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Arrival)》를 보고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이미지와 단상들이 충돌하는 내 사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사유도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유방식이라는 걸 안다.
헵타포드가 등장했을 때 나는 이기봉 《the Cloudium'(흐린 방)》(2012) 전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사각의 검은 방안에 창 너머 검은 나무가 안개 사이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아주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안개가 뿜어져 나와 그 모습을 계속 가렸다.
"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
그때의 나는 헵타포드를 만났을 때의 인간과 루이스 뱅크스와 같았다.
우리는 이런 유비를 끊임없이 찾고 만드는 존재이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과 이기봉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존재의 심연이라고 생각한다. 드니 빌뇌브 영화를 몇 편 본 사람이라면 강렬한 이미지로 늘 그것이 제시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페르마의 물리 철학이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다. 빛은 최단 시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는 설명으로, 물리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는 합목적성과 목적론적이라고 과학자 게리(영화에서는 ‘이안’)는 말한다. 페르마의 원리로 빛의 직진과 반사와 굴절이 설명된다. 물리학을 잘 모르면서도 페르마의 원리에서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처음과 끝의 상정이었다. 설정부터 이미 인과성이 스며들어 있다. 그 합목적성과 목적론도 인간의 인지적 한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인과성과 목적론적 해석은 이미 양립한다는 것.
“인과적인 해석과 목적론적인 해석이 양립하는 물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적 사건은 두 가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보의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라는 측면에서.”
“광선이 어떤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 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중략)……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는 양 종족 모두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했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궁극적인 세계관의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에 비해, 헵타포드들은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지각한다. 헵타포드들은 모든 사건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
나는 며칠 전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겨우와 전부는 아주 가까운 어휘 군이다.” 최소와 최대가 매우 가깝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지만 나는 이 말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테드 창은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도출로 빛처럼 헵타포드도 미래를 알고 이 순간에 있다고 설정했다. 그러나 소설에서 헵타포드는 정보의 전달도 계획의 현실화도 의지적으로 하려는 존재가 아니었다. 거기 있었고 인간이 다가와 그들이 원하는 것에 응할 뿐이었다. 그들은 지구 방문을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밝히지만 '그 관찰의 목적'은 구체적이지 않다. 소설에서는 우주에서 헵타포드와 가장 유사한 생물 형태가 지구인이라는 설명이 짤막하게 제시되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헵타포드의 목적론적 해석보다 인간의 관점, 특히 언어학자인 루이스의 목적론적 해석이 중심이다. 테드 창의 논리대로 목적론적인 해석을 하는 헵타포드의 사유 형태가 녹아있는 헵타포드 언어를 습득한 루이스는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페르마의 원리에서 도출한 결과ㅡ'미래를 안다는 건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 ->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미래를 안다면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ㅡ에서 볼 수 있듯이 루이스는 미래를 전혀 바꿀 수 없었다. 이 소설이 과거 회상 시제인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여기서도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본 단 하나의 미래일 뿐이라면? 영화 《컨택트(Arrival)》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감독의 목적론적 해석이 이야기를 끌어 간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 속 헵타포드는 미래의 종말을 막고자 인간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헵타포드 사유 체계(언어)를 전하러 온 목적이 있었다.
목적론적 해석을 뿌리 깊게 흔드는 존재는 루이스와 게리(이안)가 낳은 딸이다. 그들은 아이를 원해 낳았지만 어릴 때부터 성장해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루이스는 딸을 사랑한다. 열렬히.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목적론적 해석으로만 봐야 할까. ‘계획의 현실화’ 같이 DNA가 종족 보존을 위해 최소화와 최대화로 낳은 결과라고 말해야 하나. 아이를 원해서 낳았지만 아이는 외계 생명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준다. 멀리서 보면 연속성이지만 삶은 순간의 점선들이 모여 이뤄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목적이 수많은 법칙을 수렴하는 어떤 본질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움직이는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빛은 그때 움직였고 우리의 마음도 그때 움직였다. 빛은 계속 움직일 것이고 우리의 마음도 계속 움직일 것이다. 소설 속 루이스(헵타포드 포함)는 미래에 순응하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였다면 영화 속 루이스는 순간의 기쁨(아이같은 상태)을 놓치지 않으려 미래를 적극 수용하는(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유의지를 느끼려 하는) 차이가 있었다. 헵타포드가 과거로 와 인류에게 미래를 바꾸게 하는 드니 빌뇌브의 설정은 테드 창의 결정론적인 빛의 세계와는 대치된다. 다른 설정에서도 테드 창과 드니 빌뇌브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아이가 어머니의 통제를 극도로 싫어해 산악등반을 취미로 갖게 돼 죽음을 맞은 인과성을 보여줬다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아이가 희귀병에 걸리는 우연성을 보여줬다(네티즌들은 루이스가 헵타포드 우주선에 방호복을 입지 않고 들어가서 그런 아이를 낳았다는 인과성을 만들더라만;;;). 영화는 아이를 미래에 두었고 그 죽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헵타포드가 루이스에게 미래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줬듯 아이의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결과는 같겠지만 과정의 차이는 아주 크다. 또한 빛이 최단 거리로만 도착하지 않는 결과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다른 거리를 만드는 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거리를 바꾸는 것은 순간의 우연들, 선택들, 과정들 아닐까. 자유의지는 바로 이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한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순간들을 모아 우리는 인과를 연결하고 이 속에서 산다. 영화 《컨택트(Arrival)》 속 헵타포드의 12개 우주선을 모아 하나의 球를 그린 나처럼. 인간을 위한 설명이 아닌 이 순간에 대한 표현으로.
2017. 2. 4 1일 1그림 - 球와 헵타포드
& 음악
좋아하는 뮤지션 Johann johannsson이 음악을 맡아 널리 알려지게 된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ㅎㅎ
요한 요한슨에 대한 페이퍼 : http://blog.aladin.co.kr/durepos/7471070
오프닝에 좋아하던 Max Richter 음악 나오는 거 듣고 숨이 멎을 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