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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학의 향연
심광섭 지음 / 동연출판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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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은 오랜 시간 동안 외면받아 왔습니다. 신학을 배워야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할 수 있지만 목회자들에게도 신학은 젊은 시절 잠깐 하는 지적인 말놀이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고 목회자가 있지만 꾸준하게 자신의 신학적 소양을 넓혀 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목회자가 그러하니 교인들에게 신학은 정말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은 소수의 신학자들이 자신들만의 활동 무대에서 펼치는 관객 없는 공연과 같았습니다.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머리만 커져서 어려운 얘기만 나불나불하던 신학에 눈과 코와 귀를 달아 주고 팔, 다리를 붙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편협한 사고에 빠져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부정하던 신앙을 새로운 길로 안내합니다. 


“나는 기독교 미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앙’을 제시한다. 이 명제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을 보완하고 넘어서 신앙의 다채로운 구체성과 역동적 생동성, 보편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 (29)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앙, 그리고 기독교 미학을 통한 신학의 재구성, 예술에서 발견되는 신학과 하나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책은 전체 세 개의 큰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 ‘길’에서는 기독교 미학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1부의 2장에서는 ‘영적 감각과 신앙’에서 주로 듣는 것에 익숙했던 현대 기독교의 영적 경험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신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곱 개의 영적 감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는 ‘시간과 신앙: 하나님을 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듣고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경험하며,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보는 배움의 길에서 완전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84)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옳은 말을 듣고 옳은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는 신앙으로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부의 주제는 ‘신과 인간’입니다. 여기서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십자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여러 가지 주제가 있지만 삼위일체와 십자가를 중심 주제로 다룬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잘 보여 주는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많은데 “기독교 미학의 향연”은 미학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한 부분만 읽더라도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3부의 주제는 ‘예술’입니다. 시학적 신학, 미술신학, 음악신학, 놀이의 신학, 춤과 신학, 대중문화와 신학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의 다양한 관심과 예리한 신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고전적인 예술 분야는 기독교의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에 당연히 다뤄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신학(K-Pop을 중심으로)은 별다른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저자의 시선이 매우 신선해서 좋았습니다. 저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권위에 찬 종교적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과 섞이고 함께 노는 행복한 하나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다.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작은 생명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홀로 거룩하신’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다.” (441)


신학적 깊이와 학문적인 글의 완성도, 그리고 대중성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보기 드문 수작입니다. 저는 ‘기독교 미학’에 대해 좀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예술이라니… 참 팔자 좋은 신학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기독교 미학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여가 활동이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춤추고, 노는 와중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바쁜 꿀벌 혹은 벌꿀로 만들어 인간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일부 권력자들의 음모에 놀아났던 과거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함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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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만난 하나님 - 세상에 가득한 창조의 증거
리처드 A. 스웬슨 지음, 송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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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때 한참 동안 물리에 빠져 지냈다. 남들 다 입시 준비하는데 나는 하루 종일 물리책을 들여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왜 그렇게 물리가 좋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엉뚱한 대답같지만 F=ma와 같은 단순한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자연 현상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조화로워보였다. 법칙이 없는 곳 같은 데서 발견되는 법칙을 통해 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비법같은 것을 깨닫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매트릭스 세상을 간파하는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조화 속에서 움직이는 세상이 경이롭고 신기하고 놀라웠다. 마치 멋진 음악이나 영화에 매료되듯이 나는 이 세상이라는 커다란 시스템에 반했다. 내가 늘 보아오고 살아오던 세상이었지만, 물리는 나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었다.

 

스웬슨이 과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조차 벗어난 물리적 세계에 대해 새롭고 신선한 시선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을 통한 체험만으로 이 세상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하는 우리 몸에서 외부로 열린 창인 눈은 그 기능이 놀랍기도 하지만 너무 제한적이기도 한다. 우리의 눈은 물체에서 반사되서 나오는 가시광선만을 분별해낼 뿐이다. 세상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다. 스웬슨은 우리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 이상에서 과학이 발견해 온 수많은 놀라운 정보를 통해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고 또한 그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스웬슨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의 영역은 실로 방대하다. 소립자 세계, 심장을 비롯해 우리 몸의 내부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기관들, 놀라울 정도의 성능을 보여주는 뇌와 감각 기관, 하나의 세포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정보의 DNA, 에너지와 네가지 힘, 고전 물리 법칙에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초끈 이론에 이르는 현대 물리의 기본적인 개념, 시공간과 빛의 연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과 성경, 혹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스웬슨은 지금까지 과학이 밝혀낸 세상에 대한 경이로운 정보들을 우리에게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이 놀라운 수많은 정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과학과 신앙은 상충하고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스웬슨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니 오히려 과학과 친구가 되십시오. 그 친구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줄 것입니다. " 외과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스웬슨의 이 권면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떠한 과학의 세계와 영역에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더 넓은 이해의 폭을 제공해준다. 과학은 단순하게 보이던 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복잡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에서 가장 단순한 법칙의 존재를 증명한다. 스웬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며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과학은 우리를 '단순히 그냥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세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정보를 캐내도록 한다. 스웬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는 이 과학이라는 녀석은 참으로 성가시면서도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과학을 하기에 더 적합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게 되면 과학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닌 아주 확률이 낮은 가능성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종교가 되거나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혹은 아주 상식적인 전제를 뒤집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고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세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에 그러한 마음가짐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스웬슨은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과학자로서 모든 것을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쉽고 친절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과학은 신앙을 말살시킬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다. 오히려 과학은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런 좋은 친구를 외면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더 알고 이해하고 싶다면 그리고 더 경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한다면 과학을 놓쳐선 안된다. 그동안 과학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스웬슨을 통해 그 오해를 풀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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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1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에 빠지셨군요. 전 이과계통엔 영 젬병이었는데...이상해요. 지금 중고등학교 공부를 하라고 하면 잘 할 것 같아요. 그 시절엔 지겹고 따분하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데...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기억하겠슴다!^^

