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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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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바람이 왜 날 시원하게 하는 거야? 네 살 된 우리 아들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까?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 바람이 널 사랑하니까. 대답하고 보니 정말 바람이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나의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강하게 나를 끌어 안을 때도 있다. 가끔은 쉴새없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이처럼 바람은 내게 지나치게 적극적이다. 이 정도면 바람이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바람과 하나님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점(?)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서 바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뿐만이 아니라 숨, 영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바람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바람을 생각하면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달려 나간다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서 바람의 근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대와 하버드를 졸업한 몽골의 선교사 이용규, 어쩐지 그의 과거와 현재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자신의 이력서는 더 좋은 현재의 상황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과거를 책제목처럼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학위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몽골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려놓은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과 재정, 생명과 안전, 경험과 지식, 죄와 판단, 명예와 사역까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어야 할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내려놓음은 몽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이익을 주는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철저한 손해이자 희생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용규 선교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많은 분들이 내가 좋은 학력에서 불구하고 몽골을 가기로 결정한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하신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내려놓은 만큼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였다.

 

그가 내게 도전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과 몽골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내게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또한 그의 삶은 단지 착한 사람으로서의 살아가는 것 이상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윤리적 방향이 필요한 것은 우리는 이 세상의 구조적 모순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체제를 따라서 체제에 충실히 적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정말 잘 살 수 있는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 현사회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체제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100여년 전에 칼 맑스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게 되어 있고 자본가들은 계속 자신의 자본을 바탕으로 상위 계층에 남아 있게 된다. 이 심각한 모순을 막기 위한 맑스의 방법은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였지만 결국 맑스의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성공적인 현실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선하고 올바른 체제라고 검증받은 것은 아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현실에 적용하기에 적합한 모델일 뿐, 인간 소외 특별히 가난한 자의 소외라는 심각한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누가 과연 이 모순을 깰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도덕 법규를 잘 지키는 것이나 친절한 이웃이 된다거나 불쌍한 몇몇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주는 정도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현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뒤흔들만한 적극적인 삶의 방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천국 노마드-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이용규 선교사야말로 현시대의 필요한 윤리적 인간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가히 종말론적이라고 할 만큼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초대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요구하는 사회체제의 강요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명 붕괴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사회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이용규 선교사의 삶을 단지 선한 삶이라고 하기에는 그 표현이 부족한 것 같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의 일부를 통해 윤리적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진 모든 것, 그의 재정, 시간, 경험, 심지어 그의 생명까지 모두 이용해서 그가 추구하는 삶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선하고 윤리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삶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된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이용규 선교사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는 용규 선교사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참 부럽기도 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바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용감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깝고 강하게 경험하고 있다. 당연히 그러한 근접 체험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때의 느끼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줄 것이다. 삶 속에서 즐거워하고 행복을 느끼는 이용규 선교사의 삶은 그의 실천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어떤 이의 삶의 모습이 아무리 경건하고 존경할만하다고 해도 그 삶 자체가 그를 힘들고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의 진심은 의심받아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용규 선교사의 일기와 그의 삶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나에게 그러한 의심의 공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바람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 힘든 일이겠고 또한 나의 전 존재의 헌신이 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내가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라면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로 지금이 삶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잡고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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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내 영혼을 새롭게 빚어가는
수 몽크 키드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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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한참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오락실에 다녔던 적이 있다. 그 때 우리가 열심히 한 오락 중에 "원탁의 기사"라는 것이 있었다. 제목을 보면 예측할 수 있듯이 원탁의 기사의 여러 주인공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적들을 물리치는 그런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적들을 계속 물리치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게 되고 일정한 경험치가 쌓이면 "Level Up!"이라는 표시와 함께 파워도 올라가고 무기도 좀 더 험악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 게임은 "Level Up"의 재미가 솔솔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레벨업이 재밌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게임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고 어려운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인간이 완전히 레벨업된 상태에서 태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인간은 덜 창조된 듯한 상태로 지구에 떨어진 것 같다.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내가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진화에 대한 믿음이다. 즉, 지금은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나마 지금의 모습은 몇 만년 전 인간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과도기적인 현실이고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의 진화가 더 완벽해지는 날에는 지금의 불완전한 모습들이 극복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설명 중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훼손되었고 인간의 고귀한 완전성이 붕괴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원래 모습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이런 고민에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 왜 우리가 이런 레벨업 게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키드는 단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기다림'이라는 주제는 성장을 위한 그녀가 제안하는 최고의 기술이다. 덕분에 기다림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기다림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묵상한 책을 만나본 적이 없다. 성장과 성공을 위한 수없는 행동 강령을 열거한 책은 많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다림에 대해서 이토록 훌륭한 책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키드가 기다림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번데기의 모습이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화려한 변신을 위한 대기실이다. 나는 번데기 속의 기다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의 질문의 요점을 바꾸었다. 왜 나비가 처음부터 나비로 태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어떻게 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말이다. 기다림으로 가능할까? 기다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다림이 꼭 있어야만 획기적인 발전이 가능한 걸까?


