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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말 나온 김에, 스킨십(II)

 

 

 

 

의학논문을 읽고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다. 엊그제 시간에는 청소년의 성의식과 그 행태에 대한 논문이 채택되었다. 가정의학과 분이 쓰신 것 같은데, 난 그 논문의 주장에 별반 동의할 수 없었다. 토론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질문을 안하기에 내가 손을 들었다.

“논문에 보면 청소년의 성행위 빈도를 미국과 비교해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제력이 뛰어나고 보수적이라고 해 놨던데, 전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땅한 상대가 없고, 할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그렇지, 결코 자제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중학교 때, 골목을 지나다 교복을 입은 남녀 고교생을 봤다. 여자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있었고, 남자는 날 째려보며 어슬렁거렸다. 골목에 골목이라 무척이나 한적했던 그곳에서 둘이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난 집에 오자마자 누나에게 그 얘기를 했고, 중2로 한창 호기심이 많았던 누나 역시 관심을 보였다.

“어디야 어디?”

“저기, 저 골목”

난 가보자고 했고 누나는 갈까 말까 망설였다. 십분쯤 그러다 결국 나가봤는데, 아쉽게도 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겨울이라 너무너무 추웠던 걸까.

(그로부터 이십오년이 지난 지금, 난 여전히 그 동네 그 집에 살고 있지만, 그 골목은 그때처럼 한적한 곳이 아니다. 공간만 있으면 빌딩이 올라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북적댄다)


내가 대학에 갔을 때, 나보다 성숙했던 친구 하나는 조명이 음침한 이대앞 카페에서 키스를 했단다. 마냥 부러운 우리는 그 친구가 “십여분 동안 설왕설래를 했다”는 얘기를 침을 흘리면서 들었다. 그 다음다음 해, 드디어 나도 애인이 생겼고, 키스를 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키스 한번 하려고 주위를 살피면, 웬 사람들이 야밤에도 그렇게 많이 나돌아다니는지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했던 생각.

[뽀뽀카페를 여는 거지. 2인용 테이블이 전부 칸막이-그러니까 발이 쳐져 있고-가 되어 있고, 쥬스는 두잔에 1만원, 한시간 넘으면 한잔을 더 먹어야 해]


하지만 노래방이 나오면서 뽀뽀카페 구상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색깔 있는 창문을 사용해 밖으로부터 시선이 차단될 수 있는 그런 공간, 중고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첫키스를 한 장소 중 1위가 노래방이라고 한다.


그러다 비디오방이 생겼다. 비디오방은 원칙적으로 청소년 출입이 금지된다. 하지만 진짜로 열심히 통제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쯤해서 다시 토론 얘기. 아까 그 논문의 결론은 “청소년의 성행위 횟수를 줄여가도록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되어 있다. 난 다시금 토론자에게 질문을 했다.

“근데, 청소년의 성행위 횟수를 왜 줄여야 하지요?”

토론을 맡은 학생 역시 내 말에 동의했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횟수가 많아도 건전한 성행위가 있는 것이고, 횟수가 적어도 불건전한 것이 있는 거겠지요”

난 건전하고 안하고를 구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필경 그 학생은 책임있는 성행위를 건전한 것이라고 했으리라. 하지만 책임이란 게 도대체 뭘까. 결혼을 전제로 한 성행위는 건전한 것일까? 성행위의 결과가 임신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콘돔을 반드시 착용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강제적인 게 아닌, 서로의 동의가 있은 후에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난 성행위가 청소년에게 왜 나쁜지 알지 못한다. 왜 그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면서 손에게-남자라면-신세를 져야 하는 걸까? 그렇게 억압을 하니 포르노를 통해, 혹은 잡지나 친구를 통해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을 배우는 게 아닐까.


