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 펜, 파스텔, 소요시간: 50분 ※펜을 쓴 것은 매우 실수였다. 돌이킬 수 없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동화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은 그런 것들이 가득 담겨 있는 보석상자다. 나는 그런 보석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그림을 그리듯 이야기를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걸 발견하게 된다.
말(馬)이 없는 마을
빨간머리 앤이 살고 있을 법한 작은 마을이 있다.
앤은 없지만 이 마을의 아이들도 늘 책을 읽는다.
아버지가 스님이었던 C는 헤세를,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린 A는 세르반테스를 읽고 있었다.
그들의 형, 언니들은 도스토옙스키나 체 게바라를 읽었다.
그저께는 A의 삼촌이 죽었다. 사거리 시내에서 갑작스럽게.
그 포즈는 알베르 카뮈 같았다고 했다.
하필 너무 시적인 사람이 목격자였다.
C와 A는 그게 어떤 포즈였을까 이야기하며 걸었다.
아직까지 그들에겐 죽음은 시적인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는 중 A와 C는 동시에 한 곳으로 시선을 멈췄다.
곰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튼튼한 다리로 거뜬히 물살을 가르며.
A와 C는 들고 있던 책을 꾹 움켜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조용한 6월이었다.
C는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ㅡ 한 번쯤 돌아봐 줘도 좋을 텐데.
A는 곰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ㅡ 우리에게 달려오면? 너는 아파서 도망도 가기 전에 숨차 죽을걸
C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A를 힐긋 보고 말했다.
ㅡ 너, 내가 얼마나 빠른지 알게 될걸? 하지만 죽진 않을 거야. 곰이 우릴 죽일 이유가 없잖아.
곰의 모습이 숲 속 나무 사이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자 A는 말을 이었다.
ㅡ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어, 조각을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얄지 잘 모르겠어.
C는 A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이 흐트러진 채 대충 대꾸했다.
A도 그 시선을 좇으며 말을 이었다.
ㅡ 권진규 馬頭 조각 본 적 있어?
C는 다리 난간쪽으로 발을 떼며 말했다.
ㅡ 어, 아니, 잠깐.
C는 다리 아래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 떠내려 보낸 하얀 종이배였다.
어느 마을이나 그렇지만 이 마을 강가에도 온갖 것이 떠내려 왔다.
먹을 것이 담겨 있던 갖가지 포장지, 살이 부서진 낡은 우산,
어느 아기의 알록달록한 장난감, 누군가의 신발.
어느 날은 하구에서 젊은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형사들이 다녀갔지만 그 일은 물에 젖어버린 채 지나가 버렸다.
C는 그런 강가의 온갖 것들을 찍었다.
ㅡ 곧 여름이 오니까 떠내려 오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어. 올핸 어떤
사진들을 찍게 될까, 그런데 아까 뭐라고? 馬頭라고?
A는 C를 흘겨보곤 웃으며 말했다.
ㅡ 아니, 코뿔소라고 했어!
A는 미셸 투르니에가 얼마나 말 예찬론자인지 흥분하여 떠들었고,
C는 평생 말 한 번 못 타보고 죽을 거 같다고 짐짓 걱정스레 말했다.
말이 한 마리도 없는 마을은 이른 여름의 숲 냄새로 가득하고 그들은 스스로 차려 먹을 저녁식사를 위해 집으로, 집으로.
ㅡ 落馬하는 돈키호테
A는 자신이 만들 첫 조각의 이름은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랫동안 잊혔다.
내일은 또 다른 이야기로 그들은 이 마을에 살고 있을 것이다.
ㅡ Agalma
권진규(1922-1973, 자살)
"마두"(1969 / 34x58x20 /테라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