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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김영봉 지음 / IVP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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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기도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주기도문이 기독교인이 있는 최고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매우 평가절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주기도문을 적어도 일주일에 번은 한다. 일주일에 번만 하더라도 80 동안 교회를 다니면 4,000 같은 기도를 하게 된다. 같은 기도를 4,000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주기도문은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사귐의 기도 유명한 김영봉 목사님이 주기도에 대해 구절 구절 설명한 책이다. 신약학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인 저자의 설명은 깊이도 있고 보통 사람이 쉽게 알아들을 있도록 설명되어 있다. 주기도문은 문장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주기도문을 설명한 책은 200쪽이 거뜬히 넘어 간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주기도문 자체가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하지만 보통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에 설명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학자가 글은 이렇게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기만 하고 자신의 주장이 무엇인지 논지를 흐리는 경우가 많고, 목회자가 글은 균형이 맞아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균형도 잡혀 있고 논지도 뚜렷한 편이다.


책의 독특한 가지는 주기도문이 기도하는 사람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같은 기도가 다른 의미를 가질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달라는 기도는 기독교인이 때와 비기독교인이 때가 의미가 다르고 기독교인도 전도자의 입장에서 때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비슷하게, 한국 교인이 하는 주기도문과 미국 교인이 하는 주기도문은 의미가 다를 있다. 이런 점에서 외국 사람이 설명하는 주기도문 서적보다는 책이 우리에게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훨씬 정확하게 설명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주기도문을 설명하는 권만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물어보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면 책은 후보에 올라가야 하는 중에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7. 땅에서 하늘처럼 산다에서 믿음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일화였다. 테레사 수녀가 말이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것입니다.” (p.135)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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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
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지음, 이종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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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주기도문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주기도문을 잘 모른다. 그리고 오해하는 부분도 많다. 이 책이 주기도문에 대한 좋은 책인 이유 몇 가지를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저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신학자가 썼다. 은퇴하기는 했지만 현재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랑 공저이기는 한데 자기 이름이 들어갔으니 하우어워스의 생각과 연구 내용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신뢰도에서 일단 점수를 주고 싶다. 생각해보니 유명한 신학자들은 이런 글을 잘 쓰지는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2. 간단한 편이다

목사님들이 쓴 주기도문 책들은 설명이 긴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예화나 경험들이 들어 있어서 설명이 장황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꽤 간결하게 쓰여진 책이다. 마음 먹고 읽으면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장황한 책들은 읽다 보면 무슨 내용인지 핵심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덕분에 다른 책들에 비해 책가격도 싸다. 


3. 상식적인 책이다

많은 기독교 서적이 신앙이 없으면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 책도 그런 면이 있기는 하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논리를 풀어 나가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상식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 아쉬운 점.

1. 미국 책이다.

미국적인 배경에서 설명된 부분이 많다. 우리로서는 당연히 공감이 잘 안 된다.


2. 미국말 책이다.

주기도문 원문에 좀 더 충실할 수 없었을까? 예를 들어, 주기도문 원문은 아버지로 시작하는데 이 책은 "우리"로 설명을 시작다. 영어로는 Our Father in Heaven이니까. 그런 식이면 우리나라 사람이 주기도문 책을 쓴다면 "하늘"부터 시작해야 하는데,이게 맞는 걸까? 


