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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독교 ㅣ 사도행전 강해설교 6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상윤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죽었다." 니체의 선언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있다면 자녀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허다하며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해치고 죽이는 사건이 빈번한 이 곳을 세상의 창조자가 그냥 참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차라리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세상은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간에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무신론자라면 "신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외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청문회의 답변자로서 그를 만나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성경이나 여러 글들에서 신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신을 만난 순간 반갑게 나와서 "Nice to meet you!"를 외치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놀라고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거나 서둘러서 숨기도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왕팬'이다. 한동안 그가 지은 모든 책을 사들여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가 지은 새 책이 나오는 것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번역본이 안 나와있는 요한 복음 강해서 중 한 권은 원서를 사서 읽어본 적도 있다. 정신적, 영적 암흑기에 그의 설교는 늘 내게 새로운 힘을 주었고 태풍이 걷히고 나타난 새벽의 북극성과 같이 내게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 그토록 좋아하고 기다리던 책이었건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처럼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무엇이 나를 부끄럽고 불안하게 했는가? 편안하게 책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세 번째 강해서인 '승리하는 기독교'는 초대 교회의 모습과 그 당시 크리스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초대 교회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해질 정도이다. 그러나, 2000년 전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현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는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로이드 존스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와 내 삶은 달랐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모습과 내 모습은 달랐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현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바람직한 크리스천의 모습이라면 나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책이 설교가 아닌 논증적인 글이었다면 나는 자신있게 저자의 글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아, 이거는 말이죠."라고 내가 그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으로 신나게 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설교이고 이론이 아닌 2000년 전의 교인들의 실제 모습이며 그들을 이끌었던 것은 지성도 논리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고귀했고 그들의 희생은 용감했으며 지성을 뛰어넘는 지혜와 능력이 그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아무도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때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죽음도 기독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는 없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단지 복음의 능력의 확장과 그에 대한 핍박뿐만 아니라 궁극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보장까지 나의 시야의 경계를 넓혀 주었다.
밝아진 눈으로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분명히 나는 부끄럽게도 크리스천의 본연의 모습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기독교와 세상간의 간격을 지성으로 메우려고 노력했다. 물론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버리고, 꼭 갖고 있어야 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역시나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기독교는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자 융은 인간 지각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 지각의 확장을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아무리 좋은 망원경이라도 우주의 끝을 볼 수 없고 ‘쿼크’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소립자라는 것도 추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융은 인간은 궁극적인 진리를 알 수 없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진리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 가야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적으로, 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 알고 즐거워했지만 그 믿음대로 살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마치 사랑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시인이 실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는 지적인 유희만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이성과 논리 이상이라는 것, '매트릭스'보다 '반지의 제왕'보다 더 황당하고 설명 불가능한 하나님과 그의 이야기를 이해시켜보겠다고 까불며 본연의 모습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를 로이드 존스가 흔들어 깨워주었다.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고 그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과의 접점을 찾겠다고 오락으로, 쇼로, 문화 행사로 진리를 웃기는 포장지로 포장해 사람들에게 접근해보려는 많은 교회들에게 로이드 존스는 현재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해줄 것이다. 세상과 접점을 찾으며 스스로 그 간격을 메우려 하는 교만함, 세상과 똑같아져서 더 이상 어떤 매력도 없어져 버린 무능력함, 하나의 문화 단체이자 또 다른 집단 이기주의 공동체로 비쳐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 그의 설교는 쉽고 명료하다. 예화도 거의 없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이기도 하다. 그는 설교란 불붙은 논리(Logic on Fire)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그 느낌이 든다. 그의 '불덩어리 논리'가 내 안을 휘젓고 다녀서 나는 결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짓된 자아와 지성 뒤에 숨어서 멋진 척하려는 나의 모습이 참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날 괴롭혔다. 진리의 편에 있기보다는 인기있는 사람이 되려는 욕심으로 눈이 멀어 허둥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나는 가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그 질문을 했다. 하나님의 편이 좋다고 장황하게 떠드는 변호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등 뒤에 숨는 작은 아이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방향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