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 -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 말씀, 365일 묵상집
유진 피터슨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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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14개월 정도된 아기가 있다. 가끔 내가 아이를 안고 지하철을 탈 때가 있는데 아이를 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자리를 가장 먼저 비켜주는 사람은 '아줌마'들이다. 아주머님들이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이유는 아마도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어려움을 직접 겪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한가 알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그렇다면 느껴보셨을까 ? 누구나가 15kg되는 아이를 안고 다니면 힘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봤을 때 누구나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지는 않는다.


나의 이런 질문에 답 그 자체가 되어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30년 동안 목수로서 장남으로서 또한 로마 치하의 피지배자로서 삶을 살아낸 그 분은 누구보다도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바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앙은 일상 생활과 분리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을 씻겨주면서, 장삿꾼들의 리어카를 뒤집으면서, 떠들면서 다가오는 아이들을 안으면서 그는 우리를 가르치고 격려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소재를 원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말은 지극히 옳다. Live... a life Jesus will be proud of:bountiful in fruits from the soul, making Jesus Christ attractive to all, getting everyone involved in the glory and praise of God. 그가 직접 번역한 Message 성경 빌립보서 1장 11절의 말씀도 나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워할 삶을 살아라... 어려울수도 쉬울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사람이 아니라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워할 사람이 기준이다.


삶에 조바심을 내기 쉬운 이유는 내가 어떤 것을 이루고 해내야만 성공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기도는 끊임없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요구 사항의 나열이 되어버리기 쉽다. 나는 유진 피터슨의 묵상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신 일을 깨닫는 것이다."  기도가 좀 더 '나'를 벗어나야함을 느낀다. 하나님이 성공자라면, 하나님이 승리자라면 그의 자녀들이 실패한 패배자일 수 없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기도로 나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는 없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 흔들린다. 한번의 영적 충전으로 1년 정도는 잘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느끼기에 영적인 에너지는 이틀도 안 되어 금방 소진되어 버린다. 아무리 멋진 수련회와 기가 막힌 부흥회를 경험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마치 매일 매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몸처럼 영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천국까지 날아올랐다하더라도 밤이 되면 어두운 땅에 불시착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비행기의 고도와 수평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작은 조종면이다. 비행기는 쉴새없는 바람의 교란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작은 조종면을 끊임없이 움직인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 대단한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세한 방향 조정이 필요하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이 작은 책을 통한 짧은 묵상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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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독교 사도행전 강해설교 6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상윤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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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니체의 선언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있다면 자녀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허다하며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해치고 죽이는 사건이 빈번한 이 곳을 세상의 창조자가 그냥 참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차라리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세상은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간에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무신론자라면 "신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외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청문회의 답변자로서 그를 만나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성경이나 여러 글들에서 신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신을 만난 순간 반갑게 나와서 "Nice to meet you!"를 외치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놀라고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거나 서둘러서 숨기도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왕팬'이다. 한동안 그가 지은 모든 책을 사들여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가 지은 새 책이 나오는 것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번역본이 안 나와있는 요한 복음 강해서 중 한 권은 원서를 사서 읽어본 적도 있다. 정신적, 영적 암흑기에 그의 설교는 늘 내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태풍이 걷히고 나타난 새벽의 북극성과 같이 내게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그토록 좋아하고 기다리던 책이었건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처럼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무엇이 나를 부끄럽고 불안하게 했는가? 편안하게 책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세 번째 강해서인 '승리하는 기독교'는 초대 교회의 모습과 그 당시 크리스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초대 교회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해질 정도이다. 그러나, 2000년 전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현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는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이드 존스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와 내 삶은 달랐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모습과 내 모습은 달랐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현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바람직한 크리스천의 모습이라면 나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책이 설교가 아닌 논증적인 글이었다면 나는 자신있게 저자의 글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아, 이거는 말이죠."라고 내가 그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으로 신나게 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설교이고 이론이 아닌 2000년 전의 교인들의 실제 모습이며 그들을 이끌었던 것은 지성도 논리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고귀했고 그들의 희생은 용감했으며 지성을 뛰어넘는 지혜와 능력이 그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아무도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때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죽음도 기독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는 없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단지 복음의 능력의 확장과 그에 대한 핍박뿐만 아니라 궁극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보장까지 나의 시야의 경계를 넓혀 주었다. 


