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트(Arrival)를 보고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이미지와 단상들이 충돌하는 내 사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사유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유방식이라는 걸 안다.

헵타포드가 등장했을 때 나는 이기봉 the Cloudium'(흐린 방)(2012) 전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사각의 검은 방안에 창 너머 검은 나무가 안개 사이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아주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안개가 뿜어져 나와 그 모습을 계속 가렸다.

 

 

 

 "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

 

그때의 나는 헵타포드를 만났을 때의 인간과 루이스 뱅크스와 같았다.

 

우리는 이런 유비를 끊임없이 찾고 만드는 존재이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과 이기봉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존재의 심연이라고 생각한다. 드니 빌뇌브 영화를 몇 편 본 사람이라면 강렬한 이미지로 늘 그것이 제시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르마의 물리 철학이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다. 빛은 최단 시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는 설명으로, 물리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는 합목적성과 목적론적이라고 과학자 게리(영화에서는 이안’)는 말한다. 페르마의 원리로 빛의 직진과 반사와 굴절이 설명된다. 물리학을 잘 모르면서도 페르마의 원리에서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처음과 끝의 상정이었다. 설정부터 이미 인과성이 스며들어 있다. 그 합목적성과 목적론도 인간의 인지적 한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인과성과 목적론적 해석은 이미 양립한다는 것.

 

인과적인 해석과 목적론적인 해석이 양립하는 물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적 사건은 두 가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보의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라는 측면에서.”

 

광선이 어떤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중략)……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는 양 종족 모두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했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궁극적인 세계관의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에 비해, 헵타포드들은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지각한다. 헵타포드들은 모든 사건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

 

 

나는 며칠 전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겨우와 전부는 아주 가까운 어휘 군이다.” 최소와 최대가 매우 가깝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지만 나는 이 말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테드 창은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도출로 빛처럼 헵타포드도 미래를 알고 이 순간에 있다고 설정했다. 그러나 소설에서 헵타포드는 정보의 전달도 계획의 현실화도 의지적으로 하려는 존재가 아니었다. 거기 있었고 인간이 다가와 그들이 원하는 것에 응할 뿐이었다. 그들은 지구 방문을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밝히지만 '그 관찰의 목적'은 구체적이지 않다. 소설에서는 우주에서 헵타포드와 가장 유사한 생물 형태가 지구인이라는 설명이 짤막하게 제시되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헵타포드의 목적론적 해석보다 인간의 관점, 특히 언어학자인 루이스의 목적론적 해석이 중심이다. 테드 창의 논리대로 목적론적인 해석을 하는 헵타포드의 사유 형태가 녹아있는 헵타포드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페르마의 원리에서 도출한 결과ㅡ'미래를 안다는 건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 ->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미래를 안다면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ㅡ에서 볼 수 있듯이 루이스는 미래를 전혀 바꿀 수 없었다. 이 소설이 과거 회상 시제인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여기서도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본 단 하나의 미래일 뿐이라면?  영화 컨택트(Arrival)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감독의 목적론적 해석이 이야기를 끌어 간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 속 헵타포드는 미래의 종말을 막고자 인간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헵타포드 사유 체계(언어)를 전하러 온 목적이 있었다. 

