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으로 사는 인생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 / IVP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에 아내가 얼마 전 구역 예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아이를 비롯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지르고 장난치고 울고 아마 장난이 아니었나보다.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왜냐면 그렇다면 인생이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공부 못하고 병들고 사업실패하는 이유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공식이 성립된다. 성경 중에 욥기를 보면 그 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욥이라는 사람이 온갖 고생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욥기는 잠언, 전도서와 함께 지혜서로 분류되는데 욥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지혜 중 하나는 '인생은 블랙박스'라는 사실이다. 고통과 고난의 원인이 죄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부자가 된 것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많이 하면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성공하고 부자도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셨을까? '1+1=2'라는 진리처럼 확실한 원인과 결과가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라는 투르니에의 주장을 곰곰히 생각해봤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험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을 불확실하게 만드신 것일까? 투르니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모험이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학교 생활도 직장 생활도 모두 모험이다. 투르니에는 인생이 모험이라는 하나의 가정하에 인생을 생각하고, 또한 세상 사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꽤 그럴듯하고 괜찮아 보였다.


모험을 할 때 가지는 자세가 삶의 자세에 그대로 적용된다. 모험은 다소 맹목적이다. 모험은 목표가 있기는 하지만 모험의 가치는 그 과정에 있다.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지의 불확실성은 모험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필수 조건이다. 뻔한 모험을 모험이라 할 수 없다. 그런 모험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모험을 즐길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다.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이 "나는 이미 내 인생을 보았어요" - I saw  my whole  life as  if I'd  already lived  it... an  endless parade  of parties  and cotillions, yachts and polo matches... always the same narrow people, the same mindless chatter.- 라고 고백하며 불행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행복할 것 같은 미래를 예상하면서 불행해 할까? 투르니에는 모험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그 여주인공은 본능을 억압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나는 불안정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삶을 점차 안정되게 만들어 가고 있다. 도전이 될 만한 일이나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행복한데 재미가 없다...' 책을 읽으며 삶을 좀 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을 즐길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 즐겁고 재밌게 살려면 모험을 즐기려는 인간의 본능에 좀 더 충실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가끔 아이랑 숨바꼭질을 한다. 숨어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나타나면 아이가 굉장히 좋아한다. "아빠, 왜 거기에 숨었어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냥 좋아한다. 아마도 하나님도 비슷한 것 같다. 인생을 불확실한 모험으로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이유없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깜짝 놀래켜 주고 웃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몰래 숨어 계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만한 장난꾸러기다. 사람이 태어나서 꼭 발견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세상을 모험을 사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을 때, 혹은 사고나 병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순간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인지하기 시작한다. 크리스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다시 숨으신다. 하나님은 각자가 자신만의 모험을 하기 원하신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더 자신만만하게 모험하는 인생이다. 아빠를 봤기 때문이다.


이 리뷰도 모험이다. 이 리뷰가 이 주의 리뷰로 당선이 될 지도 모르고, 추천수가  100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런 관심도 못받고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쭉 뒤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이미 그 사실을 안다면 리뷰를 쓰는 재미가 없다. 미래가 불확실해야 이 리뷰를 쓰는 그 자체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모험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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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5-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에 의하면 짧지만 지금까지의 제 인생은 예측불허의 모험이요, 파란만장하게 펼쳐진 희열이었군요^^; 어찌나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는지 어떻게 그 관문들을 통과했나 싶네요. 아직도 넘을 산과 건널 바다는 많겠죠? 투르니에 식으로 본다면 모험가득한 희열넘치는 삶? ^^;

아..그리고 구역예배의 그 전도사님, 아기엄마들에겐 상처가 되었겠네요. 아직 젊으신가봐요? 저도 예전엔 잠시 그런 이분적인 단순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어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믿음때문에 생활 모든 부분까지 확장시켰죠. 그 전도사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설박사님도 리뷰에서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은(믿음도) 어느 한 가지 잣대로 잴 수 없는,오묘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두 분이 사랑하는 의겸이를 위해 기도 안 하시는 분들이 아니시니 너그러운 맘으로 이해해 주시겠지요? ^^
그럼......우리 의겸이를 투르니에가 본다면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모험이 가득한 삶을 즐겁게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는건가요? ㅎㅎ