밝아진 눈으로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분명히 나는 부끄럽게도 크리스천의 본연의 모습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기독교와 세상간의 간격을 지성으로 메우려고 노력했다. 물론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버리고, 꼭 갖고 있어야 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역시나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기독교는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자 융은 인간 지각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 지각의 확장을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아무리 좋은 망원경이라도 우주의 끝을 볼 수 없고 ‘쿼크’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소립자라는 것도 추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융은 인간은 궁극적인 진리를 알 수 없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진리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 가야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적으로, 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 알고 즐거워했지만 그 믿음대로 살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마치 사랑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시인이 실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는 지적인 유희만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이성과 논리 이상이라는 것, '매트릭스'보다 '반지의 제왕'보다 더 황당하고 설명 불가능한 하나님과 그의 이야기를 이해시켜보겠다고 까불며 본연의 모습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를 로이드 존스가 흔들어 깨워주었다.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고 그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과의 접점을 찾겠다고 오락으로, 쇼로, 문화 행사로 진리를 웃기는 포장지로 포장해 사람들에게 접근해보려는 많은 교회들에게 로이드 존스는 현재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해줄 것이다. 세상과 접점을 찾으며 스스로 그 간격을 메우려 하는 교만함, 세상과 똑같아져서 더 이상 어떤 매력도 없어져 버린 무능력함, 하나의 문화 단체이자 또 다른 집단 이기주의 공동체로 비쳐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 그의 설교는 쉽고 명료하다. 예화도 거의 없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이기도 하다. 그는 설교란 불붙은 논리(Logic on Fire)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그 느낌이 든다. 그의 '불덩어리 논리'가 내 안을 휘젓고 다녀서 나는 결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짓된 자아와 지성 뒤에 숨어서 멋진 척하려는 나의 모습이 참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날 괴롭혔다. 진리의 편에 있기보다는 인기있는 사람이 되려는 욕심으로 눈이 멀어 허둥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나는 가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그 질문을 했다. 하나님의 편이 좋다고 장황하게 떠드는 변호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등 뒤에 숨는 작은 아이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방향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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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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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가 말한 인생에 대한 충고 10가지 중 첫번째가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인생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면 사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고 공평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보상을 요구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인생이 너무 복잡해지고 더 괴로워질 것이다. 왜 성경에 나오는 비유에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분명 처음 분배는 공평하지 않았다. 세상도 그와 비슷하다. 인생이 100미터 달리기라고 한다면 90미터 지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출발점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앞서 나가려는 욕심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있다. 사람들은 소위 잘 나가는 직업, 즉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을 선호한다. 또는 일류대를 나와서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 치열한 경쟁이 싫은 사람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업무 강도가 낮은 교사나 공무원 등의 직장을 노린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직장이나 직업이라는 것이 너무 뻔해서 경쟁률은 치솟기만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굉장히 똑똑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편안한 삶이고 성공적인 삶인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바람에 밀려다니는 낙엽같은 삶을 살고 있다. '미쳐야 미친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이런 삶의 경향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현대인의 기준에서 조선 지식인들의 모습은 특이하다.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이나 돈이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때로는 현실이 이들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들의 모습에는 흔들림이라는 것이 없다. 바람이 심하면 흔들리기도 하고 못 이기는 척 밀려가는 것이 보통이건만 이들은 바람을 따라 돛을 펼치지 않는다. 뭔가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간 관계나 일상 생활에서의 모습도 남다르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내용이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광인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의 일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불광불급'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을 저자가 두 불(不)자를 빼고 정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명제가 참이면 명제의 대우가 참이기 때문에 '미친(及) 사람들은 미친(狂) 것이다'가 참인 명제일 것이다. 제목에 시비를 걸겠다는 것은 아니고, 미쳤지만(狂) 미치지(及) 못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 뿐이다. 미치기는(及)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조급함이 없는 여유로운 마음을 전달해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한 기운도 느껴지게 했다. 그 쓸쓸하고 서늘한 느낌은 '광기의 역사'에서 미셸 푸꼬가 지적한 대로 광인들이 권력의 영향 아래 탄압받는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안타까운 모습이 많았지만 나는 이들이 '진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무엇이 미친 것이고 무엇이 미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사실 나는 조선 지식인들이 미친 것인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겼던 이들이 미친 것인지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 직업을 택하고 삶의 결정을 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헌신없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정치가, 법의 따뜻함과 그 안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을 울리고 협박하고 죽이는데 법이라는 칼을 사용하는 판사와 변호사,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없이 생명을 담보로 더러운 돈벌이를 하는 의사, 단지 안정된 직장을 찾아 자신의 편의를 시민의 편의보다 우선시하는 공무원, 교육에 대한 열의없이 20년, 30년 전의 교과서에 벗어나지 못한 죽은 지식으로 아이들의 머릿속을 채우는 교사, 이런 사람들이 정상인가? 그렇다면 나라를 위해 일신을 바치는 정치가, 슈바이처같은 의사, 가난한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사, 청렴결백한 공무원, 밤새 연구하며 노력하는 교사가 미친 것이란 말인가? 후자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끄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슬픈 현실'이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세상, 그래서 정상이 오히려 주목을 끄는 세상, 과연 누가 정말 미친 것인가?