목적론적 해석을 뿌리 깊게 흔드는 존재는 루이스와 게리(이안) 낳은 딸이다. 그들은 아이를 원해 낳았지만 어릴 때부터 성장해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루이스는 딸을 사랑한다. 열렬히.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목적론적 해석으로만 봐야 할까. 계획의 현실화같이 DNA가 종족 보존을 위해 최소화와 최대화로 낳은 결과라고 말해야 하나. 아이를 원해서 낳았지만 아이는 외계 생명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준다. 멀리서 보면 연속성이지만 삶은 순간의 점선들이 모여 이뤄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목적 수많은 법칙을 수렴하는 어떤 본질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움직이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빛은 그때 움직였고 우리의 마음도 그때 움직였다. 빛은 계속 움직일 것이고 우리의 마음도 계속 움직일 것이다 소설 속 루이스(헵타포드 포함)는 미래에 순응하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였다면 영화 속 루이스는 순간의 기쁨(아이같은 상태)을 놓치지 않으려 미래를 적극 수용하는(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유의지를 느끼려 하는) 차이가 있었다. 헵타포드가 과거로 와 인류에게 미래를 바꾸게 하는 드니 빌뇌브의 설정은 테드 창의 결정론적인 빛의 세계와는 대치된다. 다른 설정에서도 테드 창과 드니 빌뇌브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아이가 어머니의 통제를 극도로 싫어해 산악등반을 취미로 갖게 돼 죽음을 맞은 인과성을 보여줬다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아이가 희귀병에 걸리는 우연성을 보여줬다(네티즌들은 루이스가 헵타포드 우주선에 방호복을 입지 않고 들어가서 그런 아이를 낳았다는 인과성을 만들더라만;;;). 영화는 아이를 미래에 두었고 그 죽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헵타포드가 루이스에게 미래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줬듯 아이의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결과는 같겠지만 과정의 차이는 아주 크다. 또한 빛이 최단 거리로만 도착하지 않는 결과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다른 거리를 만드는 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거리를 바꾸는 것은 순간의 우연들, 선택들, 과정들 아닐까. 자유의지는 바로 이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한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순간들을 모아 우리는 인과를 연결하고 이 속에서 산다 영화 컨택트(Arrival)속 헵타포드의 12개 우주선을 모아 하나의 를 그린 나처럼. 인간을 위한 설명이 아닌 이 순간에 대한 표현으로.

 

 

2017. 2. 4 1일 1그림 -  球와 헵타포드

 

 

 

 

 

& 음악

 좋아하는 뮤지션 Johann johannsson이 음악을 맡아 널리 알려지게 된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ㅎㅎ

 

 요한 요한슨에 대한 페이퍼 : http://blog.aladin.co.kr/durepos/7471070

 

 오프닝에 좋아하던 Max Richter 음악 나오는 거 듣고 숨이 멎을 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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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2-05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2차원에서는 가장 먼 두 점이 3차원에서는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Agalma님 말씀을 듣고 나니 떠오르네요. 이번에 나온 contact가 예전 조디 포스터 주연의 동명 영화와 같은 내용인가요?^^: 궁금해 집니다.

AgalmA 2017-02-05 18:14   좋아요 2 | URL
오,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네요^^
종이를 접으면 마주한 두 점이 한 점으로 만나죠^^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나왔죠.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 설명이었던 거 같은데...정확한 기억은 아닙니다.
조디 포스터가 나온 콘택트 영화는 칼 세이건 소설이 원작인데, 그 영화 유명세 덕을 보고자 국내 제목을 이렇게 지었다고 하더군요ㅎ;
하지만 칼 세이건 작품과 공통점은 있습니다. 외계인은 지구를 침략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남성 우위적 과학사에서 여성이 문제의 열쇠를 제시하는 페미니즘적 접근 등^^

겨울호랑이 2017-02-05 21:17   좋아요 2 | URL
이런.. ㅋ 하마터면 칼 세이건 작품으로 낚일뻔 했네요 ㅋ 그래도 Agalma님 말씀을 들으니 다른 각도에서 작품의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박람강기 2017-02-05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집어주셨네요..소설을 먼저 읽었던 터라 미래를 인지하는 주인공의 혼란스런 감정을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했는데 영화도 나름데로 잘 묘사했다고 봅니다.

AgalmA 2017-02-05 21:33   좋아요 1 | URL
인과와 목적론적 해석에 집중해서 글을 풀어가다 보니 소설에서 아주 상세히 풀어가던 언어에 대한 부분은 이 글에서는 못 풀어낸 거 같아 아쉽습니다. 언어 공부를 좀 더 하게 되면 다시 말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자신의 내러티브로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2-05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습니다. 제가 영화 보고 하고 싶었던 얘기 해 주셨습니다.
합목적성과 충족이유율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내용이었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든 것은 언어가 인간 사고를 결정한단 말이었습니다. ^^
여하튼 정말 대단한 감독과 대단한 원작인 영화였습니다. ^^

