 결과 누구의 시처럼 개천에는 썩은 물만 고여 고여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개천에서 결코 용이 태어날 수 없다. 60년대 70년대 판자촌의 어귀에 가끔씩 붙어있던 <축 ***의 아들(딸)의 사법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축하는 이제 고급 레스토랑 혹은 고급 호텔의 사교장에서 자신들만의 은밀한 축하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60년대 혹은 70년대의 사회처럼 공동체가 개방된 사회는 아니다. 그러기에 어느 사건에 대해 공동체가 공동으로 축하하고 슬퍼하는 장이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공간의 폐쇄성은 계급간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천에서는 저 위쪽 마른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고, 마른 땅의 사람들 역시 개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양 집단은 서로의 경계선만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고 있을 뿐이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사회는 이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체제로 보아도 무방할듯 싶다. 이런 예는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모든 사람들은 양인과 천민으로만 구분되었다. 양인들은 <주경야독>을 통해 언제든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7백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한 중봉 조헌 선생이 바로 이런 주경야독의 마지막 세대였다. 이들 조선 전기의 양인들은 사회의 역동성에 힘입어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경서를 공부하면서 국가에 봉사하는 길로 나아갈 수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면서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그 둘을 한꺼번에 성취한다는 것은 자부심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양인과 천민의 구분에서 양반, 상민, 천민으로 구분된다. 즉 양인의 세계가 양반과 다른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사회의 부와 권력은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게 된다. 이 결과 조선은 급속하게 전반기에 유지하고 있던 활력을 상실하면서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즉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통제함으로서 사회의 순환이 정지되었던 것이다.

작금에 사회의 부와 권력이 일부 소수의 손에 세습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이는 국가가 더 이상 건전한 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조짐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같다. 즉 이것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상황을 고착시킴으로서 계층간의 대립과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할 우려가 있다. 사회는 비스켓과 같아야만 한다. 곳곳에 숨쉴 공간이 뚫여있어 물렁물렁하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본질을 유지하는 그런 사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 전에 기숙사의 공공욕실 겸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고 기겁을 한 뒤로 그 곳에 갈 때면 천장이나 구석 등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화인(華人)들에게는 '장랑'이라고 불리우는 이 생물은 대만에서도 혐오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다. 대만의 바퀴벌레는 한국의 바퀴벌레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마치 일반적인 술이나 향수와 그 미니어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통통한 몸과 포동포동하게 살찐 다리, 그럼에도 놀랍기 그지없는 재빠름을 자랑할 때는 정말  끔찍함을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어렸을 때는 바퀴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제일 이해하지 못할 몇몇 여자들의 버릇 중에 하나가 바로 바퀴를 보면 기겁을 하거나 도망을 가거나 하는 행위였다.(남자들 중에도 바퀴를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시나?!...ㅡㅡ^....) 그 때는 정말 별다른 생각없이 보이는대로 바퀴를 살해하곤 했다. 바퀴는 생명력이 워낙에 질기기 때문에, 확실히 죽이려면 화장실 변기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은 결과, 나는 집안에서 발견되는 그들을 대부분은 익사시켰다. 때때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때 발견되는 그들은 나의 잔인함(?!ㅡㅡㅋ...)에 의해 압사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바퀴를 피하기 시작한 이유는 사회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가끔씩은 무언가에 끔찍한 상상을 하는 내 버릇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뽈뽈 거리며 나를 피해 달아나는 그 넘(?!^^;)을 휴지로 눌렀을 때 문득 손가락의 감각을 타고 그 갈색의 매끄러운 몸이 느껴진 순간, 그 넘의 몸이 나의 손에 의해 압박을 받으며 짓눌려 죽어가는 상상... 동시에 그 넘의 내부 물질들이 모두 파괴의 과정을 겪는 장면이 상상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바퀴를 죽이기 보다는 혐오감을 느끼며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이거 혹시 정신병은 아니겠지?!...ㅡㅡ;;...)

그러다 오늘 문득 저번 학기에 '국제관계와 현세(現勢)'라는 과목을 수강했을 때 그 과목을 가르치시던 여 교수님께서 갑자기 출현한 바퀴벌레를 비난하시면서 무심히 내쫓으시던 기억이 났다. 여성들의 잠재적인 내구력 즉, 아줌마 파워에는 국경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이었다.

아직은 님비(NIMBY)적인 태도와 혐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나 역시 그 놀라운 파워를 발휘할 때 쯤이면 바퀴벌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퀴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바퀴벌레를 인류의 적으로 정의하고 타도를 외쳐야 할 이유 또한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바퀴벌레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아니, 벌레적으로 자기보다 몇 천 배는 큰 몸집을 지닌 내가 얼마나 무섭겠는가? 또한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내가 그 넘들과 사랑에 빠져 바퀴벌레 연구가의 길을 걷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할 일을 잠시 제쳐두고 글 한 편을 적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판 좀 두드려 본다.