 나의 시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머물렀다. 기다림의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다시 생각해봤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기다렸고 그 기다림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했다.  예수는 30년간 목수의 아들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고, 그가 사역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면서도 성급하지 않았고 그의 때를 기다리며 매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십자가 상에서 그의 생명이 흐릿해지는 순간에도 그의 능력을 발휘해 곤경에서 빠져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덤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기다렸다. 이러한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가 부활할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려야 했고 그 순간들을 통해서 성장했다면 나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가 기다렸다면 나도 기다려야 하고 그것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불평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이 나를 불완전하게 이 땅에서 시작하게 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의 불완전함이 오직 죄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불완전한 시작은 죄가 없다고 알려진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사람이었고 고통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유혹을 받는 존재였다.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는 마치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공동 창조자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창조는 태어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더 나은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설가가 쓴 소설이 소설가에게 영감을 주고 화가가 그린 그림이 화가에게 다시 영감을 주고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가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글쎄 그런 분들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이 리뷰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격언을 하나 만들었다. "Boys! Be patient." 여기서 Boys는 성장하고 발전하기 원하며 애벌레에서 나비의 모습을 갖기를 원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인내심을 가지라,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라.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 혹은 그 이상을 이루는 것은 단지 야망을 갖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의 기다림의 정신이다. 책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내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인생살이의 놀라운 기술, 레벨업의 노하우를 전수해준 키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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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으로 사는 인생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 / IVP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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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내가 얼마 전 구역 예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아이를 비롯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지르고 장난치고 울고 아마 장난이 아니었나보다.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왜냐면 그렇다면 인생이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공부 못하고 병들고 사업실패하는 이유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공식이 성립된다. 성경 중에 욥기를 보면 그 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욥이라는 사람이 온갖 고생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욥기는 잠언, 전도서와 함께 지혜서로 분류되는데 욥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지혜 중 하나는 '인생은 블랙박스'라는 사실이다. 고통과 고난의 원인이 죄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부자가 된 것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많이 하면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성공하고 부자도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셨을까? '1+1=2'라는 진리처럼 확실한 원인과 결과가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라는 투르니에의 주장을 곰곰히 생각해봤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험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을 불확실하게 만드신 것일까? 투르니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모험이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학교 생활도 직장 생활도 모두 모험이다. 투르니에는 인생이 모험이라는 하나의 가정하에 인생을 생각하고, 또한 세상 사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꽤 그럴듯하고 괜찮아 보였다.


모험을 할 때 가지는 자세가 삶의 자세에 그대로 적용된다. 모험은 다소 맹목적이다. 모험은 목표가 있기는 하지만 모험의 가치는 그 과정에 있다.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지의 불확실성은 모험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필수 조건이다. 뻔한 모험을 모험이라 할 수 없다. 그런 모험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모험을 즐길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다.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이 "나는 이미 내 인생을 보았어요" - I saw  my whole  life as  if I'd  already lived  it... an  endless parade  of parties  and cotillions, yachts and polo matches... always the same narrow people, the same mindless chatter.- 라고 고백하며 불행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행복할 것 같은 미래를 예상하면서 불행해 할까? 투르니에는 모험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그 여주인공은 본능을 억압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나는 불안정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삶을 점차 안정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도전이 될 만한 일이나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행복한데 재미가 없다...' 책을 읽으며 삶을 좀 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 즐겁고 재밌게 살려면 모험을 즐기려는 인간의 본능에 좀 더 충실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가끔 아이랑 숨바꼭질을 한다. 숨어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나타나면 아이가 굉장히 좋아한다. "아빠, 왜 거기에 숨었어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냥 좋아한다. 아마도 하나님도 비슷한 것 같다. 인생을 불확실한 모험으로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이유없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깜짝 놀래켜 주고 웃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몰래 숨어 계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만한 장난꾸러기다. 사람이 태어나서 꼭 발견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세상을 모험을 사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을 때, 혹은 사고나 병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순간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인지하기 시작한다. 크리스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다시 숨으신다. 하나님은 각자가 자신만의 모험을 하기 원하신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더 자신만만하게 모험하는 인생이다. 아빠를 봤기 때문이다.