AgalmA 2017-02-05 21:40   좋아요 1 | URL
인과와 자유의지 이야기 나오면 늘 논란거리가 되는 거 같아요^^; 저라고 제가 옳다라고 확증할 수 있겠습니까. 제 깜냥에 따른 심증일 뿐이죠.
샤피어 워프 가설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죠. 인간에겐 언어문법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 학설에 많이 밀리긴 했지만, 이 부분도 양가적인 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 사회적인 부분과 본질적인 부분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나와같다면 2017-02-05 2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alma 님.. 기다리던 컨택트(Arrival)를 봤어요..
님의 글만 읽어도 마음이 뛰네요
단상들은 기록해 놨는데 몸이 좀 회복되면 천천히 다시 정리해보려구요

드니 빌뇌브 감독이 만든 SF..
깊은 사유, 섬세함, 믿음,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뜨린다는 거..
이 모든 것이 감동적이였습니다

AgalmA 2017-02-05 23:47   좋아요 2 | URL
보셨군요^^ 올초는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와 봐야 될 게 참 많은 듯합니다. 일에 치여 라라랜드, 너의 이름은, 에곤 쉴레, 단지 세상의 끝 목록만 꼽으며 못 보고 있습니다ㅜㅜ. 이 영화도 일 끝내고 녹초 상태에서 심야로 봤어요;;

드니 빌뇌브의 이 영화는 뭐랄까. 이냐리투 감독이나 테렌스 멜릭 감독같이 존재론적인 걸 건드리는 섬세한 작품였죠. 음악도 너무 잘 썼어요!.
나와같다면님 쓰신 감상도 보고 싶네요. 어서 쾌차하시길 빕니다. 아플 땐 쉬어갈 타이밍을 몸이 챙겨주는 것 같다 싶죠. 스스로를 잘 챙겨 주시길...

아무 2017-02-0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컨택트가 원제가 아니었군요.. 동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약간의 반발심(?)이 생겼었는데, 한번 보러가야 될 것 같네요 ㅎㅎ
좋아하는 뮤지션이 알려졌을 때의 양가적인 기분은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AgalmA 2017-02-06 00:06   좋아요 1 | URL
마트 할인선전 같은 포스터도 그렇지만 제목 때문에 네티즌들의 원성이 자자ㅎㅎ arrival이 가지는 중의적 의미(도착과 선물)를 살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좋은 영화입니다. 3d로 만들었으면 <그래비티>랑 당당히 경쟁했을 듯! 드니 빌뇌브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로 유명하잖아요. 이 영화도 참 대단함요! 에어리언 때문일까요. SF와 여성이 엮인 좋은 영화...이거 연구해 볼 가치 있는 거 아님까ㅎ
아아...나의 요한 요한슨... 사랑 많이 받길 바라요ㅜㅜ

뷰리풀말미잘 2017-02-0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짓말쟁이!! 나의 햅타포드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어!!! ㅠㅠㅠㅠㅠㅠ

AgalmA 2017-02-06 10:20   좋아요 0 | URL
자자, 흥분하시지 말고요. 뷰리풀말미잘님의 헵타포드를 그려 볼까요^^(간호사 버전)
영화 속 헵타포드는 나무처럼 생겼는데 문어같이 그린 거 인정^^; 그래서 이기봉 작품 이미지도 가져 왔잖음ㅎ

qualia 2017-02-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galma 님, 윗글을 이해하려고 애써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식력이 딸린 것에도 까닭이 있겠습니다만,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인 듯도 합니다. 제 판단엔 Ted Chiang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Story of Your Life」에서 말하고자 했던 물리학적/철학적/언어학적 등등의 논제들을 불명료하게 파악했거나, ‘섞바꿔’ 혼동스럽게 이해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글 내용의 전개를 힘겹게 따라가면서, 앞뒤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자꾸 맴돌게 됩니다. Ted Chiang은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 인과론적 해석(causal interpretation), 목적론적 해석(teleological interpretation), 정보 전달(a transmission of information), 계획 실현(the realization of a plan), 의식(consciousness), 자유의지(free will) 등등의 개념을 서로 얽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는데요. 원문을 읽어보았더니 어떤 일관되고 꽉 짜인 논리적 줄거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까 Agalma 님의 윗글은 논리적 줄거리를 잡아내기가 힘듭니다. 혹시 저만 그런가 싶어 의문스럽습니다. 위에 댓글을 남기신 분들은 Agalma 님의 얘기가 무슨 얘긴지 이해하셨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AgalmA 2017-02-07 14:21   좋아요 3 | URL
qualia님, 이해라는 걸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에는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잘 알아서 받아들임‘이라고 되어 있죠. 즉 어떤 의견이나 물체, 사건, 현상 등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나 동의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보고 싶은 만큼, 이해하고 싶은 만큼 이해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해란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님이 노력을 안 했단 말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 안 된다고 다른 분들에게까지 무례한 게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런다 하셔도 그 분들은 그 분들 나름의 이해 과정이 있겠죠.