* 결론

그래도 주기도문 관련 책 중에는 믿고 볼 수 있는 좋은 책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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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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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민이다.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이 분은 20년간 내가 알아온 사람이고 이미 20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아마 나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에는 이 사람 이름이 꼭 들어갈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 사람 생각을 하고 이 사람이 했다는 말을 날마다 읽는다. 밥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이 사람은 나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고민이 생기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는 과연 이 사람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잘 알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을 더 알고 싶고 이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친구고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말 많이 오해되어 왔다. 나와 이 사람을 따르는 무리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거의 다 눈치를 챘겠지만 이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이 책의 주인공 매티는 바로 내 주위에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내 주위에서 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그녀는 아마 내가 못마땅할 것이다. 지금도 살아 있지도 않은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정작 살아서 바로 옆에 있는 그녀에게는 그런 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일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충분히 매티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러나 매티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내가 아니다. 물론 나도 필요하지만 나와 매티 사이에 있어야 하는 한 분이 있다. 매티는 비행기에서 그 분-a perfect stranger 원어 제목이기도 하다-을 만난다. 제목에 예수라는 말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누군지 약간의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읽었겠지만 제목에서도 나온 것 같이 이 사람은 예수이다. 매티의 오른쪽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앉았고 왼쪽에는 예수가 앉았다. 매티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그녀에게 종교 이야기를 꺼내자 매티는 짜증을 낸다. 당연하다. 그녀는 나와의 결별을 생각하고 있다. 바로 내가 믿는 그 기독교라는 종교 때문에 말이다. 왼쪽에 앉은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종교는 항상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죠. 나도 종교를 싫어해요. 예수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자, 매티는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예수가 한 이야기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억압하는 종교(religion)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만족을 주는 관계(rela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티를 구원(save)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출장으로 비행기에 오른 매티에게 구원은 천국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그녀의 이혼의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관계가 이혼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도 당사자와의 관계가 아닌 아주 낯선 사람-a perfect stranger, 예수-과의 관계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매티의 입장에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나는 매튜의 남편인 닉의 입장이었고 예수의 입장이었다. 어떻게 나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종교가 아닌 관계-relation, not religion-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전도를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때는 의로운 마음으로 가득해서 예수의 이름을 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자세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이 사람을 자유케하고 구원을 주는 소식이었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종교적 형식과 의무를 지우려는 것이었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는 종교인인가, 아니면 자유인인가? 전자라면 종교를 말할 것이고 후자라면 자유를 말할 것이다.

 

 나는 요새 종교를 걷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종교라는 매개체를 벗겨내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라는 틀을 걷어내려고 하는 이유는 종교에는 폭력성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8글자의 말이다. 이 말은 성경에 있는 말도 아니고 예수가 할 만한 말도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만들어 낸 폭언이다. 아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의 의도가 싫어하게 되었다. 왜냐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신앙이라는 거짓 가면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준 것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 의지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자유를 다시 빼앗아 하나님의 종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종교의 폭력이다. 강요된 신앙, 두려움에 의한 신앙은 진정한 신앙일 수 없다. 예수는 깡패가 아니다. 너 나 믿으면 좋은 데 데려다 주고, 안 믿으면 확 죽는다. 종교는 이런 말을 하는 예수를 만들어 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예수는 이런 모습이었고, 내가 전했던 예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또한 종교라는 매개체를 벗어나 하나님과의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 예수가 매티한테 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최종적으로 매티를 위한 것이다. 내가 매티에게 예수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와 사랑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완전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설령 내가 그것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 내가 그러한 삶을 누리면 누릴수록 나는 이 책에 나온 아주 낯선 사람, 예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고백이 아니라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지금 나의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 나에게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 이 책에 나온 예수처럼 말이다.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원제(a Day with a Perfect Stranger)랑 큰 차이가 있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자면 완전히 낯선 사람과 함께 한 하루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믿음을 강요하며 무조건적으로 교회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싶은 사람도 내가 지금 무엇을 전해야 하고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해 이 책은 좋은 모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매티의 내일이 궁금하다. 어쩌면 오늘은 그녀의 새로운 생일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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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 2006-11-2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준 것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부분을 읽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울고 싶군요.


설박사 2006-11-2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력을 보니 제가 11월 4일 이후로 페이퍼나 리뷰를 올리지 않았네요. 반갑습니다. 심천님. 오래간만에 새로운 분을 만나게 되었네요. 요새 제가 좀 슬럼프인데 님의 댓글을 보니 기운이 좀 나네요. 감사합니다. ^^
 
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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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잠이 오질 않는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전에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음성과 다름이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해변을 거닐 때마다 나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리곤 했다. 꿈만 같던 약속이 이루어졌건만 하나님은 그 약속의 선물을 지금 스스로 버리라 명령하신다. 오랜 세월 하나님을 알며 나는 이제는 하나님을 의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그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꼭 그의 약속을 지키신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으리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했다. 그리고, 일어나 아들을 불렀다. "이삭아. 일어나거라.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 부분에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바보이거나 아니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나를 좌절케 하는 인물이었다. 죽어도 그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끔은 믿음은 이성과 반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믿음의 행동을 취할 때 이성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싫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동로봇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싫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이성을 심어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그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모순이다. 분명 아브라함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나는 토미 테니를 통해 아브라함의 결정을 도왔던 아주 특별한 근거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었다.