오늘 서재에 들어왔더니 재미있는, 아니 어찌보면 아주 보편적인 현상을 발견하였다.(가끔 내가 자주쓰는 이 "재미있는"이라는 표현 속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뜻이 들어있다. 문득, 자제하거나 기타 설명을 첨가해야 마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ㅡㅡㅋ...) 다름아닌 "마태우스"라는 아이디의 분과 "매너리스트"라는 분, 두 분이 쓰신 상반된 의견의 글이 일종의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 토론의 장에 참여할까 하다가 두 분의 주제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이 글을 먼저 쓰고 싶어져서 이렇게 내 개인 서재 홈으로 돌아와 있는 중이다. 두 분 중 한 분은 이 글을 보시게 될 수도 있다. 이 얼굴 없는 공간에서 그 분과 나는 얼마 전에 일종의 친분있는 관계를 맺었으니까... 이 "알라딘"이라는 사회가 공식적으로 통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 분과 나는 "즐겨찾는 서재"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께서 왜 토론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면서 뒤에서 상관없는 말이나 늘어놓는거냐라고 따지시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 )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 개개인이 모이는 곳에는 "사회"라는 것이 형성된다. (물론 영국의 수상이었던 대처 여사같은 사람은 1989년 2월에 사회란 없으며 오로지 남녀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사회란 무엇이고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식의 주제를 논하기엔 개인적으로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니 그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언제까지 제쳐두고자 하는가는 묻지 말라. 나도 알 수 없으니까...^^;ㅋ)

그런 의미에서 이 알라딘이라는 사이트 역시 일종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라는 것이 때로는 따뜻한 온정과 협력, 격려 등의 하에 굴러가는가 하면 때로는 갈등과 다툼, 반목 등 보기에 그다지 편안하지는 않은 현상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는 이 양자와 이 양자의 중간에 속하는, 혹은 이 양자와 전혀 관계없는 상태들로 점철되어 상당히 복잡하기 그지없는 산물인 것이다. 오늘 문득 이 알라딘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또한 그 복잡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알라딘이라는 사이트 속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회와 명백히 다른 점은 얼굴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물론 서재 이미지에 본인의 사진을 넣는 분들도 계시지만, 상대방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분의 모든 표정을 알지는 못한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부분은 '글과 인격의 일치'에 관한 것인데, 김형경 씨의 최근 소설<성에>에 의견을 따르자면 그건 일종의 금기에 속하는 부분이며, 생각하기 시작하면 복잡하기 그저 없어지기 때문에 이 역시 잠시 제쳐두고자 한다.(물론 내가 글 쓰시는 분들과 그 분들의 인격이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특별히 의심이 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럴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언급하는 것일 따름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마태우스 님이나 매너리스트 님, 그 외 이분들의 서재를 즐겨찾는다고 추측되어지는 몇몇 분들-건디기 님이나 깍두기 님, 바람구두 님, 물만두 님 등등. 그 외에도 아주 많다. 흑백 TV 님이나 평범한 여대생 님 등등 -과 이 집단(?!)에 속하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 이 비스무레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을 분들은 상당히 대중적이며, 이 알라딘 사회에서 그 명성이 알려진 분들이다. 반면에 매니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분들도 계신데, 그 분들은 자신들의 서재에서 개인적인 부분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학술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수반하고 있다. 사마천 님이나 이방인의 눈 님, 천왕성의 궤도 님, 도요재 님 등은 (내가 보기엔)이런 쪽에 속한다고 판단된다. 이 알라딘 사회 속에는 위의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에서야 알았지만)이런 분들의 글을 그저 소위 "펌질"을 통해 가져다가 자신의 서재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나처럼 그저 적당히 놀다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알라딘이 제공하는 기본 서비스, 즉 책의 구매와 배송 등과 5000원 적립금 및 각종 이벤트들은 일종의 사회제도들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대화, 그들 사이의 협력관계와 갈등, 그리고 제공되는 제도들, 이 모든 것들이 알라딘이라는 사회를 구성하고 돌아가게 한다.

...

인간이 혼자서만 살아갈 수 있을까?... 다니엘 디포우의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결론은 그럴 수 없다이며, 나 역시 그럴 수 없다는 쪽에 더 공감이 간다. 물론 이영도 씨의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에 등장하는 "오스발"이라는 캐릭터처럼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라면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서 는 개인적으로 회의가 든다. 이 서재에 방문제도라는 것이 없다면, 과연 서재를 운영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지만, 그 홈페이지 개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며,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양자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인간과 사회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

...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다. 이젠 결론을 내야할 것 같다. 좋은 사회를 구성한다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도 원론적인 말이겠지만 인간 개개인의 의식 개선과 서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제도적인 차원의 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문득 오늘 내가 속한 이 알라딘이라는 사회가 띠는 복잡한 면들을 바라보면서, 꼭 이 알라딘이라는 사회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이는 모든 사회에서 모두가 유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고찰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5-11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도나라 2005-05-1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놀래라...@.@~.. 댓글이 달려있네?!...
^^... 안녕하세여..
횡설수설 쓴 글에 댓글 달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조선인 2005-05-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왕이면 하날리님 페이퍼도 읽어보시죠. 전 그냥 하날리님께 승복하기로 했거든요. *^^*

조선인 2005-05-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처음 뵙겠습니다. 꾸벅.