설박사 2005-05-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근나가려고 컴퓨터 껐는데, 오지 말라네요..^^ 그 사이에 어떻게 이리도 긴 글을..
아니..리뷰보다 더 멋지게 댓글을 쓰시면 어떡합니까? ^^

설리 2005-05-2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의 리뷰는 항상, 사람의 진실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책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할 계기를 만드는 독서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설박사 2005-05-2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은엄마님 감사합니다. ^^ 오랫동안 함께 계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 너무 고맙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어제는 저도 해피로긴해서 나은이 모습도 보고 몰래 올리신 사진도 보았습니다.. 한 마디 남길려 하다가 가족끼리 이야기하는데 끼어드는 것 같아 참았지요.. ^^
오늘 집에 가면 아까 가르쳐주신 것들을 한 번 테스트해보자고 은총알님한테 이야기해보려고요...ㅋ 좋은 결과 있으면 꼭 알려드리지요.. ^^
 
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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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4년 4월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p.131)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오소독시'를 볼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체스터턴은 그 동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 스스로 파괴한 이유를 말해주었고 개선을 원할 때 내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 가르쳐주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나는 이 한 구절만 기억했다. 이 책에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소독시'의 체스터턴은 C.S.루이스보다 치밀한 논증을 보여주고 필립 얀시보다 더 독자를 시원하게 해 주며, 스펄젼의 설교가 청중에게 심어주는 비유 이미지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낸다. 너무 보물이 많아서 나는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 나온 것 뿐이다. 그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하고 쳐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나는 체스터턴의 보물 창고에 다시 들어갔다. 아무래도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좀 더 크고 멋진 것을 들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나는 다시 한 번 체스터턴이 펼쳐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남기고 책을 덮었다. 체스터턴은 그림을 잘 못 그리더라도 모델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바꾸면 실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또한 초라한 모델로는 초라한 작품 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이 언급한 그 모델은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바로 가장 이상적인 정통 신앙을 의미한다.


비기독교인만이 교회에 실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실망을 더 많이 한다. 왜냐면 정말 교회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사랑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고 이상적인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온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알고는 더 멀찍이 교회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청년부 예배가 나가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없는 공동체, 결코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예배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다. 첫번째 '오소독시'를 읽었을 때 나는 내가 결코 사랑하려는 마음이나 의지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저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모델을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알았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델에게 돌릴 수 있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더를 꿈꾼다. 또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것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모두 힘든 일이다. 공동체는 늘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분쟁도 발생한다. 리더십에 대한 책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힘들다는 증거이다.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서 통제 불가능의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당분간 외식을 안하기로 했다. 아이가 식당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강제로 앉혀 놓으면 식당 가득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동체의 개선을 위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물론 여기까지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가 생각이 난다면 나는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나는 그 이유를 없애기로 했다. 그 이유가 없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꿈도 또한 어떤 모임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도 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고 박수해줄 사람은 없다.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실패가 필수적일 것이다. 절대로 모델을 바꾸는 어리석은 화가는 되지 않을 작정이다.


이 책은 체스터턴이 왜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첫번째 읽을 때도 두번째 읽을 때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생각했다. 체스터턴의 생각은 내 삶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기독교가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나를 알고 있다. 기독교는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에 놀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수없이 폐허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유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를 개선시키신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또한, 기독교는 삶을 이해하고 있다. 인생이 단순하지 않고 풀기 힘든 실타래처럼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정말 형편없지만 하나님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끝없이 넘어지지만 끝없이 일으키신다. 기준을 낮출 만도 한데 성경은 몇 천년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마 그 배움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약 마지막 날에 내가 이유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상을 품고 살았음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를 통해, '오소독시'를 통해 배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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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5-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소독시 안에 보석이 그렇게나 많으시다면 우와~저도 보관함에 넣을게요.^^

