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학의 향연
심광섭 지음 / 동연출판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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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은 오랜 시간 동안 외면받아 왔습니다. 신학을 배워야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할 수 있지만 목회자들에게도 신학은 젊은 시절 잠깐 하는 지적인 말놀이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고 목회자가 있지만 꾸준하게 자신의 신학적 소양을 넓혀 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목회자가 그러하니 교인들에게 신학은 정말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은 소수의 신학자들이 자신들만의 활동 무대에서 펼치는 관객 없는 공연과 같았습니다.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머리만 커져서 어려운 얘기만 나불나불하던 신학에 눈과 코와 귀를 달아 주고 팔, 다리를 붙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에 빠져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부정하던 신앙을 새로운 길로 안내합니다. 


“나는 기독교 미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앙’을 제시한다. 이 명제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을 보완하고 넘어서 신앙의 다채로운 구체성과 역동적 생동성, 보편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 (29)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앙, 그리고 기독교 미학을 통한 신학의 재구성, 예술에서 발견되는 신학과 하나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책은 전체 세 개의 큰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 ‘길’에서는 기독교 미학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1부의 2장에서는 ‘영적 감각과 신앙’에서 주로 듣는 것에 익숙했던 현대 기독교의 영적 경험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신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곱 개의 영적 감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는 ‘시간과 신앙: 하나님을 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듣고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경험하며,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보는 배움의 길에서 완전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84)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옳은 말을 듣고 옳은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는 신앙으로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부의 주제는 ‘신과 인간’입니다. 여기서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십자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여러 가지 주제가 있지만 삼위일체와 십자가를 중심 주제로 다룬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잘 보여 주는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많은데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미학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한 부분만 읽더라도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3부의 주제는 ‘예술’입니다. 시학적 신학, 미술신학, 음악신학, 놀이의 신학, 춤과 신학, 대중문화와 신학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의 다양한 관심과 예리한 신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고전적인 예술 분야는 기독교의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에 당연히 다뤄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신학(K-Pop을 중심으로)은 별다른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저자의 시선이 매우 신선해서 좋았습니다. 저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권위에 찬 종교적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과 섞이고 함께 노는 행복한 하나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다.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작은 생명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홀로 거룩하신’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다.” (441)


신학적 깊이와 학문적인 글의 완성도, 그리고 대중성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보기 드문 수작입니다. 저는 ‘기독교 미학’에 대해 좀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예술이라니… 참 팔자 좋은 신학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기독교 미학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여가 활동이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춤추고, 노는 와중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바쁜 꿀벌 혹은 벌꿀로 만들어 인간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일부 권력자들의 음모에 놀아났던 과거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함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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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부클래식 Boo Classics 6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두행숙 옮김 / 부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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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한 부분을 읽다가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단어를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이데거도 그렇고요. 그런데, 니체는 쉽고 명료하게 글을 쓰네요. 새로운 말을 만든 것도 별로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너무 명료해서 오해하고 싶어도 오해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재미도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니체를 좋아하나 봅니다. 


제목부터가 아주 대담하죠. 안티크리스트. 니체의 결론부터 써 보죠. 


"이로써 나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므로 나의 판단을 말하겠다. 나는 기독교에 유죄 선고를 내린다... 기독교 교회는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부패 중에서도 최고로 부패한 것이며,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부패에의 의지를 품고 있다." (141)


이 책을 안 읽어봐도 전체 내용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는 강렬한 결론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이고, 어머니가 목사의 딸이었던 니체는 기독교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내용도 그렇고요.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칭찬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니체는 성경의 모든 내용과 기독교도라고 스스로를 부른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해로운 것으로 단정짓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고요. 예를 하나 들어 보죠.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 한 가지 도덕은 '너는 알지 말라'는 것이다...신은 엄청난 불안을 느꼈지만 영민함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지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102)


이 인용구절의 뒤에 부분은 소설이지만 앞의 첫 번째 문장을 쓰면서 니체는 어처구니 없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아는 게 무슨 죄가 된다는 것이냐?'라고 외치는 니체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그러게요. 저도 왜 그 나무의 열매의 이름이 굳이 선악과였는지 궁금합니다.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여하튼 니체는 이런 식으로 성경의 여러 가지 내용들에 딴지를 걸어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 뭘 싫어했는지 감이 잡히네요. 


"기독교는 나약하고 천박하고 실패한 모든 것들의 편을 들어왔으며, 생명의 강한 보존 본능에 반박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왔다." (13)


"나약한 자들과 실패자들은 몰락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애의 제 1원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들이 몰락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11)


니체가 증오했던 것은 기독교의 나약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니체가 볼 때 기독교는 스스로가 나약할 뿐만 아니라 나약한 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기보다는 단순히 그들을 위로함으로써 주변 사람들도 나약하게 만드는 해로운 종교였던 거죠. 기독교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갈 거니까 지금은 괜찮다는 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무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나약한 자들과 실패자들이 몰락해야 한다는 말은 '삶을 부정하고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제발 빨리 꺼져라'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약자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니체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건강을 '위대한 건강'으로 불렀다죠. 그의 건강이 좋을 때 그가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짐작이 가는 말입니다. 그만큼 니체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체가 제 친구였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네요. 

"사는 게 너무 좋지 않냐?"

그랬다면 저는 이렇게 대꾸하겠습니다.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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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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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 동기

하이데거를 좀 배우고 연구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해서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2. 구성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열 번의 강의를 하나씩 챕터로 만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6장 "인간은 왜 불안을 느끼는가"와 8장 "언어란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 6장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요. 8장은 후기 하이데거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장점

하이데거 철학을 참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답지 않게 쉽게 술술 잘 넘어가게 쓰셨습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예를 사용해서 설명을 도우셨고요.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렵지만 이 책은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해서도 잘 풀어 놓으셨네요. 