토미 테니를 처음 만난 것은 'The God Chasers' 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아직도 그 책에 나온"Do you want me?"라는 하나님의질문을 가끔 내게 던져 본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민할 때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닐 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질문에 "네? 그래야 하나요?"로 대답할 때가 많았다. '하나님의 관점'은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원할 때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관점'은 정말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아빠의 팔에 들어올려진 어린 아이의 경험처럼 말이다. 그러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쩌면 관점의 변화는 내 몸을 밝히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제사로 나의 몸을 드리기 위해서 내가 경험해야 할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많이 하지만 너무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이렇게 매주 예배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테니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어쩌면 우리의 예배는 나아갈 방향을 잃고 낮은 수준에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상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압도되어 버린다. 예수님은 내게 능력을 주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양이며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용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용을 쫓아다닐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러한 사람들을 따라다닐 때가 많다. 테니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도마뱀 한 마리와 그것을 쫓아가는 많은 무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 준다.


토미 테니는 내게 예배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때로는 너무 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보이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나는 테니의 책이 좋다. 테니가 책에서 언급하는 영점의 가치는 그의 책 자체 내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나는 세상을 살기 시작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의 여러 가지 소리로부터 벗어나 나를 사랑하시는 한 분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배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통해 나는 세상을 간단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님을 안다. 열정단속반에 의해 식어버린 나의 마음과 열정에 다시금 불이 붙어야 함을 느낀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 의지와 이성 또한 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장 똑똑한 상태에서 가장 이성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통해 가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정말 탁월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테니로 인해 나의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하나님 없는 부흥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해주세요. 우리의 눈을 밝혀서 우리의 온 몸이 밝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인생은 쉽지 않다. 때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향해 치닫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치게 빠르고 정신 못차릴 정도로 치열하다. 그러나 우리의 비명이 즐거운 비명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과 함께 상승기류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비명을 지르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소리는 즐거운 외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런 감탄을 듣게 될 것이다.


'오! 신나는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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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2-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놀람과 갈등과 번민 등의 갖가지 약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그가 믿었다고 해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이성과 항상 상반되는 것일까요? 상반되는 듯하게 보여도 저는 믿음의 기초가 이성이라고 생각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속성을 인지하는 이성을 먼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거지요. 모리아산에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사환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할 때(정확히 몇 장인지는 모르겠음 창 20장~25장 사이), 아브라함은 <아이와 경배하고 함께 돌아오리라>라고 대답했어요. 이 대답이 사환과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고 그의 믿음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게 무슨 이유인지 확실하게 모르나 하나님은 분명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이심을 그가 믿었기에 산을 내려 올 즈음에는 다시 아이와 함께 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믿었고 또 행했던 거죠, 행동과 말로써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치 대단한 사람인건 확실하지만,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발뒷꿈도 못 따라갈만큼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성경에서 말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도 그저 약하디 약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아주 조금 남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고 말 한마디에 덜컥 바쳤다면 그에게 믿음(?)의 점수를 훨씬 후하게 줬겠지만,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음의 행위도 자연스럽게 뒤따랐기 때문에 설박사님같이 신실하신 분이 혀를 내두르며 도저히 못 따라갈 인물은 아니라고 봐요^^
설박사님 아버님께서 " 의겸애비야, 급해서 그러는데 너희들 전세 자금 좀 빼서 나한테 융통 좀 해주라." 하셨다면 설박사님께서는 불안해서 거역했을까요? ㅎㅎ 물론 제가 님의 집 사정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비유를 해서 적절할지 모릅니다. 의겸이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업 회장님쯤되신다고 가정한다면(그러니까 자금 능력이 충분히 되시는^^;;) 이사하는 수고야 따르겠지만 전세금 정도는 아버지를 믿고 융통해 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다시 그 돈은 돌려 주실 거고, 어쩌면 이자까지 쳐서 더 좋은 집을 주실 수도 있으니..^^(여기서 효에 관한 건 좀 접어두고서라도요)
님의 리뷰의 주제인 하나님의 관점과 얼마간 차이가 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믿음과 이성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고,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믿음이 약하다..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제대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요^^;
그리고 조상이란 건-우리가 도저히 못 따라 갈 존재가 아닙니다. 나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지요. 나의 근원이 조상이기 때문에 조상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도록 그런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다고 우겨 봅니다. 안 우겨도 돼요. 의겸이가 님을 쏙 닮은 것처럼 우린 조상을 닮게 되어 있다고요. 결론은 우리도 아브라함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아자!