2005-05-1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도나라 2005-05-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 님... 안녕하세여... 방문도 모자라 서재 추천과 마태우스 님 책 정보까지...이거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ㅠ.ㅜ... 추천해 주신 하날리 님 서재는 오늘 저녁에 방문해 보겠습니다...

새벽별을 보며 님...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꾸벅~..^^

마태우스 2005-05-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서재 즐찾하기 잘했네요. 이렇듯 훌륭한 글을 만날 수 있었으니깐요. 글 쓰시는 내공이 보통은 아닌걸요....어느 분이 그러셨어요. 알라딘 사회는 자기들 사이트가 특수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구요. 일종의 귀족계급 연한다는 게 그분 말이었는데, 전 거기 동의해요. 어느 사이트를 가도 이만큼 평화로운 곳은 없구, 자부심이라는 게 그 사이트에 충성심을 갖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으니깐요.

과거에는 알라딘에 리뷰를 쓰면 열편당 5천원을 줬습니다. 그것 때문에 알라딘에 가입했다는 분도 많이 있어요. 그때도 리뷰를 정말 대--충, 몇줄 쓰면서 5천원을 타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게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우리 몫이 주는 게 아니니까 그런 거였어요. 지금의 논란은 펌질을 하는 분들이 가져가는 5천원이 우리 몫을 위협하기에 일어난 거겠지요. 돈이란 건 그 누구더라.... 헤라랑 아프로디테, 아테네한테 사과 주고 도망간 그사람.... 하여간 그사람이 던진 사과처럼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하죠...

포도나라 2005-05-17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서재의 먼지 치우러 왔더니... 마태우스 님께서 오신 적이 있었네여...^^
ㅋㅋ~ 귀족계급이라... 글쎄여...^^ㅋ...(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분간이 안 감...)
그리고 그 사과의 주인은... 파리스 왕자였던 것 같은데여... 최고의 미녀를 얻기 위해 아프로디테를 선택했져... 내가 이 넘이 잘생겼으면 용서한다~ 저도 못생긴 주제에 미녀만 찾는 넘이라면 한 대 패줬을 거다...라고 생각했었져...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마태우스 2005-05-1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제가 물어본 건 파리스가 아니라요, 어떤 여신이 사과를 던졌어요 분란의 여신인데.... 서로 사과 가지려고 해서 파리스에게 간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포도나라 2005-05-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ㅋ... 아항~... 헷갈렸어여~님...^^;;...
사과 던진 사람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져? 아마?!...
 
 전출처 : dohyosae > 로빈과 리차드

 

ROBIN AND RICHARD


Robin and Richard were two pretty men,

They lay in bed till the clock struck ten;

Then up starts Robin and looks at the sky,

"Oh, brother Richard, the sun's very high!

You go before, with the bottle and bag,

And I will come after on little Jack Nag."


로빈과 리차드는 예쁘장한 남자라네,

그들은 시계가 열 번을 칠 때까지 침대에 누어있었네:

로빈이 먼저 일어나서 하늘을 보면서,

“오, 리차드 형제, 해가 높이 떳구나!

너는 술병과 돈주머니를 챙겨 먼저 떠나라,

나는 늙은 조랑말 타고 뒤따라가지.”


해설:

  이 한가하면서도 나른한 노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연의 pretty man의 경우 속어로는 동성애자 혹은 호모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서는 은근한 동성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4연의 brother Richard를 보면 그 대상이 수도자를 지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수도사들은 자신들끼리 형제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서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한 예로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익히 불러 알고 있는 동요인 의 경우 부지런한 형과 게으른 동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도원의 아침을 묘사하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       

Brother John?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 Ding Dong,

Ding Ding Dong.

일어났나요, 

일어났나요?

존 수사님,

존 수사님?

아침 기도 종이 울려요,

아침 기도 종이 울려요.

딩-동-뎅, 딩-동-뎅.

  여기서 brother은 수도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노래에서도 brother은 수도사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혐오는 헨리 8세 이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튜어트 왕가를 거치면서 가톨릭에 대한 혐오감은 확고해 졌다. 이 결과 가톨릭 수도사에 대한 비하적인 글이나 이야기는 낮선 것이 아니었다.

  이 노래에서 보면 수도사 두 사람이 길을 가다 여관에 들러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같이 잠을 자다 일어나 한 수도사는 먼저 가고 다른 수도사는 무엇인가 다른 볼일을 보고 뒤 따라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영국에서 1534년 수장법에 의해 영국 교회가 가톨릭과 결별한 후에 가톨릭교도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1829년 가톨릭 해방법에 의해서 가톨릭교도의 시민권, 재산권, 공직 취임권을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을 종식시키면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가톨릭교도는 영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노래를 통해 가톨릭을 풍자했다고 해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풍자는 게으름뱅이와 주정뱅이에 대한 경고로 변형되어 어린이들에게 불려졌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