파스칼은 이와 같이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미쳐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살기 어렵다. 고통도 많고 힘든 일도 많고 슬프고 괴로운 일도 많다. 살아있기 때문에 견디고 참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파스칼의 말이 일리가 있다.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왕 미칠 것이라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미쳐야(狂) 미치지만(及) 잘못된 것에 미치면(狂) 잘못된 곳에 미친다(及). 우리 모두 뭔가에 미쳐 있고 그리고 그 미침(狂)에 의해 최종 목적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목적지라도 미치게(及) 될 것이다. 이 책의 조선 지식인들처럼 멋지게 미쳐야(狂) 한다. 이들의 멋은 바로 미침(狂) 그 자체에 있다. 이들은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 않았다(狂). 단지 그 미침(狂) 안에서 즐거워했을 뿐이다. 미침(狂)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각자의 독특한 '미침((狂)'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걸을 때는 걷고 먹을 때는 먹어라.' 요새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되뇌는 말이다. 인생이란 목표지점에 가서 딱 꽂히는 것으로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목표지점으로 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미쳐있지(狂) 않으면 대부분의 인생은 의미없는 시간이 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狂) 말고 미치기(狂) 위해 미치자(狂).” 인생을 값지고 의미있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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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 증보판
제럴드 L. 싯처 지음, 윤종석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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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 동산에서 모두들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선악과 때문이었으니까.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그 후손인 인류 전체에게도 핵폭탄보다 위험스러운 '재수없는 선악과'가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을 창조하고 다시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미끼였던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을 만들지 말던지...... 선악과의 존재는 성경의 처음부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선악과를 좋아할 수 없다. 물론, 나도 선악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정성 들여 그린 예술 작품을 짓밟아버리는 괴팍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분명 선악과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학자들과 여러 서적들의 도움을 받아 고민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자유 의지'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좋아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에게 선악과는 꼭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했고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뜻밖의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선악과를 파헤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분명 머리로는 선악과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의도가 선하다고 여겼지만, 행동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다. 선악과는 옳았지만 나는 그 선악과를 없애기 위해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에덴 동산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만 없으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선택을 말살시켜버리려 했다. 자유와 선택은 내게 불안의 요소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미래와 인생을 내 손아귀에 쥐려는 욕심이 더러운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본다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미리 결정해놓지 않으셨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와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직업 선택의 문제, 배우자의 문제, 이사의 문제 등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사람과 어디서 살 것인지에 대해 결정 내린 바가 없으시다. 즉, 미래에 우리가 꼭 그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발자국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과 살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대표적인 문제인 '비전 찾기' 역시 우리 삶의 여정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실험하고 시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주신 비전, 혹은 소명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이자 예술이지 하나님의 깜짝 선물 혹은 비밀 임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은 없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현재 지향적이다.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겠지만, 이 책은 '현재의 순간'에 '거룩함'의 옷을 입혔다. 바로 현재가 '거룩한 지금'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시간이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할 순간이다. 과거도 미래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바깥의 일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를 어쩔 수 없으니까 내팽개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실 것이고, 미래 또한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순간’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만큼의 지혜가 있으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이미 알고 있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해피 엔딩’이라는 마스터플랜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한다. 자유와 선택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진실인 '역설'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복잡한 인생이나 영적이고 신비한 영역이 아닌 아주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역설의 진리'가 드러나는 원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묘한 일치감에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통계적으로 그 분포는 항상 일정하다는 물리학의 법칙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관계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인간 개개인은 그의 의지에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을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안에 그 자유와 선택의 결과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만 완전히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이 좋다. 완전히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나에게 격려와 안정감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 아름다운 나라는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경계가 한없이 넓어짐을 느꼈다. 나는 위험스러운 결정과 바보 같은 선택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로 전력 질주할 수도 있다. 어느 날 진흙탕 속에서 뒹굴 수도 있고 벼랑 끝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악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끝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반전'이 분명히 있다.