그때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에 난 20대마저 총각 딱지를 떼지 못했고, 내가 첫경험을 한 것은 서른살 때였다. 정력이 왕성하던 10대, 20대를 그냥 흘려버린 게 못내 안타까워, 지금의 청소년들은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행위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학교 갔다가 학원 가랴, 조금만 늦으면 휴대폰으로 체크를 하는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뭔가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요즘에는 비디오방이라는 게 있으니, 우리 세대처럼 뒷산으로 올라가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 사족: 18세 미만 관람가 영화만 본다면 비디오방에 청소년을 못들어가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출입금지를 하는 것은 비디오방이 비디오 관람 이외의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걸 실토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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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방인의눈 > japan and china

Japan and Greater China: Political Economy and Military Power in the Asian Century, Greg Austin and Stuart Harris. London: Hurst & Company, 2001.

By John W. Garver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The China Quarterly, Jan., 2004, pp187., Translated by Park Jongchol (May, 2005).

 

책은 중일관계의 포괄적, 공평한, 예리한 분석

그리고 연구는 중국인연구자나 비중국인학자의 기존의 연구에 기초하지만, 분야의 선행연구를 뛰어넘었다. 저자는 파괴자로서가 아니라, 진실하고 좀더 논쟁이 빛을 발휘하도록 다른 학자의 의해 발전한 아이디어를 많이 인용

중일의 상호작용에 초점, 그러나 중일간의 대만문제에 대한 논문과 홍콩반환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대한 고려는 대중국이라는 제목으로 합리화

상호이익, 그리고 경제영역과 전략영역의 일치에 대한 증명하지만, 책은 중일관계의 한정적인 작업으로서 위치한다.

 두 저자는 중일간의 다중적 분열을 정의하고 추적: 30-40년대의 전쟁의 기원과 상징성을 넘어서는 차이; 인권과 민주주의을 넘어서는 차이; 중국 군사력의 건설; 핵실험과 비확산 이슈; 지역의 지렛대로서 일본의 대중 개발원조의 사용을 넘어서는 차이.

 이 책는 다음을 연구

1, 아시아태평야지역에 군사적 영향을 포함한 거대한 영향력을 추구하는 일본에 대한 중국의 불쾌함, 2, 일본의 중국에 대한 마지못한 최선진 공업기술의 이전, 3, 일본의 대만에 대한 규준에 벗어나는 정책

아시아에서 중일간의 경쟁은 1, 중국이 권력을 확장하고, 2, 일본이 국제 규범의 확장을 추구함으로 증가.

그러나 저자들은 아시아에서 리더쉽과 지배을 위한 중일의 경쟁 모델을 거부, 그리고 강하게 억제된 세력의 행동과 결합된 이익의 광범한 집중(converge)은 중일관계를 대립보다 협력으로 유도

세계질서와 관련된 증가하는 집중에 관한 실례

1949-1971, 동경과 북경은 동서진영의 다른 편

1971년의 변화이후에도 중국은 글로벌 시장 경제를 거부

1978년부터 북경이 글로벌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현상유지가 광범하게 손상됨으로써,

특정하게 병렬된 이익을 변형, 1. 병참조직의 해양경계에 대한 안보, 2, 홍콩의 인민공화국으로의 안정적인 반환, 3, 한반도와 같이 민감한 지역의 평화의 지속

 

 

 

 

 

저자는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의 팽창은 상호협조관계를 지속시킨다고

아시아의  다른 국가는 두 개의 대국과의 좋은 관계를 희망하고, 중일의 충돌을 바라지 않는다..

두 대국의 어느 쪽의 움직이든지, 아시아의 소국들이 따라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화해에서 (소국들에게) 인지된 (양국의) 노력은 지역 명성을 확보하게 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는 중일경쟁을 견제(완화) 동경과 북경은

동경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지역 리더쉽에 편안함을 느끼지만, 북경은 미국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거부하고, 실제적으로 미국이 없다면 일본은 좀 더 강건한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려 할 것이다.