4. 글쎄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이랑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물론 견해차일 수도 있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제가 확실히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하이데거는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 성격을 '실존'이라고 불렀습니다." (122)


- 인간 실존을 의미하는 말인 Dasein은 단어 자체의 의미로는 '거기 있음'의 의미입니다. 실존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 성격의 의미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측면을 강조한 말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스승인 후설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고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철학의 역사 내내 철학자들이 인지하고 있었던 인간의 특성 아닌가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이 하나도 독특하지 않은데 하이데거 철학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에서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통일성'을 하이데거가 '존재'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관계로서의 존재는 우리가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려는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자기를 드러냅니다." (191)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일단,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통일성이라는 말 자체가 이해가 잘 안 되고요. 세계는 사물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사이의 내밀한 통일성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가 워낙 존재라는 말 자체를 여러 의미로 사용했고 우리나라 말로 그냥 존재로 번역하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존재가 Being 인지 혹은 being 인지에 따라서 뜻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자는 신과 의미가 비슷하고요. 후자는 인간 존재를 의미하겠지요. 제가 알기로 여기서 존재는 전자의 의미입니다. 물론 저자도 후자의 의미로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자의 의미랑 아주 가깝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5. 그래서

역시나 하이데거의 책을 더 살펴봐야겠네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 때문에 불안해 한다고 했는데요. 저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그렇다면 인간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하이데거가 뭐라고 주장했는지 좀더 정확하게 알고 싶네요. 이 책에서는 죽음을 인지하면서 비교의식을 멈추고 삶에 대한 경이를 회복하고 모든 자연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하이데거가 주장했다고 하는데 모호한 것 같습니다. 너무 종교적인 느낌도 강하고요. 하이데거는 좀더 치밀하고 철학적인 말들을 했을 것 같아요.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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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되어야 한다 너머학교 고전교실 3
수유너머 R 지음, 김진화 그림 / 너머학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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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 동기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습니다. 제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화두이거든요. '어떻게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다들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은 별로 없거든요. 마치 문제만 잔뜩 제시하고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의 무책임한 결론을 내는 글이 많습니다. 혹시 어떤 방법이 있나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2. 책의 구성

다섯 명의 사상가와 그들의 책을 주제로 고전의 원문과 함께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니체, 라블레, 아이스킬로스, 프로이트, 장자 이렇게 다섯 명의 사상가를 다섯 명의 저자가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대상 독자

이 책은 '10대를 위한 고전 읽기-시대를 넘어온 물음'이라는 기획 강좌의 결실이라고 기획자가 서문에 기획 의도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상 독자는 10대 청소년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러나, 고전에 관심있지만 어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책입니다. 10대부터 이런 책을 접할 수 있다면 그 청소년은 나중에 정말 생각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대를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친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유치한 것은 절대 아니고요. 


4. 평가

- 고병권 선생님의 발견

이 책의 제목 "너는 네가 되어야 한다"는 고병권 선생님의 니체 철학 해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제가 읽어 본 니체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재미있고 따뜻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제가 궁금했던 '나 자신이 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 분이 쓴 다른 글을 읽고 보고 싶어졌고요. 찾아보니 나름 꽤 유명하신 분인데 저만 몰랐던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자나 프로이트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웠지만 니체에 대해서는 워낙 다양한 시선이 존재해서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은데요. 고병권 선생님의 시선은 균형이 잡혀 있는 것 같고 니체 철학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좀 더 유기적으로 구성할 수 없었을까?

책의 제목은 "너는 네가 되어야 한다"이지만 첫 번째 챕터를 제외하고는 제목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습니다. 굳이 연관을 지으려면 지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주제로 끌고 가기에는 어려움이 좀 있네요.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관련해서는 '너의 꿈을 잘 살펴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네가 생각하는 너는 네가 아니다. 네 이성적인 사유를 접고 무의식을 들여다봐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프로이트는 후자쪽이라서 생각의 주체로서 자기자신을 들여보라는 입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체 구성의 통일성과 유기성이 좀 아쉽습니다.  


5. 이 책이 내게 준 영향

- 니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자꾸 다시 보게 되는 철학자이네요.


이 책의 어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글을 쓸 때 문장의 어투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여기에 쓰는 글은 일기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쓰는 글인데 '~했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듯 "했습니다', '했죠"와 같은 친절한 말투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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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 야생사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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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이 책을 왜 읽었나?

스스로를 어용 지식인으로 선언한 유시민 작가님의 알릴레오 덕분에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나는 알릴레오의 등장이 반가운 한 사람으로서 시민은 언제 국가 권력에 복종하고 언제 불복종해야 할지 소로우의 기준을 알고 싶었다. 


2. 언제 불복종해야 하는가?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소로우의 대답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국가가 전쟁을 할 때이다. 소로우가 살던 당시에 미국은 멕시코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소로우는 이것에 반대하여 세금을 내지 않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3. 인상적인 구절

"노예제도 폐지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매사추세츠 주 정보를 지원하는 일을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정의가 자신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만약 그들이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두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자기 이웃들보다 더 의롭다면 그는 이미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소로우의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힘 없는 소수에 속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회를 기다리며 나 자신의 모습을 숨겨야 하는가, 아니면 전력을 다해 저항해야 하는가? 불의에 저항하여 즉각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떤 조직에서도 버티기가 어렵다. 대체로 기득권 세력은 어느 정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혹은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로우는 그저 한 개인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국가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까? 만약 조직적 저항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4. 읽고 나서

아직 잘 모르겠고, 나는 소로우와 같은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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