나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는다. 때로는 성경이 나의 인격 수양과 정신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더럽고 추접스럽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이야기,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노아가 술마시고 벌거벗고 다닌 이야기, 요셉이 으스대며 형들에게 자신을 뽐내다가 노예로 팔려가는 이야기, 이집트의 왕자 모세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이 함정에 빠져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뽑히는 이야기,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의 간음과 그 죄를 덥기 위한 더러운 살인 음모 이야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욕하면서 그를 부인하는 이야기, 율법과 구약 성경에 정통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야기, 성경은 ‘성경(聖經)’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약점이 많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聖經)’으로 불리는 것은 그 모든 잘못된 선택과 후회스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졌다. 나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의 영역에 의해서 결코 침범 당해서는 안 될 거룩한 곳이다. 바로 지금 이곳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과 공간이다. '현재'는 단지 내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거룩한 곳이며 신비가 존재하는 경이로운 곳이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천천히 살아갈 때에 심리학자 융이 말한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나 혹은 '하나님의 음성'에 좀 더 민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지금'을 주시하지 않아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나는 '요셉의 꿈'을 꾸고서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솔로몬처럼 '무엇을 원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처럼 마게도냐인의 손짓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베드로처럼 보자기에 가증한 음식이 공중에서 왔다갔다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하고 집중할 때 일상이 기적처럼 내게 말을 걸고 나는 그 순간순간을 경이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라는 신비의 바다에 뛰어들려고 한다. 그리고 편하게 나의 몸을 맡기려고 한다. 천천히 손을 내밀고 발을 굴러 헤엄쳐 나갈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것이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 것이다. 엉뚱한 곳으로 가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해류를 타고 하나님께서 계획해놓으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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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 2006-11-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다 보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담아갑니다.
 
생각의 법칙 10+1
존 맥스웰 지음, 조영희 옮김 / 청림출판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동화같은 사랑을 하고 싶지만 주위에는 멋진 사람이 없고, 시험을 잘 보고 싶지만 출제자와 나의 생각은 너무 다르며, 인생 역전을 하고 싶지만 로또 숫자는 3개 맞추기도 힘들다.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데 밤늦게까지 해야할 일이 너무 많고, 다이어트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아서 뱃살은 해가 갈수록 늘어간다. 물론, 내가 생각한대로 뭐든지 이루어진다면 그것 또한 겁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인생살이가 어디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있던가?


'인생은 어렵고 복잡하거든... 생각만큼 쉽지 않지. '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내가 속아왔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을 확고히 하는지도 모르겠다. 동화속에는 왕자님, 공주님이 대부분이다. 나중에는 개구리도 왕자가 되고 야수도 미남왕자님으로 변한다. 드라마에는 왜이렇게 회장 아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부모없는 고아였다가도 나중에 알고보니 회장 손자인 경우가 아주 흔하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총알을 맞아도 안 죽고 유연한 허리를 이용해 멋지게 피하기도 한다. 그런 동화와 영화와 TV를 보면서 혼자서 즐겁게 상상하다가 부딪치는 현실은 갑갑하고 차갑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얻은 현장 지식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에 이 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 이 책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일단, '그렇지 않다' 혹은 '그러기 어렵다'로 책에 접근했다. 저자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례를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예화의 대사 한 마디를 들자면.


"리처드, 자네는 황소를 타기 전에 (그의 머리를 가리키며) '황소'를 타야 해"


머리로, 생각으로 황소를 타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일까? 황소를 타기 전에 먼저 충분히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할까? 연상 작용을 통해 황소를 타고 난 후에 진짜 황소를 탄다면 훨씬 잘 할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것은 '황소타기'는 생각보다는 기술이나 연습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황소타기 챔피언은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도를 받은 제자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었다.