설박사 2006-02-28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댓글은 추천할 수가 없을까요? ^^
진주님의 귀한 생각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6-03-07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혼의 기도
P. T. 포사이스 지음, 이길상 옮김, 유진 피터슨 서문,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러시아 작가인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노동이다."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실제적 행동이나 경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내일 시험이 있다면 우리는 공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를 해야 하는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기도가 참되고 행복한 삶의 충분조건인가?


기도의 본질을 꽤뚫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이지만 기도에 대한 그다지 이롭지 않은 책이 기도 응답에 관련된 책이다. 일시적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만 기도보다는 응답에 집중시키게 마련이다. 당연히 응답이 더뎌지거나 없다고 생각되면 기도는 끝이 난다. 물론, 기도는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고 난 후 마음이 심란해지고 부담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평화만을 원한다면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포사이스의 '영혼의 기도'는 기도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서이자 기도의 특성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균형잡힌 기도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책이다.


포사이스는 먼저 기도의 내면성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이 부분이 기도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주된 이유이자 기도가 필요한 가장 절실한 이유이다. 나는 한참 동안 기도의 내면성 부분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동감했고 기도하면서 철저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기도하면서 느끼는 가장 특이한 점은 '내가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나는 기도하기 전에 생각하고 있던 나와 기도하면서 알게되는 나의 모습이 같지 않음을 보게 된다. 기도할 때 나는 하나의 힘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기도하기 전에는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힘이다. 이 힘은 '철저한 자기애'이다. 이 힘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고 결국은 나와 이웃을 파괴한다. 포사이스는 기도하는 것을 날개를 다는 것으로 비유했는데 내게는 이 자기애라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도였다. 우리는 기도로써 참된 자아를 얻을 수 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나는 참된 자아를 갖기 전에 이웃과의 진실한 관계도 존재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포사이스는 기도의 내면성을 중심에 두고 다음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인간의 가장 원천적인 본능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세를 '기도의 자연스러움'으로 설명했고 기도가 단지 내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것으로서 '기도에 따른 도덕적 반응'과 '현실에 충실한 기도'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참된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를 '쉬지 않는 기도'와 '중보하는 기도', '집요한 기도'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각 장별로 내용이 너무 독립적인 경향이 있어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각 장들은 기도가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 이해되는 것을 막아준다. 예를 들어 2장 기도의 자연스러움을 너무 강조하면 사실 기도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은 배제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포사이스는 7장 집요한 기도에서 전쟁같은 기도에 대해 말한다. 문제를 내는 것도 하나님이지만 그 문제를 풀기를 원하는 것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부딪치고 그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각 장들이 서로를 보충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기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답변을 할 수 없는 정말 신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포사이스는 가장 큰 죄는 기도를 쉬는 죄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비를 모두 밝혀낼 필요는 없지만 그 신비 속에서 살아야할 필요는 절실하다. 예수 그리스도도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 가장 강조한 특성 중에 하나가 바로 '끊임없는 기도'라는 것이었다. 5장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었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헤아려볼 수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쉬지 않는 기도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서 그에게 순종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 이것은 삶과 기도가 분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포사이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릎꿇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경계한다.


유진 피터슨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이 책을 오랜 벗과 동반자로 삼았다고 한다. 기도에 대한 책은 많이 있지만 두고두고 읽을만한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포사이스의 기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영혼의 기도'가 바로 오랫동안 읽고 생각해볼만한 책이다. 기도에 대한 허약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기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기도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하게 이 책을 읽는다면 분명 체할 것이고 이 책은 방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게 될 것이다. 천천히 음미하고 시간을 들여 사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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