이 리뷰도 모험이다. 이 리뷰가 이 주의 리뷰로 당선이 될 지도 모르고, 추천수가  100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런 관심도 못받고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쭉 뒤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이미 그 사실을 안다면 리뷰를 쓰는 재미가 없다. 미래가 불확실해야 이 리뷰를 쓰는 그 자체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모험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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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5-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에 의하면 짧지만 지금까지의 제 인생은 예측불허의 모험이요, 파란만장하게 펼쳐진 희열이었군요^^; 어찌나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는지 어떻게 그 관문들을 통과했나 싶네요. 아직도 넘을 산과 건널 바다는 많겠죠? 투르니에 식으로 본다면 모험가득한 희열넘치는 삶? ^^;

아..그리고 구역예배의 그 전도사님, 아기엄마들에겐 상처가 되었겠네요. 아직 젊으신가봐요? 저도 예전엔 잠시 그런 이분적인 단순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어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믿음때문에 생활 모든 부분까지 확장시켰죠. 그 전도사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설박사님도 리뷰에서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은(믿음도) 어느 한 가지 잣대로 잴 수 없는,오묘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두 분이 사랑하는 의겸이를 위해 기도 안 하시는 분들이 아니시니 너그러운 맘으로 이해해 주시겠지요? ^^
그럼......우리 의겸이를 투르니에가 본다면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모험이 가득한 삶을 즐겁게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는건가요? ㅎㅎ

설박사 2005-05-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근나가려고 컴퓨터 껐는데, 오지 말라네요..^^ 그 사이에 어떻게 이리도 긴 글을..
아니..리뷰보다 더 멋지게 댓글을 쓰시면 어떡합니까? ^^

설리 2005-05-2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의 리뷰는 항상, 사람의 진실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책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할 계기를 만드는 독서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설박사 2005-05-2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은엄마님 감사합니다. ^^ 오랫동안 함께 계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 너무 고맙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어제는 저도 해피로긴해서 나은이 모습도 보고 몰래 올리신 사진도 보았습니다.. 한 마디 남길려 하다가 가족끼리 이야기하는데 끼어드는 것 같아 참았지요.. ^^
오늘 집에 가면 아까 가르쳐주신 것들을 한 번 테스트해보자고 은총알님한테 이야기해보려고요...ㅋ 좋은 결과 있으면 꼭 알려드리지요.. ^^
 
하나님과 함께 놀다 -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사는 인생
마이클 야코넬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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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놀자는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우리 모두 학교나 직장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지 않았던가. 공부도 일도 그 끝이 어디인지 발견한 사람이 없다. 또한 선생님들과 직장 상사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일을 해도 성적과 연봉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는 대학이, 대학 다닐 때는 직장이, 직장 다닐 때는 연봉이 주요 관심사다. 그렇다면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돈인가? 글쎄... 돈 자체는 아닐 것이다.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인 상태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안정과 여유... 그것이 아닐까 한다. 여튼 그러기 위해서는 피터지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압박은 일단 뒤로 하고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잠깐 여유를 갖기로 했다.  이 책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인생을 놀듯이 사는 법' 혹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생을 즐기는 법', 이 정도가 알맞을 것 같다.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약간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무책임하게 살아라! 사리분별과 책임과 조심성일랑 잊어버리고..." 이런 큰일날 말을 하다니... 나는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책임의 여신상을 세우자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다소 위험스러운 발상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더 명확하게 한다. 그는 일종의 법칙이나 제도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삶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제도나 법칙은 언제라도 상위 원리에 의해 깨어질 수있다. 그 삶의 원리란 '인생이란 위대한 경이에 찬 위험스럽고도 신비로운 모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 속으로 뛰어들라는 것이 저자의 권면이다.


저자는 인생이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고.."정말 잘 탔다..." ㅋㅋ 이런 초성만을 쓰는 글자를 쓰는 것은 국어 학자들이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저 초성 두 개가 이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마음 속으로 했던 말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재밌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존재들이 아닌가? 인생이란 보너스 같은 것이 아닐까?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여유있게 조금 더 오래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 잘 버텼다." 80년 동안 안 죽고 잘 버텼다고 말이다. 안정과 여유 속에서 잘 버티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노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인가? 글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놀듯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사는 것이 더 흐뭇하게 사는 모습인 것 같다. 미래의 안정과 여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말 많은 고민을 한다. 적성에 상관없이 의사, 교사, 공무원 같은 직업이 선호되는 이유는 이 불안정하고 위험한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즐기지 않고 단지 버티는 것은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갑자기 TV 드라마에 나왔던 한 할아버지의 이런 대사가 생각난다.


"나는 말이지. 손자들과 즐겁게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죽고 싶단다."

마이클 야코넬리... 오래간만에 재밌는 사람을 만났다. 정말 예측불허라서 아주 믿음직스럽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나는 이토록 삶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리고 이 책은 정말 쉽고 재미있게 잘 쓰여진 책이다. 맥스 루카도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도 꼭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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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ss 2005-09-1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한번 리뷰를 읽을 후로 자주 설박사님 글을 보러 옵니다. 80년 동안 잘버텼다에서 푸하하 웃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근데 평생 버티면서 사는 사람들이 훨신 많을것 같군요...