테드 창의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 인과론적 해석(causal interpretation), 목적론적 해석(teleological interpretation), 정보 전달(a transmission of information), 계획 실현(the realization of a plan), 의식(consciousness), 자유의지(free will)‘는 자기 논리에 맞게 연결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위 본문에서도 밝혔지만 페르마의 원리에서 시작과 끝은 누가 상정한 겁니까. 태양이 시작입니까, 우주의 시작조차 명확치 않은데 빛의 시작을 어디로 잡고 있는지? 최단과 최대 거리를 도출할 끝지점은 어디입니까?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우리의 가정에 지나지 않아요. 답을 얻기 위한. 최소와 최대를 보여주는 변분 원리가 사실일 거라고 qualia님은 확신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전 생각이 좀 다른데요. 직각좌표계로 환원하는 인간의 이해방식이란 생각은 안 듭니까.
시작과 끝을 말하는 종교적 메시지와 감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요?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도출에 이 소설은 모든 걸 짜맞추고 있어요. 헵타포드는 그런 인식을 가졌고(즉 미래를 봄), 헵타포드 B 언어를 습득하게 된 루이스도 미래를 보게 되죠. <세월의 책> 얘기 꺼내며 미래를 안다는 건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라 말하죠.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요. 급기야 미래를 안다면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못을 박습니다. 모든 걸 안다는 건 여러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해석이죠. 테드 창은 루이스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미래에 아이를 다치게 할 샐러드볼을 사게 만들고 게리와 아이를 가지게도 만들었습니다. 과거의 만족감에 대한 기억도, 미래의 충족에 대한 기대감도 없이 현재 시제만 사는 아이의 상태를 부러워하기도 하죠. 소설에서 아이는 시종일관 자유의지적 존재로 비치고 있습니다. 엄마의 통제를 극도로 싫어했던 아이가 산악 등반을 취미로 가지게 되었고 죽은 게 루이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상황을 바꿀 수 없었죠.
루이스 경우는 자신이 본 미래에 순응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본 하나의 미래일 뿐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은데요. 그녀가 만든 최대거리입니다. 목적론적 해석과 인과론적 해석이 딱 붙어있죠. 테드 창은 다른 가능성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테드 창의 이 단편과 인식론에 제가 느끼는 한계입니다.


qualia님이 테드 창 소설을 어떻게 이해하셨다는 건지 님 글이 더 모호합니다. 개념 단어들을 원문으로 가져 오셨다고 해서 님이 그걸 이해했다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님은 그 소설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댓글에서 전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이해시키라는 요구만 하고 계시네요. 이 댓글로 님의 의문이 조금 해소되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저는 qualia님 글을 대체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겐 님의 논지가 궤변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님에 대한 인신공격이 아니라 제 얘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제 글을 그렇게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옳다라는 게 아닙니다. 각자 너무나 다르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걸 보며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는 걸 매일 뼈저리게 느끼니까요. 이 현실이 바로 바벨탑이죠.
개념은 일반적인 지식이고 우리의 일종의 합의이지 절대성이 아닙니다. 그 틀에서만 본다면 비판의식, 비평이 무슨 소용인지?
추후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가 아니라 테드 창과 컨택트에 대한 비평을 하시는 게 qualia님께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다른 이에 대한 비평은 쉽지만 자기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건 쉽지 않죠. 어려운 만큼 도움도 되는 일이죠.