2005-05-1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박사 2005-05-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감사합니다. 진주님... 나중에 영어로 쓸까봐요.. 그냥..ㅋ
영어도 안되고 한국말도 안되고... 그래도 열심히 쓸 겁니다.. ^^

2005-05-18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린이와 그림책 - 그림책을 선택하는 바른 지혜 행복한 육아 15
마쯔이 다다시 / 샘터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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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아이는 이제 18개월이지만 엄마, 아빠 무릎위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텔레토비나 뽀로로, 베이비 아인슈타인, 도라도라 영어나라 등을 보면서 배운 것보다 동화책을 보면서 배운 것이 더 많다. 손을 흔들면서 안녕하는 것,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 꽃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는 것, 노크하는 법,  누군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표현하는 법, 청소하는 법 등등 많은 것을 엄마 아빠와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아이가 책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고민 중 하나는 '과연 어떤 책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하는가'였다.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베스트셀러를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은 아니었다. 베스트셀러가 꼭 좋은 책은 아니며 많이 팔리지 않은 책이라도 정말 좋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동화책 가운데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준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마쯔이 다다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 주었다.

이 책의 주장은 간단하다. 아이에게 어떤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즐거움을 위해서 책을 보게 하라는 것이다. 단지 그 책 속에 빠져들어서 그 안에서 그 세계를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즐길 수 있는 책이 아이에게 영원토록 좋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저자가 좋은 예로 든 몇 권의 책을 사 보았다.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읽어 주었다. 책의 대상 연령이 우리 아이 수준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반응은 별로였다. 그러나, 그 책들을 보며 또 저자의 주장을 곱씹으며 나는 몇 가지 유익을 누렸다.

먼저, 텍스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그림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동화책의 글을 읽어주고 있으면 우리 아이는 그림 한 구석에 숨겨져 있는 '꽃'을 찾는다. 어찌나 꽃을 잘 찾는지 주위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나도 이제는 그림 속에서 작은 꽃과 개와 고양이, 나비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글로 표현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그림을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아마 좀 더 연습하면 동화책의 그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예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식견도 생길 것 같다.

또한, 어린 아이들이 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단지 그림의 찬란한 색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림 자체를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로보트, 공룡, 인형 등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장난감을 죽어있는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들이 모두 천재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타고난 상상력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람이 다섯 살 이전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었다. 유아기의 기억은 의식이 아닌 잠재 의식 속에서 사람에게 평생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기억이 없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나는 요새 아이와 함께 동화를 읽는다. 우리 아이는 바닷속의 고래를 보고 감탄하고 새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곰을 피해 달아나는 가족을 보며 즐거워한다. 아마 우리 아이는 얼마나 자신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는지 기억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들을, 이 기억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를 닮은 한 작은 생명이 즐겁게 까르르 웃었던 그 웃음 소리를, 그 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5세 이전의 나의 모습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유아기의 암울한 경험이 평생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만 나는 누구라도 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유아기를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유아기를 기억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지 짐작해본다.

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약간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별로 좋은 아빠가 아니다.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지만 아이를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다지 없다. 그러니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약간은 억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같이 그림을 즐기고 상상하며 기억의 저편에 있는 나의 유아기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는 행복한 순간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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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05-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5세 이전의 나의 모습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이 말씀 참 좋은데요..^^


설박사 2005-05-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 추천까지... ㅡ.ㅜ 감동의 눈물...^^
Daydreamer님 감사합니다.

진주 2005-05-0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설박사님이라는 한 남자가 서서히 아버지가 되어가고 계신가 봐요^^
오늘 교회에서 제가 설박사님을 생각한 것 꿈에도 모르셨겠지요? ^^; 우리 교회에도 젊은 아빠들이 많은데요.......에...뒷 이야기는 제가 페이퍼로 올리려고 해요.^^
아무튼,설박사님은 이미 좋은 아빠이시고 앞으로 더 좋은 아빠가 되실 것 같아요^O^의겸아 네가 부럽다~~~~~(은총알님도 제가 무지 부러워한다고 전해 주세요)

설박사 2005-05-0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제 생각을 하셨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요새 주일날 교회가면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유아실은 볼륨을 훨씬 높여야 한다..'입니다. ^^;
 
시앵티아 (Science) - 과학에 불어넣는 철학적 상상력
최종덕 지음 / 당대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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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바람이 좋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세미한 소리를 내던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내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자기만의 파동을 만들고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그 파동을 내게 전달한다. 바람의 길을 알려주는 하얀 벚꽃잎은 눈을 감으면 더 찬란하게 빛이 난다. 나는 가끔 바람을 통해 세상을 듣고 느끼고 만진다.