 

 

대만문제는 중일 분쟁으로 가는 남겨진 이슈, 그러나 북경조자도 위안을 위한 공간을 있다. 초기 몇 십 동안, 중국의 지도자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경제적,문화적 일본의 세력범위로 포함되는 것을 우려

(Garver의 의견) 경제적으로 대만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과 통합되고 있고, 문화적으로 대만인들은 중화세계에도 서양세계에도 속해있지 않다고 본다. 일본은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으로서 대다수의 대만인에게 인지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체성이 있는 대만인은 대부분은 구세대이고, 그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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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비스켓

세상이 컬러가 아니라 흑백으로 묘사되던 시절에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곧잘 회자되었다. 이른바 등용문 고사의 한국판 해석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개천은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했고, 용이란 이 신분적 굴례속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용어였다. 당시 개천파들이 용이 되고자하는 출구는 오직 하나였다. 즉 행정. 사법. 외무고시라고 불리우는 3대 고시 가운데 하나를 패스해야만 그 지긋지긋한 개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진입할 수 있었다. 고시라는 단어가 지금은 없어져야만 하는 과거의 유습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 고시는 개천파들이 용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그리고 이 고시는 학력, 신분, 성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고시를 목표로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60년대의 흑백 영화 속에는 <검사와 여선생>과 같은 일견 치졸해 보이는 화면속에서도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라는 한국적 꿈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는 이런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 단어가 사라진 싯점이 80년대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상한 것이다. 사실 이 80년대를 기점으로 개천과 일반의 땅과는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의 편중과 정보의 편중이 보여준 극심한 경제적 격차는 80년대의 한 단면이었다. 이 결과 누구의 시처럼 개천에는 썩은 물만 고여 고여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개천에서 결코 용이 태어날 수 없다. 60년대 70년대 판자촌의 어귀에 가끔씩 붙어있던 <축 ***의 아들(딸)의 사법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축하는 이제 고급 레스토랑 혹은 고급 호텔의 사교장에서 자신들만의 은밀한 축하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60년대 혹은 70년대의 사회처럼 공동체가 개방된 사회는 아니다. 그러기에 어느 사건에 대해 공동체가 공동으로 축하하고 슬퍼하는 장이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공간의 폐쇄성은 계급간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천에서는 저 위쪽 마른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고, 마른 땅의 사람들 역시 개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양 집단은 서로의 경계선만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고 있을 뿐이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사회는 이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체제로 보아도 무방할듯 싶다. 이런 예는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모든 사람들은 양인과 천민으로만 구분되었다. 양인들은 <주경야독>을 통해 언제든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7백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한 중봉 조헌 선생이 바로 이런 주경야독의 마지막 세대였다. 이들 조선 전기의 양인들은 사회의 역동성에 힘입어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경서를 공부하면서 국가에 봉사하는 길로 나아갈 수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면서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그 둘을 한꺼번에 성취한다는 것은 자부심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양인과 천민의 구분에서 양반, 상민, 천민으로 구분된다. 즉 양인의 세계가 양반과 다른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사회의 부와 권력은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게 된다. 이 결과 조선은 급속하게 전반기에 유지하고 있던 활력을 상실하면서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즉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통제함으로서 사회의 순환이 정지되었던 것이다.

작금에 사회의 부와 권력이 일부 소수의 손에 세습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이는 국가가 더 이상 건전한 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조짐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같다. 즉 이것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상황을 고착시킴으로서 계층간의 대립과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할 우려가 있다. 사회는 비스켓과 같아야만 한다. 곳곳에 숨쉴 공간이 뚫여있어 물렁물렁하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본질을 유지하는 그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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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로빈과 리차드

 

ROBIN AND RICHARD


Robin and Richard were two pretty men,

They lay in bed till the clock struck ten;

Then up starts Robin and looks at the sky,

"Oh, brother Richard, the sun's very high!

You go before, with the bottle and bag,

And I will come after on little Jack Nag."