그리고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나쁘다, 틀렸다로 직결시키는 건 아닌지 님의 태도도 좀 고찰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곳 알라딘 서재는 그게 참 심하더군요. 자기 생각 툭 던져 놓고 항상 상대에게 이해시켜 보라고 하죠. 자신이 아는 것 & 모르는 것에 대한 유보나 고찰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 말입니다. 비평 주제에 대해 진정 이해가 된 상태라면 무엇이 틀렸고 이것은 이렇다 자신이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두루뭉술 아닌 거 같다 말하면 뭐 어쩌란 말입니까? 님의 논리적 줄거리란 것은 뭐 어떤 겁니까? 그리고 그걸 제가 꼭 만족시키고 이해시켜야 합니까? 님이 이 얘길 쓰신다면 제게 확실한 만족과 이해를 주실 거 같은가요?
물론 저도 경솔할 때 있습니다. 위의 본문은 유보적인 생각을 파편적으로 펼쳐놔 모호할 수도 있었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방식이고 그런 성격이 섞인 글입니다. 제가 논문 심사 받는 거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요. 노력은 합니다만 한계란 것도 있으니까요. 이 말 해도 저 말로 알아듣고, 어렵다로 블라인드 내리는 일도 부지기수인데 누구를 위해서 장시간 투자해가며 설명하고 보완하고 답하고 해야 하나 싶을 때도 많죠.
하지만 qualia님 댓글은 제겐 직접적으로 주신 건 없지만 제 생각을 다시 고찰하게 해서 유의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테드 창의 루이스는 인식론에 갇혀 미래를 받아들이는 부두인형 같았다면, 드니 빌뇌브의 루이스는 순간의 기쁨(아이같은 상태)을 놓치지 않으려 미래를 적극 수용하는(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유의지를 느끼려 하는) 차이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소설과 영화를 섞어 버려서 혼동을 줬을 거 같습니다. 영화만 봤거나 소설만 본 사람들에겐 특히 그럴 소지가 있었습니다. 제 표현 부족은 읽는 이가 ‘이해‘해 줬으면 하고요. 이런 글도 있다는 ‘이해‘도.

앞으로 제게 댓글을 주실 때는 원문이나 개념어 나열하시지 말고요. 본인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목해 논거를 해주십시오. 그래야 피차 힘들지 않죠. 이 댓글 쓰면서 몇 시간을 소모했는지...내가 요청한 바도 아닌데 나만 소진되는 이런 대화 사절입니다.

맥거핀 2017-02-09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안봐서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사실 봤어도 별로 할 말은 없을 듯한 내용이군요. (이른바 ‘낄끼빠빠‘의 자세라고나 할까요?^^) 저는 사실 왜 조약돌(영화 포스터에 있는 거 말입니다. 뭐 조약돌은 아니지만요.) 굳이 세워놨을까? 왜 저 디자인을 선택했을까? 그 생각만...아무 말도 안 하는게 더 나을 것 같지만, 생존신고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AgalmA 2017-02-09 04:12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좋은 영화 많던데 왜 영화 리뷰 안 보여 주세요^^?
맥거핀님이 ˝낄끼빠빠˝ 축약 표현 쓰시는 게 살짝 웃깁니다ㅎ
아, 저 우주선 디자인의 수직성은 영화 보시면 이해가 되실텐데... 우주선 내부 스토리에서 중요합니다. 무중력 상태의 기묘한 공간감(보시면 새로운 경험을 느끼시게 될 거에요), 빛을 향한 종교적인 느낌도 구현하죠. 마지막으로는 사라지는 방식에서 극치를 보여줍니다^^ 스포될 거 같아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소설과는 다른 설정이죠.
집(서재)은 있는데 사람은 어딨는지 몰라 찾으러 갈 수도 없고ㅎ 자진 생존신고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헵타포드 나오는 광경이 <에너미>랑 겹쳤는데, 드니 빌뇌브가 이런 기묘한 생물체와 환상성 때문에 이 영화 맡은 거 아닌가 했다는ㅎ

북다이제스터 2017-02-09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설명이세요. 사람이 때때로 비판적일 수도 있지만, 항상 자기 편향적 설명을 저도 지양합니다. ^^

AgalmA 2017-02-10 11:12   좋아요 0 | URL
어쩐지 본문보다 qualia님께 쓴 댓글이 더 논리적인 리뷰 같지 않습니까ㅎㅎ 그런 의미에서 qualia님이 기여해 주신 바가 있죠^^; 그래도 아마 저는 맨 처음 저 난장같은 페이퍼 글을 계속 쓸 거 같아요. 이것저것 섞으며 바라보는 게 더 재밌으니까ㅎ; 전달받는 사람들 신경 쓴다고 썼는데 역시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늘 부족하죠^^;; 저 글 속에서 의미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