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둘러봐도 루비나는 참으로 슬픈 곳이오. 당신도 거기 가면 알게 될 거요. 거기에는 슬픔이 터전을 잡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소. 다들 얼굴에다 판때기를 붙인 것처럼 도통 웃을 줄을 몰라요. 당신도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슬픔을 보게 될 거요. 그곳엔 바람이 슬픔을 휘젓긴 하지만 다른 데로 데려가진 않아요. 슬픔이 마치 거기서 태어난 것처럼 말이오. 거기선 심지어 슬픔을 맛보고, 느낄 수도 있소. 왜냐하면 바람이 누군가를 덮치고, 누군가를 억누르고, 마치 살아 있는 자의 심장을 찜질하듯 꾹꾹 짓누르고 있거든."
"그들의 말이 맞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렇게 대답한 노인의 정부는 자식들 중에 누군가가 저 아랫마을에서 어떤 죄를 지었을 때만 기억하는 정부였다, 이거요. 루비나까지 쫓아와서 죄 지은 자식을 죽이는 정부 말이오. 그러니 그들에게 정부가 존재할 리 만무했던 거요."
ㅡ 후안 룰포 <루비나>
후안 룰포 《불타는 평원》에는 17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쓸모 없는 황무지에서 정부마저 적이 되는 처지에 대해서, 「그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었다」, 「불타는 평원」 , 「난장판이 벌어진 날」
척박한 환경에서 서로에게 악당이 되는 것에 대해서, 「꼬마드레스 언덕」, 「새벽에」, 「띨빠」, 「기억해봐」, 「아나끌레또 모로네스」
잃을 게 하나뿐인 삶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가난하답니다」, 「마까리오」,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 「루비나」, 「빠소델노르떼」, 「너는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은 거야」, 「마띨데 아르깡헬의 유산」
쫓고 쫓기는 막다른 길에 대해서, 「그자」, 「홀로 남겨진 밤」
후안 룰포는 멕시코 민중들의 삶을 그리며 동시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사람의 삶과 서정을 메스로 도려낸 듯 보여주고 있었어요. 다른 방식으로는 보여줄 수 없다는 듯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을 읽으며 무시무시한 밤을 경험한 건 두 번이었다고 합니다. 카프카 《변신》과 후안 룰포 《뻬드로 빠라모》를 읽었을 때 였죠. 저도《뻬드로 빠라모》(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가 스토리상으로도 작법상으로도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는 걸 회상하며, 이 작품의 진가를 알기엔 아직 부족한 게 많구나 절감하기도 했지요. 《불타는 평원》을 먼저 읽었다면 덜 당황하고 생소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는《불타는 평원》(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이 국내에 소개되기 전이었죠. 이번에 《불타는 평원》을 읽으며《뻬드로 빠라모》를 좀 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식상하다고 생각해온 '리얼리즘'이 가지고 있는 통각 중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 말과 말이 끝없이 교차하며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속에 남는 알맹이. 폭력과 잔인함 속에서도 결코 불타지 않고 남는 것들을. 그것은 선악의 기준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인간적이었습니다.
1917년 생인 후안 룰포는 초등학교 졸업이 공식 학력이지만 여기저기서 청강을 하며 공부를 놓지 않았어요. 내무부 이민국에서도 근무하고 타이어 회사 영업 사원이 되기도 하면서 틈틈이 습작을 했습니다. 단편집《불타는 평원》(1953)과 장편 소설《뻬드로 빠라모》(1955) 단 두 작품집만으로 그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의 기념비가 되었지요. 《뻬드로 빠라모》가 마르케스《백년의 고독》 속 '마꼰도'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니까요. 이후 시나리오 작품집 《황금 수탉, 영화 텍스트》(1980)와 사진 작품집 《지하 세계》(1981) 외에 그가 남긴 건 없어요. 이토록 뛰어난 글쓰기 재능에도 불구하고 후안 룰포가 왜 영화와 사진으로 방향을 바꾸고 나서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그 시대엔 소설보다 다른 말하기 방식이 더 좋다고 생각한 걸까요? 창작에 있어 돌아갈 길을 없앤다는 건 한 방향만의 전진을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렇게 제겐 그의 작품만큼이나 그도 미스터리 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그에게도 나에게도. 상상의 공동체로서.
무엇이 올지 모르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책 얘기를 하고 음악을 같이 듣기도 하면서 지나가는 계절을 몇 번이나 더 맞을까요.
틈틈이 그림 그리기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불타는 평원》도서 구입에 기여해주신 상상 속 그장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