설박사 2005-09-1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뵙습니다. 반갑고..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 주세요.. ^^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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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가 말한 인생에 대한 충고 10가지 중 첫번째가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인생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면 사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고 공평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보상을 요구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인생이 너무 복잡해지고 더 괴로워질 것이다. 왜 성경에 나오는 비유에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분명 처음 분배는 공평하지 않았다. 세상도 그와 비슷하다. 인생이 100미터 달리기라고 한다면 90미터 지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출발점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앞서 나가려는 욕심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있다. 사람들은 소위 잘 나가는 직업, 즉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을 선호한다. 또는 일류대를 나와서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 치열한 경쟁이 싫은 사람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업무 강도가 낮은 교사나 공무원 등의 직장을 노린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직장이나 직업이라는 것이 너무 뻔해서 경쟁률은 치솟기만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굉장히 똑똑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편안한 삶이고 성공적인 삶인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바람에 밀려다니는 낙엽같은 삶을 살고 있다. '미쳐야 미친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이런 삶의 경향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현대인의 기준에서 조선 지식인들의 모습은 특이하다.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이나 돈이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때로는 현실이 이들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들의 모습에는 흔들림이라는 것이 없다. 바람이 심하면 흔들리기도 하고 못 이기는 척 밀려가는 것이 보통이건만 이들은 바람을 따라 돛을 펼치지 않는다. 뭔가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간 관계나 일상 생활에서의 모습도 남다르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내용이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광인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의 일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불광불급'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을 저자가 두 불(不)자를 빼고 정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명제가 참이면 명제의 대우가 참이기 때문에 '미친(及) 사람들은 미친(狂) 것이다'가 참인 명제일 것이다. 제목에 시비를 걸겠다는 것은 아니고, 미쳤지만(狂) 미치지(及) 못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 뿐이다. 미치기는(及)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조급함이 없는 여유로운 마음을 전달해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한 기운도 느껴지게 했다. 그 쓸쓸하고 서늘한 느낌은 '광기의 역사'에서 미셸 푸꼬가 지적한 대로 광인들이 권력의 영향 아래 탄압받는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안타까운 모습이 많았지만 나는 이들이 '진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무엇이 미친 것이고 무엇이 미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사실 나는 조선 지식인들이 미친 것인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겼던 이들이 미친 것인지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 직업을 택하고 삶의 결정을 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헌신없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정치가, 법의 따뜻함과 그 안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을 울리고 협박하고 죽이는데 법이라는 칼을 사용하는 판사와 변호사,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없이 생명을 담보로 더러운 돈벌이를 하는 의사, 단지 안정된 직장을 찾아 자신의 편의를 시민의 편의보다 우선시하는 공무원, 교육에 대한 열의없이 20년, 30년 전의 교과서에 벗어나지 못한 죽은 지식으로 아이들의 머릿속을 채우는 교사, 이런 사람들이 정상인가? 그렇다면 나라를 위해 일신을 바치는 정치가, 슈바이처같은 의사, 가난한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사, 청렴결백한 공무원, 밤새 연구하며 노력하는 교사가 미친 것이란 말인가? 후자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끄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슬픈 현실'이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세상, 그래서 정상이 오히려 주목을 끄는 세상, 과연 누가 정말 미친 것인가?

파스칼은 이와 같이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미쳐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살기 어렵다. 고통도 많고 힘든 일도 많고 슬프고 괴로운 일도 많다. 살아있기 때문에 견디고 참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파스칼의 말이 일리가 있다.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왕 미칠 것이라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미쳐야(狂) 미치지만(及) 잘못된 것에 미치면(狂) 잘못된 곳에 미친다(及). 우리 모두 뭔가에 미쳐 있고 그리고 그 미침(狂)에 의해 최종 목적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목적지라도 미치게(及) 될 것이다. 이 책의 조선 지식인들처럼 멋지게 미쳐야(狂) 한다. 이들의 멋은 바로 미침(狂) 그 자체에 있다. 이들은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 않았다(狂). 단지 그 미침(狂) 안에서 즐거워했을 뿐이다. 미침(狂)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각자의 독특한 '미침((狂)'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걸을 때는 걷고 먹을 때는 먹어라.' 요새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되뇌는 말이다. 인생이란 목표지점에 가서 딱 꽂히는 것으로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목표지점으로 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미쳐있지(狂) 않으면 대부분의 인생은 의미없는 시간이 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狂) 말고 미치기(狂) 위해 미치자(狂).” 인생을 값지고 의미있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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