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빌 게이츠가 말한 인생에 대한 충고 10가지 중 첫번째가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인생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면 사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고 공평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보상을 요구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인생이 너무 복잡해지고 더 괴로워질 것이다. 왜 성경에 나오는 비유에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분명 처음 분배는 공평하지 않았다. 세상도 그와 비슷하다. 인생이 100미터 달리기라고 한다면 90미터 지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출발점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앞서 나가려는 욕심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 있다. 사람들은 소위 잘 나가는 직업, 즉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을 선호한다. 또는 일류대를 나와서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 치열한 경쟁이 싫은 사람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업무 강도가 낮은 교사나 공무원 등의 직장을 노린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직장이나 직업이라는 것이 너무 뻔해서 경쟁률은 치솟기만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굉장히 똑똑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편안한 삶이고 성공적인 삶인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의 바람에 밀려다니는 낙엽같은 삶을 살고 있다. '미쳐야 미친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이런 삶의 경향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현대인의 기준에서 조선 지식인들의 모습은 특이하다.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성공이나 돈이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때로는 현실이 이들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들의 모습에는 흔들림이라는 것이 없다. 바람이 심하면 흔들리기도 하고 못 이기는 척 밀려가는 것이 보통이건만 이들은 바람을 따라 돛을 펼치지 않는다. 뭔가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간 관계나 일상 생활에서의 모습도 남다르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내용이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광인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의 일관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은 '불광불급'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을 저자가 두 불(不)자를 빼고 정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명제가 참이면 명제의 대우가 참이기 때문에 '미친(及) 사람들은 미친(狂) 것이다'가 참인 명제일 것이다. 제목에 시비를 걸겠다는 것은 아니고, 미쳤지만(狂) 미치지(及) 못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 뿐이다. 미치기는(及)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조급함이 없는 여유로운 마음을 전달해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한 기운도 느껴지게 했다. 그 쓸쓸하고 서늘한 느낌은 '광기의 역사'에서 미셸 푸꼬가 지적한 대로 광인들이 권력의 영향 아래 탄압받는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안타까운 모습이 많았지만 나는 이들이 '진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무엇이 미친 것이고 무엇이 미치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사실 나는 조선 지식인들이 미친 것인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분간을 못하겠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겼던 이들이 미친 것인지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미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 직업을 택하고 삶의 결정을 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헌신없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정치가, 법의 따뜻함과 그 안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을 울리고 협박하고 죽이는데 법이라는 칼을 사용하는 판사와 변호사,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없이 생명을 담보로 더러운 돈벌이를 하는 의사, 단지 안정된 직장을 찾아 자신의 편의를 시민의 편의보다 우선시하는 공무원, 교육에 대한 열의없이 20년, 30년 전의 교과서에 벗어나지 못한 죽은 지식으로 아이들의 머릿속을 채우는 교사, 이런 사람들이 정상인가? 그렇다면 나라를 위해 일신을 바치는 정치가, 슈바이처같은 의사, 가난한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사, 청렴결백한 공무원, 밤새 연구하며 노력하는 교사가 미친 것이란 말인가? 후자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끄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슬픈 현실'이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세상, 그래서 정상이 오히려 주목을 끄는 세상, 과연 누가 정말 미친 것인가?
파스칼은 이와 같이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미쳐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살기 어렵다. 고통도 많고 힘든 일도 많고 슬프고 괴로운 일도 많다. 살아있기 때문에 견디고 참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파스칼의 말이 일리가 있다.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왕 미칠 것이라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미쳐야(狂) 미치지만(及) 잘못된 것에 미치면(狂) 잘못된 곳에 미친다(及). 우리 모두 뭔가에 미쳐 있고 그리고 그 미침(狂)에 의해 최종 목적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목적지라도 미치게(及) 될 것이다. 이 책의 조선 지식인들처럼 멋지게 미쳐야(狂) 한다. 이들의 멋은 바로 미침(狂) 그 자체에 있다. 이들은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 않았다(狂). 단지 그 미침(狂) 안에서 즐거워했을 뿐이다. 미침(狂)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각자의 독특한 '미침((狂)'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걸을 때는 걷고 먹을 때는 먹어라.' 요새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되뇌는 말이다. 인생이란 목표지점에 가서 딱 꽂히는 것으로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목표지점으로 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미쳐있지(狂) 않으면 대부분의 인생은 의미없는 시간이 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미치기(及) 위해 미치지(狂) 말고 미치기(狂) 위해 미치자(狂).” 인생을 값지고 의미있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