바람을 좋아해서 나는 바람을 공부했다. 이론과 실험,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결정하는 지배 방정식을 알게 되었고 바람의 길을 예측하며 바람의 힘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너무 제한적이라서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일부분이었고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보통 무한한 가능성과 전지전능을 기대하는 과학은 생각보다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나는 과학의 원초적 모습에 접근을 시도했다.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아닌 철학과 통합되어 있던, 앎 자체를 추구했던 '시앵티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문제를 쉽게 만들어 주거나 정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시앵티아는 개별적 존재로서 해석하고 이해했던 존재들의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또한 과학과 결별했던 철학적 사유와 질문과 상상력 등을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불러들여 문제의 난이도와 복잡성을 한층 높게 만들었다. 시앵티아는 누구나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유 인력의 법칙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왜 물질은 서로 끌어당기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과학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온 질문이다. 그런 식으로 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앵티아의 역할은 그 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인식의 확장과 과학의 발전을 선도하려는데 있다.


내가 바람이 좋아서 바람을 공부하게 된 것처럼 과학은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과학으로 인해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벗는 듯 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는 것은 50년 전에는 신에게만 가능한 시선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곳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다. 또한, 과학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단위를 찾아 원자를 쪼개고 양성자와 중성자 안에 쿼크를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사실 아직도 인간은 세상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치 바다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옛날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은 대답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저 바다 너머를 상상하고 개척해갈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두려움의 문제이다. 그래서 과학의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를 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언어로는 표현조차 힘든 창조적 상상력의 나래가 필요하다. 지금은 바닷가에서 첨벙거리면서 놀고 있지만 나는 바다 저 너머를 꿈꾸게 되었다. 닿을 수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유는 그 너머도 또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제한해 좁은 세상으로 사는 것은 자유롭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카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현시대에 과학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학과의 경계가 무너진 과학은 아마도 그 매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며 그것은 모든 예술과 과학의 근원(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scienc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인간이 과학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그 정체를 밝히고 또한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세상을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경계의 영역을 넘는 순간은 이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재밌어지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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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내 영혼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종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대학교에 가서 내가 속았음을 알았다. 중고등학교 때 봤던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속의 대학생의 모습과 내 모습은 너무 달랐다. 대학생이란 책 두어 권을 옆구리에 끼고 축제를 즐기고 동아리 선후배와 산과 바다로 놀러 다니고 변화하는 계절을 즐기면서 자유롭고 여유만만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대학 생활하면 과제로 밤을 새며 침침한 독서실에서 뻐근한 목 근육을 풀어주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대학 가봐야 별거 아니라고 냉소적으로 말씀하시던 일부 선생님들의 말씀이 내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대학 뿐만이 아니다. 좋은 직장, 넓은 집과 멋진 자동차, 절대 권력, 열정적 사랑도 별 것 아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망가지고 불행해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되기를 원하지만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들은 그 이전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 뭘까?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목표도 없이 살아야 하는가? 뭔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다 헛된 것이란 말인가? 인생 자체가 헛된 것인가? 성경에는 인생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게 말한 성경 저자는 부와 지혜와 명예와 권력을 겸비한 솔로몬 왕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보니 인간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탄식한다.


