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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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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로부터 분리된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것은 나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인에게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매트릭스 세계를 진짜라고 믿고 있는 네오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불행하게도 나는 네오를 매트릭스에서 빼내 줄 알약이 없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어떤 사람에게 알려주시는데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그러니 계시가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참 맥이 많이 빠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매트릭스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인 모델을 갖는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좋은 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 중 하나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결국 죽어야 하는 걸까? 사실 이 부분보다 사람을 더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고통당할 때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한 세계로 가는 하나의 출입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정말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출입구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낸시 피어시를 통해서 또 다른 입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라는 입구였다.
 
 이 책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기념비적인 책이 될 것이 분명한데 이유는 그 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고 내 안에 계속 담아만 두었던 나의 태도의 180도 변화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그냥 속으로 '그건 아닌데요'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었다. 피어시는 "복음전도는 불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과 실제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돕는 데서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도할 때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그렇게 꽁꽁 숨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믿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이야기는 나도 하나님께 종종 요구하는 내용이다. "아니 사람들한테 짠 나타나시면 될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무식한 전도라는 방법으로 나를 고생시키십니까?" 결국 나의 이런 짜증 섞인 불만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냥 사람들에게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나게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도는 너무 무식하고 계시 외에는 사람을 일깨워줄 방법이 없는데 보통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언젠가는 혼란스러운 인생의 때가 오면 그 때는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표를 하나 그렸는데 그것은 가치와 사실 영역에 관련된 표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자연주의는 가치 영역에서는 의미가 없고 유익하지 않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는 가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유익하고 실용적이고 의미가 있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그 진위 여부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피어시가 이 책의 제목을 완전한 진리(Total Truth)라고 정한 이유는 그 동안 기독교가 가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사실 영역을 자연주의에게 완전히 내어준 듯한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가치적인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진리임을 그래서 하나님의 이야기,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한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다. 즉, 가치 영역과 사실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진리여야만 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낸시 피어시가 위험하다고 말한 바로 그 위치에 내가 서 있었다. 즉, 기독교가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치적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피어시가 예를 든 미국의 실용주의를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기독교가 상층부의 영역 즉 가치 영역에서만 위치하려는 경향은 신학적인 흐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온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주장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다.


 나의 위치를 알게 해 주고 나의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지도와 좋은 책의 공통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내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장소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잘못된 장소에서 헤매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해서 창피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세계관을 통한 복음 전도 방법은 '아니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왜 한 번도 해 본적인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복음 전도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나의 삶의 한 부분만 차지하고 전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향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앞으로도 '완전한 진리'라는 낸시 피어시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견해는 내게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나를 격려해주고 힘을 줄 것 같다. 내가 나중에 쉐퍼처럼 시골 촌구석에 살면서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집에 온 사람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쉐퍼의 제자인 '낸시 피어시'와 이 책 '완전한 진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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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h21power 2007-09-2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에게 좋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완전한 진리 읽고 가치와 실제 세계 사이에의 연결성...즉 완전한 진리에 대한 외침을 준비하겠습니다. ^^

설박사 2007-09-2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 - 우주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최요한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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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에 "Superman returns"를 봤다. 지금 보니 조금 촌스러운 의상에 어색한 머리스타일에 약간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릴 때 봤던 수퍼맨이 돌아왔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기억을 먹고 사는 것 같은데 수퍼맨 영화는 내게 좋은 식사였다. 재밌었고 감동적이었고 뜻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대사도 내게는 그 의미를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자는 아니지만 수퍼맨같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긴, 나는 수퍼맨보다 더 능력이 많은 한 사람을 알고 있기는 하다. 글쎄 그런데 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수퍼맨은 거대한 대륙을 들어서 우주로 던져버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이 사람은 기다란 두 개의 나무를 이어 만든 것도 들지 못해 들고 가다가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수퍼맨은 하늘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주로 걸어 다닌다. 한 번은 물 위를 걸었던 적도 있지만 별로 그런 것을 즐기는 것 같지 않다. 수퍼맨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만 이 사람은 병들고 아픈 사람, 소외된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 짐작했겠지만 수퍼맨에 비해 너무나도 허약해 보이는 이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책은 수퍼맨에 비해 한없이 기운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교회와 교리가 필요한지를 설명한 책이다. 이런 책을 한 마디로 ‘기독교 변증서’라고 한다. 즉,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기독교의 필요성과 영향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분석과 논리에 의해 기독교를 설명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변증서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기독교를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결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 1+1=2와 같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열등하거나 이해력이 모자란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그렇게 증명될 수 없다. 이 책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열심히 설명을 하지만 마지막에 독자들은 이 설명들을 통해서 완전한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질문과 도전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시작도 약간 특이한데 '별을 바라봄'으로 인해 생기는 우리의 묘한 감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한 탐구의 첫발을 내딛는다.
 
