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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미끼를 달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으라는 대사로 멋지게 시작하는 에리 데 루카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대신 리처드 브라우티건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먼저 집어든 건ㅡ 두 소설 다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ㅡ 일요일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제목과 그의 발문 때문이다.
“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인지력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상상력과 인지력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이미지와 메타포의 시적 테크닉은 그렇게 해서 쓰인 작품을 다분히 서정적으로 만들어준다.”
서.정. 그것은 성취일까, 한계일까. 여긴 어떤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서정”은 만들어지는 싸구려 감성이 아니다. “신파”와 혼동하지 말 것. 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시를 완강하다고 할 정도로 “서정시”로 읽고 받아들이려 하는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서정”은 진부함이 아니다. 인간이 예술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추구해 온 가치 중 하나다. “서사”성은 소설이 이어 받았다. 요즘은 이런 경계를 거부하는 이도 많지만. 독자 보다는 작가 쪽에서 더.
리처드 브라우티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작가. 언어보다 행간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작가. 나중엔 어떨지 몰라도 개시(開示)된 언어에 이견을 달 수 없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내게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그렇다. 나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먼저 발견하고 이해한 사람들을 가끔 시샘한다. 박정대 시인을 제일...
박정대 시인의 데뷔시집(1997, 세계사)이자 표제시 「단편들」은 리처드 브라우티건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가져와 시작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녹아있다. 그 다음 시집에서도. 계속.
그리고 이젠 20년이 다 되어간다.
“상상력과 인지력”의 언급은 철학과 과학이 “주관과 객관”의 싸움판을 벌이는 것과 연관되어 보이기도 한다. 주관과 객관-내면세계에 대한 각투(角鬪),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문학은 어떻게든 소통하게 하려는 멋진 예술이지, 하고 나는 일요일답게 중얼거린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62편의 단편 중 첫 번째 이야기 <잔디밭의 복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할머니는 미국의 과거라는 풍랑 속에서 등대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워싱턴 주의 조그만 마을에 사는 밀주업자였다.”
ㅡAgalma
(그의 생애 中)
1935년 미국 워싱턴 주 터코마에서 태어나 오리건 주 유진에서 자랐다. 가난했던 그는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 배불리 먹어보려고 경찰서 유리창에 돌을 던졌으나 경찰은 그를 오리건 정신병원으로 보내 전기충격을 받게 했다.
1984년, 브라우티건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49세 나이에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 행방을 찾기 위해 출판사에서 고용한 사립탐정에 의해 발견되어 정확한 사망날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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