그렇게 인생이 공허함을 느낄 때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기독교 서적이다.  그러나, 저자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적 답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허전함과 갈망에 대해 저자가 알고 있는 최고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목이 아쉽다. 제목이 기독교적인 색채를 띄어버리니까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이 못 읽을 것 같다.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며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눈에 띄면 좋으련만 '목마른 내 영혼'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분명 그들은, 이 책은 '기독교인이나'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현대인은 맹목적으로 신을 믿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다. 인간은 원자를 쪼개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체세포를 통해서 생명을 복제하는 첨단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수많은 철학 사상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자본주의를 통해 자원의 활용을 극대화시켰고 부를 재분배해서 모두가 같이 잘 살려는 정치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심리학으로 해부되고 있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적어도 신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려면 스스로가 알고 있는 현실과 느낌에 근본적인 모순이 되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다. 과학이나 철학, 정치, 심리학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않은가? 그것들이 우리의 허한 공간을 채워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경제적 여유를 누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공허함을 느끼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의 말로 이 책을 시작한다.


"사람은 배가 불러야 무언가 진지한 주제로 생각을 돌린다."


배가 부를 때 목적을 성취했을 때 정상에 올랐을 때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더 큰 빈방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왜 인간의 내부에 이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가? 그 곳은 바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 스스로가 거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다. 저자가 이렇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스스로가 그 공간을 인식했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대답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공감하겠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헛소리로 생각할 많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도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고 다른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그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런 책들을 통해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 진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다.


이 책의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은 꿈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꿈이 되어야만 하고 또 꿈이 될 것이다 (노발리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나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혹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인/생/이/ 꿈/이/ 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인생은 제 1의 현실에서 제 2의 현실로 밀려난다. 마치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아주 마음이 편안해진다. 꿈에서 설사 내가 죽더라도 나는 실제로는 죽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결코 죽고 나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시점부터 시작한다. 아마도 그 시작의 순간은 바로 인생이 편안하고 행복한 꿈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요새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책 안에 인용된 C.S.루이스의 은의자(The Silver Chair)의 한 부분(p.123)과 비슷함을 느꼈다. 기독교가 거짓이고 인간은 우연히 발생했거나 혹은 생존기계로서 유전자에게 반항하는 존재이거나 전생에는 개나 돼지였다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이거나 혹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 세계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그런 세상과 그런 인간이 진실이라고 가정하자.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세상과 인생은 '의미없는 쓰레기'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셔서 아주 의도적으로 그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존재이고 한 생명의 값어치는 온 우주 전체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의 죽음으로 나를 구해내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과 '나'라는 존재는 그렇다. C.S.루이스의 '은의자'의 주인공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짜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지지할 것이고 그 이야기 편이다. 기독교가 나에게 가르쳐 준 현실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의 공간과 그 중심에 있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을 행복한 꿈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죽고 나서는 어떻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처럼 내 안의 빈 공간을 인식하였고, 하나님을 통해 그 공간을 채울 수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때때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이 가득찬 곳이지만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하나님과 나와 이웃들의 러브 스토리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절망스러운 내 모습을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게 하였다. 솔직히 나는 죽고 나서 영원히 멋진 곳에서 살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 마치 20년 후에 멋진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 그 전에 거지같이 살아야 하는 것과 지금부터 계속 적당한 주택에서 사는 것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20년 후에 내가 살아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 전에 거지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즉, 현재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의심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한 영생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진행형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내 삶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쓰여진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공허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는 이 책을 읽고 허무함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혹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부끄럽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차갑고 너저분하고 우스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인생이 달콤하고 행복한 꿈이 되는 순간'을 맛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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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4-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좋은 리뷰네요^^

설박사 2005-04-1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제 리뷰에 댓글 달리는 것이 참 드문 일이라서...
저는 댓글에 늘 감동을 먹습니다. ^^

로드무비 2005-04-1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 저도 잘 읽고 갑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전 M. 스코트펙 박사의 책을 몇 권 읽었어요.)

책속에 책 2005-04-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 추천만 하고 가려다 위댓글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저는 비기독교인이에요..어쩌면 갈림길에 서있는. 그래서 님의 리뷰가 제겐 참 시기적절하네요.

설박사 2005-04-1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또 한 번 감동의 물결이 흐르네요. ^^

설박사 2005-04-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mer님... 반갑습니다. 갈림길에 계시다면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시겠네요. 분명히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좋은 선택 내리시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을 내리시게 되면 제게도 꼭 알려주세요. 저도 기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