 완전한 정답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필요한 이유는 허약한 예수 그리스도, 냉정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인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왜 우리에게는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영문도 알 수 없이 이 땅에 태어났다. 창조자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이 우리가 살다가 죽게 될 우리 삶의 전부인 곳인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안위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는 기계적이고 냉정한 분이다." 이 책은 위의 질문들에 여러 가지 대답을 제안하면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쉬운 대답으로 질문에 대한 고민이 그치지 않기를 유도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쭉 설명해 나가면서 이 책의 중반부 쯤에 이런 여러 가지 질문에 하나님이 제시한 답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맥그래스의 이야기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 설명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딜레마였을 것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걸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수퍼맨이 우리의 구세주라면 사람들이 금방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봐도 그다지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니면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곤경에 빠질 것 같아 보였다. 마치 골고다로 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얼떨결에 대신 구레네 시몬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지구라고 하는 이 거대한 행성은 기적처럼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고 있고 중력이라고 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힘은 우리가 지구에 꼭 붙어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고 있다. 비록, 인간이 만든 구조물들에 의해 도시는 마치 인간이 창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밤하늘을 보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 속에 먼지같이 작은 땅덩어리인 지구에 살고 있다. 맥그래스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리를 만든 창조자가 우리가 결코 만들 수도 도달할 수도 생각하기도 힘든 별을 드넓은 우주 공간 속에 매달아 두신 분이라면 그런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가 바로바로 해답을 주지 않는 것 같더라도 성급한 판단의 자리에서 물러나 한 번 쯤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도시의 야경 속에 보이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처럼 흔해 빠진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기 때문에 전혀 수퍼맨이라고 의심받지 않았던 클라크처럼 우리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맥그래스는 단서를 제공했다. 그 다음 선택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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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7-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설박사님 덕분에 좋은 기독교 서적을 많이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시죠?^^

설박사 2006-07-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스텔라님. 오랜만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지요. ^^ 스텔라님도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지금 처갓댁에 와 있습니다. 내일 다시 서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강자와 약자
폴 투르니에 지음, 정동섭 옮김 / IVP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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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 나는 그런 말은 듣는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인간...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 편하다. 외부의 어떠한 변화와 누구과의 관계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 나름대로 사는 방법을 점차 배워가고 있다고 해야할까? 투르니에의 분류에 따르면 나는 점점 강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힘껏 쇠몽둥이로 내리쳐도 끄덕도 안하는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었다. 총을 수십 발 맞아도 끝까지 할 말 다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인공이라면 그런 법이다. 멋있는 사람이란 끝까지 잘 견뎌내는 사람이다. "나..아파.." 혹은 "도와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약자에서 강자로 가는 것은 심리학적인 구원이라고 한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던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한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심리학적인 구원인 강자가 되는 것이 개인에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있다. 투르니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토록 강자가 되기를 바랬던 나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내 안의 모습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강자로 보지만, 나는 내 안에 열등감과 외로움을 숨기고 있다. 끊임없이 나의 약점들이 나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찾는다. 그리고 이유를 찾아낸다. 내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려고 애를 쓰지만 분명히 내 안에서는 신음소리를 삼키고 있을 때가 많았다.


슈퍼맨은 행복하지 않다. 슈퍼맨이 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간다. 칼에 베이면 피를 흘린다. 그리고 병들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결국에는 죽는다. 때로는 넘어지고 울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야만 일어설 수 있을 때도 있다. 인간이 왜 그렇게 연약한 존재인지 모르겠다. 강철갑옷을 입고 있어봐야 인간이다. 더 치명적인 상처는 인간의 내면에서 생긴다.


강자가 되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상처받았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고 힘들면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투르니에의 말이 옳다. 이 세상에는 강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뿐, 강자는 없다. 누구에게나 상처와 아픔이 있고, 이유 모를 열등감과 외로움이 있다.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따뜻한 친구의 손이 필요하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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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5-07-1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천해요~

설박사 2005-07-1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댓글과 추천은 언제나 제게 감동입니다.
 