로빈과 리차드는 예쁘장한 남자라네,

그들은 시계가 열 번을 칠 때까지 침대에 누어있었네:

로빈이 먼저 일어나서 하늘을 보면서,

“오, 리차드 형제, 해가 높이 떳구나!

너는 술병과 돈주머니를 챙겨 먼저 떠나라,

나는 늙은 조랑말 타고 뒤따라가지.”


해설:

  이 한가하면서도 나른한 노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연의 pretty man의 경우 속어로는 동성애자 혹은 호모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서는 은근한 동성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4연의 brother Richard를 보면 그 대상이 수도자를 지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수도사들은 자신들끼리 형제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서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한 예로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익히 불러 알고 있는 동요인 의 경우 부지런한 형과 게으른 동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도원의 아침을 묘사하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       

Brother John?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 Ding Dong,

Ding Ding Dong.

일어났나요, 

일어났나요?

존 수사님,

존 수사님?

아침 기도 종이 울려요,

아침 기도 종이 울려요.

딩-동-뎅, 딩-동-뎅.

  여기서 brother은 수도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노래에서도 brother은 수도사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혐오는 헨리 8세 이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튜어트 왕가를 거치면서 가톨릭에 대한 혐오감은 확고해 졌다. 이 결과 가톨릭 수도사에 대한 비하적인 글이나 이야기는 낮선 것이 아니었다.

  이 노래에서 보면 수도사 두 사람이 길을 가다 여관에 들러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같이 잠을 자다 일어나 한 수도사는 먼저 가고 다른 수도사는 무엇인가 다른 볼일을 보고 뒤 따라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영국에서 1534년 수장법에 의해 영국 교회가 가톨릭과 결별한 후에 가톨릭교도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1829년 가톨릭 해방법에 의해서 가톨릭교도의 시민권, 재산권, 공직 취임권을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을 종식시키면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가톨릭교도는 영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노래를 통해 가톨릭을 풍자했다고 해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풍자는 게으름뱅이와 주정뱅이에 대한 경고로 변형되어 어린이들에게 불려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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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시저의 노래

 

CAESAR'S SONG


Bow-wow-wow!

Whose dog art thou?

Little Tom Tinker's dog,

Bow-wow-wow!


멍- 멍 - 멍,

너는 누구네 개?

꼬맹이 톰 팅커의 개,

멍 - 멍 - 멍!


해설:

  한 꼬마가 호기심을 가득 담고 이웃집 담을 살짝 넘겨본다. 그러자 마당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강아지가 반가워 짖는다. 꼬마는 강아지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강아지도 꼬마에게 뭐라 말하지만 우리들의 귀에는 그저 짖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동심의 세계를 접근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Tinker라는 단어에는 부랑자, 거지라는 뜻과 함께 땜장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아이들이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놀면서도 낮선 자에 대한 경계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꼬맹이 톰 팅커의 개라고는 하지만 그 이중적인 단어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18세기의 유럽에서 어린이 유괴는 지금처럼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부랑자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놀이감이 되거나 밥벌이에 이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제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땜장이는 도시의 뒷골목이나 농촌을 돌아다니며 그릇을 땜질해 주는 본래의 일 이외에도 소식의 전달자이기도 하다. 저쪽에서 일어난 일을 이쪽으로, 혹은 이쪽의 소식을 저쪽으로 전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부랑자이면서 거지의 속성 또한 지니고 있어서 그렇게 환영받는 인간들은 아니었다.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에 보면 유럽에서는 중세 말기까지 아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놀고 일하는 작은 성인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개념은 산업혁명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들에 대한 배려가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어른들의 세계와 분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동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또 한 세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 노래의 한가한 리듬 속에는 아이들의 맹목적인 호기심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경고의 뜻이 이 속에는 담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은 성인의 개념에서 서서히 아동이라는 개념으로 변해가는 사회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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