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감각 자체가 아니다. 감각에 매몰되어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이 천상의 신들의 회전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우리 내면에 다시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는 데에 쓰일 때, “야만적인 진흙탕 속에 묻힌 영혼의 눈”은 비로소 천상의 신들이 사는 저 영원한 세계를 향할 것이다.˝
ㅡ <06. 불을 뿜는 눈: 플라톤>
현대시를 ‘그들만의 리그‘라고 자주 말하는데 철학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위의 저 문장이 21세기에 어울리는지. 차라투스트라 빙의라도 보는 거 같아 내 눈이 민망할 지경.
예술에 국한된 미학을 새로운 위상으로 쓴다는 취지는 좋지만 이 글들이 효과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야마구치 슈가 철학 등반에서 독자들이 초반에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고 한 제 1 경고대로 서양 철학의 계보와 개념들의 지루한 연결, 고답적 수사... 오랜만에 펼쳐든 진중권 저자 책인데 무척 실망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감각‘의 역사를 처음부터, 세세히 짚어보는 건 좋지만 현재의 다양한 학제 간의 지식과 적극적인 연계, 독자의 호기심 자극 등이 부족해 나로선 근본적으로 답답하다. 3부작으로 기획된 책이라는데 이런 식이라면 적극적으로 따라갈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한 건 친절한 대중서는 아니라서 저자의『미학 오디세이』3부작 정도로 기대한 독자라면 그보다 어려울 거라는 각오를 하시길-,-)))

시대의 전환기마다 권력은 구성원들의 신체를 뜯어고치는 생체공학을 발동한다. 가령 감각을 불신하고 정념을 억압하는 데카르트형型 아이스테시스는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을 근대 국민국가의 합리적 주체subject이자 신민으로 길들이려는 기획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아이스테시스의 유미화는 서구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유미화의 결실인 미적 예술문화를 파괴하려 한 모더니즘 예술은 산업혁명, 특히 산업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시민사회에 던져준 정치미학적politico-aesthetic 충격의 미학적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데카르트주의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성주의의 패러다임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감각지각, 즉 아이스테시스를 구제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미학(감성론)이라는 학문은 바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근대미학(감성론)이 구제한 아이스테시스는 신체활동으로서 감각sensation이 아니라 정신의 하위활동으로서 지각perception이었다. 지각이란 감각이후post-sensory와 이성이전pre-rational의 인지능력이다. 이 영역을 대륙의 이성주의자들은 ‘유사이성’으로,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유사감각’으로 여겼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미학에서 다루는 감성의 영역이 대체로 과거에 ‘내감’이라 부르던 영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한동안 망각되었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내감 이론이 미학을 통해 다시 부활한 셈이다. 공통감, 상상력, 판단력 등 과거 내감의 목록을 이루던 능력들은 18세기에 일어난 감각의 유미화를 통해 새로이 정위定位된다. 근대미학에서 아이스테시스는 ‘지각’으로서만, 그것도 미적 지각으로서만 구제된다. 한편 과도한 이성주의를 수정하는 또다른 방식이 있다. 아예 그것의 토대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근대철학의 완성자 헤겔은 미학이 애써 복원한 감성의 영역을 다시 증발시켜버렸다.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감성의 영역은 자연으로 ‘외화外化’했던 정신이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궁극적으로 ‘지양止揚’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급진적인 이성중심주의의 근원도 데카르트주의다. 따라서 아이스테시스의 영역을 온전히 복원하려면 데카르트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신체와 정신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근원적 체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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