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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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4년 4월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p.131)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오소독시'를 볼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체스터턴은 그 동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 스스로 파괴한 이유를 말해주었고 개선을 원할 때 내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 가르쳐주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나는 이 한 구절만 기억했다. 이 책에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소독시'의 체스터턴은 C.S.루이스보다 치밀한 논증을 보여주고 필립 얀시보다 더 독자를 시원하게 해 주며, 스펄젼의 설교가 청중에게 심어주는 비유 이미지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낸다. 너무 보물이 많아서 나는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 나온 것 뿐이다. 그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하고 쳐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나는 체스터턴의 보물 창고에 다시 들어갔다. 아무래도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좀 더 크고 멋진 것을 들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나는 다시 한 번 체스터턴이 펼쳐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남기고 책을 덮었다. 체스터턴은 그림을 잘 못 그리더라도 모델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바꾸면 실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또한 초라한 모델로는 초라한 작품 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이 언급한 그 모델은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바로 가장 이상적인 정통 신앙을 의미한다.


비기독교인만이 교회에 실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실망을 더 많이 한다. 왜냐면 정말 교회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사랑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고 이상적인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온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알고는 더 멀찍이 교회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청년부 예배가 나가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없는 공동체, 결코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예배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다. 첫번째 '오소독시'를 읽었을 때 나는 내가 결코 사랑하려는 마음이나 의지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저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모델을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알았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델에게 돌릴 수 있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더를 꿈꾼다. 또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것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모두 힘든 일이다. 공동체는 늘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분쟁도 발생한다. 리더십에 대한 책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힘들다는 증거이다.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서 통제 불가능의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당분간 외식을 안하기로 했다. 아이가 식당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강제로 앉혀 놓으면 식당 가득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동체의 개선을 위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물론 여기까지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가 생각이 난다면 나는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나는 그 이유를 없애기로 했다. 그 이유가 없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꿈도 또한 어떤 모임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도 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고 박수해줄 사람은 없다.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실패가 필수적일 것이다. 절대로 모델을 바꾸는 어리석은 화가는 되지 않을 작정이다.


이 책은 체스터턴이 왜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첫번째 읽을 때도 두번째 읽을 때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생각했다. 체스터턴의 생각은 내 삶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기독교가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나를 알고 있다. 기독교는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에 놀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수없이 폐허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유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를 개선시키신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또한, 기독교는 삶을 이해하고 있다. 인생이 단순하지 않고 풀기 힘든 실타래처럼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정말 형편없지만 하나님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끝없이 넘어지지만 끝없이 일으키신다. 기준을 낮출 만도 한데 성경은 몇 천년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마 그 배움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약 마지막 날에 내가 이유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상을 품고 살았음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를 통해, '오소독시'를 통해 배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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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5-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소독시 안에 보석이 그렇게나 많으시다면 우와~저도 보관함에 넣을게요.^^

2005-05-1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박사 2005-05-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감사합니다. 진주님... 나중에 영어로 쓸까봐요.. 그냥..ㅋ
영어도 안되고 한국말도 안되고... 그래도 열심히 쓸 겁니다.. ^^

2005-05-18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마른 내 영혼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종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대학교에 가서 내가 속았음을 알았다. 중고등학교 때 봤던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속의 대학생의 모습과 내 모습은 너무 달랐다. 대학생이란 책 두어 권을 옆구리에 끼고 축제를 즐기고 동아리 선후배와 산과 바다로 놀러 다니고 변화하는 계절을 즐기면서 자유롭고 여유만만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대학 생활하면 과제로 밤을 새며 침침한 독서실에서 뻐근한 목 근육을 풀어주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대학 가봐야 별거 아니라고 냉소적으로 말씀하시던 일부 선생님들의 말씀이 내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대학 뿐만이 아니다. 좋은 직장, 넓은 집과 멋진 자동차, 절대 권력, 열정적 사랑도 별 것 아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망가지고 불행해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되기를 원하지만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들은 그 이전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 뭘까?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목표도 없이 살아야 하는가? 뭔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다 헛된 것이란 말인가? 인생 자체가 헛된 것인가? 성경에는 인생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게 말한 성경 저자는 부와 지혜와 명예와 권력을 겸비한 솔로몬 왕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보니 인간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탄식한다.