나는 생각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방법을 다룬 부분이 70%정도이고 생각의 가치를 다룬 부분이 30%정도이다. 그러나, 책 제목과는 다르게 내게 영향을 준 부분은 바로 '생각의 가치'를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생각이 바뀌면 믿음이 바뀌고, 믿음은 기대를, 기대는 태도를, 태도는 행동을, 행동은 실력을, 실력은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단연코 그 마지막 인생의 성공이라는 결과물은 생각이라는 도화선을 통해 점화하기 시작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고민해보았다.


고민한 결과, 나는 생각에 대한 두 가지 개선점을 찾았다. 첫째, 최악의 상황과 그 다음 상황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생각은 성공과 기쁨에서 멈춘다. '아, 좋은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능력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은 생각은 늘 여기에서 멈춘다. 대학에 떨어지는 경우, 백수 생활을 오래하는 경우, 말도 안 듣고 능력없는 사람들과 일하는 경우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다음 상황은 더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허둥대고 순간을 무마하려는데 급급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쓴 'Failing Forward'라는 책이 있는데,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제목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실패는 분명히 있을 것인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까지 미리 생각을 해 두면, 넘어졌을 때 좀 쪽팔리기야 하겠지만 그 다음 과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황소타기 챔피언의 제자도 황소에서 떨어지고 다시 타는 것까지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넘어지는 것 자체도 분명 앞으로(Forward) 가는 과정인 것이다. 대개 인생의 목표나 목적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향만 제대로 잡고 있으면 목표지점에 최소한 가까이는 갈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나는 생각을 충분히 해서 생각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 실패는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패의 쓴 잔은 음미할수록 더 그 맛이 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로 위로를 해보지만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서 포기하게 될 때도 많다. 그런데 분명 포기는 생각으로 먼저 한다. '에이... 거봐.. 안 되잖아.' 이렇게 먼저 생각으로 포기를 한다. 내게 행동의 끈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의 끈기가 많이 부족했음을 느꼈다. 생각의 힘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쉽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버리고 장애물 앞에서 뒤돌아서버렸던 것이다. 생각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 힘이 있다면 다시금 도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취미란에 '생각하기'라고 적을까한다. 그 만큼 좋은 생각의 가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책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생각으로 꿈을 이루고 현실을 이겨낸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격려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결국은 생각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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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1-17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미란에 '생각하기'라. 호오 이런 책도 있었군요. 그러고보니 이제서야 이 리뷰를 읽어보네요. 부끄러운 마음으로 추천!

stella.K 2004-11-17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리뷰 당첨 되셨네요. 며칠 전 의겸 돌이고 한데 떡 좀 돌리시죠.^^

stella.K 2004-11-1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찬찬히 읽어 보니 정말 잘 쓰셨네요. 사실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읽는 편이 아니죠. 도전은 되는데 워낙 책에 대한 관심이 한쪽으로 쏠려있다 보니 이쪽 방면으로는 눈이 잘 가지 않더라구요.

전 그다지 생각의 힘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게 그렇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기 보단 회의적인 게 더 많아서. 근데 직감이나 예감엔 또 적중률이 좀 있지요. 그것과 이건 좀 다르긴 한 것 같습니다. ㅋㅋ.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엔 동의는 합니다. 이 책 한번 읽어 보고 싶군요. 그러기 전에 제가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그 생각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지 또는 부정적인지 평가를 내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추천하고 퍼가요.

목적성과 상관없이 좋아서 이러는 거라구요.^^

설박사 2004-11-1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스텔라님, 검은비님, 물만두님... 감사합니다.

역시 늘 관심 갖어주시는 분들이 참여를 해주시는군요... ^^

저는 아무도 참여안해주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ㅋㅋㅋ

용박사 2004-11-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축하드립니다....^^;

맑은물 2004-11-1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미란에 '공상하기'라고 적었던 옛 시절이 기억납니다. 위대한 생각은 위인을 만든다고 믿습니다...좋은 생각 많이 하셔서 좋은 사람 되시고, 꿈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물만두 2004-11-1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했습니다. 코멘트는 제가 딴곳에다 썼나보군요. 음... 잘쓰셨습니다. 읽어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