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 > 비스켓

세상이 컬러가 아니라 흑백으로 묘사되던 시절에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곧잘 회자되었다. 이른바 등용문 고사의 한국판 해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개천은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했고, 용이란 이 신분적 굴례속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용어였다. 당시 개천파들이 용이 되고자하는 출구는 오직 하나였다. 즉 행정. 사법. 외무고시라고 불리우는 3대 고시 가운데 하나를 패스해야만 그 지긋지긋한 개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진입할 수 있었다. 고시라는 단어가 지금은 없어져야만 하는 과거의 유습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 고시는 개천파들이 용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그리고 이 고시는 학력, 신분, 성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고시를 목표로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60년대의 흑백 영화 속에는 <검사와 여선생>과 같은 일견 치졸해 보이는 화면속에서도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라는 한국적 꿈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이런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 단어가 사라진 싯점이 80년대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상한 것이다. 사실 이 80년대를 기점으로 개천과 일반의 땅과는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의 편중과 정보의 편중이 보여준 극심한 경제적 격차는 80년대의 한 단면이었다. 이 결과 누구의 시처럼 개천에는 썩은 물만 고여 고여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개천에서 결코 용이 태어날 수 없다. 60년대 70년대 판자촌의 어귀에 가끔씩 붙어있던 <축 ***의 아들(딸)의 사법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축하는 이제 고급 레스토랑 혹은 고급 호텔의 사교장에서 자신들만의 은밀한 축하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60년대 혹은 70년대의 사회처럼 공동체가 개방된 사회는 아니다. 그러기에 어느 사건에 대해 공동체가 공동으로 축하하고 슬퍼하는 장이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공간의 폐쇄성은 계급간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천에서는 저 위쪽 마른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고, 마른 땅의 사람들 역시 개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양 집단은 서로의 경계선만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고 있을 뿐이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사회는 이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체제로 보아도 무방할듯 싶다. 이런 예는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모든 사람들은 양인과 천민으로만 구분되었다. 양인들은 <주경야독>을 통해 언제든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7백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한 중봉 조헌 선생이 바로 이런 주경야독의 마지막 세대였다. 이들 조선 전기의 양인들은 사회의 역동성에 힘입어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경서를 공부하면서 국가에 봉사하는 길로 나아갈 수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면서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그 둘을 한꺼번에 성취한다는 것은 자부심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양인과 천민의 구분에서 양반, 상민, 천민으로 구분된다. 즉 양인의 세계가 양반과 다른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사회의 부와 권력은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게 된다. 이 결과 조선은 급속하게 전반기에 유지하고 있던 활력을 상실하면서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즉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통제함으로서 사회의 순환이 정지되었던 것이다.

작금에 사회의 부와 권력이 일부 소수의 손에 세습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이는 국가가 더 이상 건전한 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조짐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같다. 즉 이것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상황을 고착시킴으로서 계층간의 대립과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할 우려가 있다. 사회는 비스켓과 같아야만 한다. 곳곳에 숨쉴 공간이 뚫여있어 물렁물렁하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본질을 유지하는 그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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