그렇게 인생이 공허함을 느낄 때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기독교 서적이다.  그러나, 저자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적 답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허전함과 갈망에 대해 저자가 알고 있는 최고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목이 아쉽다. 제목이 기독교적인 색채를 띄어버리니까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이 못 읽을 것 같다.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며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눈에 띄면 좋으련만 '목마른 내 영혼'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분명 그들은, 이 책은 '기독교인이나'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현대인은 맹목적으로 신을 믿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다. 인간은 원자를 쪼개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체세포를 통해서 생명을 복제하는 첨단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수많은 철학 사상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자본주의를 통해 자원의 활용을 극대화시켰고 부를 재분배해서 모두가 같이 잘 살려는 정치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심리학으로 해부되고 있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적어도 신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려면 스스로가 알고 있는 현실과 느낌에 근본적인 모순이 되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다. 과학이나 철학, 정치, 심리학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않은가? 그것들이 우리의 허한 공간을 채워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경제적 여유를 누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공허함을 느끼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의 말로 이 책을 시작한다.


"사람은 배가 불러야 무언가 진지한 주제로 생각을 돌린다."


배가 부를 때 목적을 성취했을 때 정상에 올랐을 때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더 큰 빈방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왜 인간의 내부에 이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가? 그 곳은 바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 스스로가 거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다. 저자가 이렇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스스로가 그 공간을 인식했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대답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공감하겠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헛소리로 생각할 많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도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고 다른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그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런 책들을 통해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 진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다.


이 책의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은 꿈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꿈이 되어야만 하고 또 꿈이 될 것이다 (노발리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나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혹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인/생/이/ 꿈/이/ 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인생은 제 1의 현실에서 제 2의 현실로 밀려난다. 마치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꿈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아주 마음이 편안해진다. 꿈에서 설사 내가 죽더라도 나는 실제로는 죽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결코 죽고 나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시점부터 시작한다. 아마도 그 시작의 순간은 바로 인생이 편안하고 행복한 꿈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요새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 책 안에 인용된 C.S.루이스의 은의자(The Silver Chair)의 한 부분(p.123)과 비슷함을 느꼈다. 기독교가 거짓이고 인간은 우연히 발생했거나 혹은 생존기계로서 유전자에게 반항하는 존재이거나 전생에는 개나 돼지였다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이거나 혹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 세계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그런 세상과 그런 인간이 진실이라고 가정하자.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세상과 인생은 '의미없는 쓰레기'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셔서 아주 의도적으로 그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존재이고 한 생명의 값어치는 온 우주 전체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의 죽음으로 나를 구해내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과 '나'라는 존재는 그렇다. C.S.루이스의 '은의자'의 주인공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짜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지지할 것이고 그 이야기 편이다. 기독교가 나에게 가르쳐 준 현실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의 공간과 그 중심에 있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을 행복한 꿈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죽고 나서는 어떻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처럼 내 안의 빈 공간을 인식하였고, 하나님을 통해 그 공간을 채울 수 있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때때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이 가득찬 곳이지만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하나님과 나와 이웃들의 러브 스토리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절망스러운 내 모습을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게 하였다. 솔직히 나는 죽고 나서 영원히 멋진 곳에서 살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 마치 20년 후에 멋진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 그 전에 거지같이 살아야 하는 것과 지금부터 계속 적당한 주택에서 사는 것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20년 후에 내가 살아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 전에 거지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즉, 현재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의심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한 영생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진행형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내 삶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책은 아주 쉽게 쓰여진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공허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는 이 책을 읽고 허무함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혹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부끄럽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차갑고 너저분하고 우스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인생이 달콤하고 행복한 꿈이 되는 순간'을 맛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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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4-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좋은 리뷰네요^^

설박사 2005-04-1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제 리뷰에 댓글 달리는 것이 참 드문 일이라서...
저는 댓글에 늘 감동을 먹습니다. ^^

로드무비 2005-04-1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 저도 잘 읽고 갑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전 M. 스코트펙 박사의 책을 몇 권 읽었어요.)

책속에 책 2005-04-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님, 추천만 하고 가려다 위댓글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저는 비기독교인이에요..어쩌면 갈림길에 서있는. 그래서 님의 리뷰가 제겐 참 시기적절하네요.

설박사 2005-04-1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또 한 번 감동의 물결이 흐르네요. ^^

설박사 2005-04-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mer님... 반갑습니다. 갈림길에 계시다면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시겠네요. 분명히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좋은 선택 내리시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결정을 내리시게 되면 제게도 꼭 알려주세요. 저도 기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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