설박사 2006-03-1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아주 쉽게 쓰여진 책이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시앵티아 (Science) - 과학에 불어넣는 철학적 상상력
최종덕 지음 / 당대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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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바람이 좋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세미한 소리를 내던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내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자기만의 파동을 만들고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그 파동을 내게 전달한다. 바람의 길을 알려주는 하얀 벚꽃잎은 눈을 감으면 더 찬란하게 빛이 난다. 나는 가끔 바람을 통해 세상을 듣고 느끼고 만진다.


바람을 좋아해서 나는 바람을 공부했다. 이론과 실험,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결정하는 지배 방정식을 알게 되었고 바람의 길을 예측하며 바람의 힘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너무 제한적이라서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일부분이었고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보통 무한한 가능성과 전지전능을 기대하는 과학은 생각보다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나는 과학의 원초적 모습에 접근을 시도했다.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아닌 철학과 통합되어 있던, 앎 자체를 추구했던 '시앵티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문제를 쉽게 만들어 주거나 정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시앵티아는 개별적 존재로서 해석하고 이해했던 존재들의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또한 과학과 결별했던 철학적 사유와 질문과 상상력 등을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불러들여 문제의 난이도와 복잡성을 한층 높게 만들었다. 시앵티아는 누구나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유 인력의 법칙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왜 물질은 서로 끌어당기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과학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온 질문이다. 그런 식으로 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앵티아의 역할은 그 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인식의 확장과 과학의 발전을 선도하려는데 있다.


내가 바람이 좋아서 바람을 공부하게 된 것처럼 과학은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과학으로 인해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벗는 듯 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는 것은 50년 전에는 신에게만 가능한 시선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곳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다. 또한, 과학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단위를 찾아 원자를 쪼개고 양성자와 중성자 안에 쿼크를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사실 아직도 인간은 세상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치 바다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옛날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은 대답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저 바다 너머를 상상하고 개척해갈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두려움의 문제이다. 그래서 과학의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를 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언어로는 표현조차 힘든 창조적 상상력의 나래가 필요하다. 지금은 바닷가에서 첨벙거리면서 놀고 있지만 나는 바다 저 너머를 꿈꾸게 되었다. 닿을 수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유는 그 너머도 또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제한해 좁은 세상으로 사는 것은 자유롭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카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현시대에 과학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학과의 경계가 무너진 과학은 아마도 그 매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며 그것은 모든 예술과 과학의 근원(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scienc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인간이 과학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그 정체를 밝히고 또한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세상을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경계의 영역을 넘는 순간은 이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재밌어지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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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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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치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도킨스가 지적한대로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지적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읽고 생각해 볼만한 책이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 진화의 원동력이 그룹 선택이나 개체 선택이 아닌 유전자적 선택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론에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다윈의 '자연 선택설'이다. 자연이 생물의 진화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킨스의 유전자적 선택설에도 마찬가지이다. 유전자는 목적도 의식도 의도도 없다. 단지 계속 자기 복제를 할 뿐이고 자연에 더 적합한 놈이 살아남아서 그 형질을 보존한다. 더군다나 유전자는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다.


유전자적 선택 관점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떠나서 실제로 그의 견해는 많은 발견과 연구가 가능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이론을 충실하게 반영한 유전자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방법이 있는데 나는 사실 이 책보다 먼저 그 알고리즘을 통해서 유전자적 진화 관점을 접했다. 유전자 알고리즘을 보면 도킨스 이론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섯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생물이 있다고 가정하자. '55555', '33333', '77777'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자연 상태는 낮은 숫자일 수록 생존할 확률이 높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55555와 33333이 살아남아서 자식을 낳게 된다. 그런데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게 되므로 '33535'. '35353'. '53355' 와 같은 자식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33535와 35353이 살아남게 된다. 아마 최종적으로는 00000이라는 생물이 생존하게 될 것이다. 유전자 알고리즘은 아무 생각이나 의도없이 임의의 5개의 숫자를 발생시키게 되어 있고 그 중 더 적합한 일부만 살아남게 된다. 재밌는 것은 정말 이 알고리즘을 쓰면 최종적으로 00000의 생물이 남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유전자 알고리즘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신뢰성이 높은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잠깐 옆길로 샜는데, 바로 이것이 지극히 진화론적인 관점을 적용한 방법이다. 선택권은 유전자에게 있지 않다. 바로 자연에게 있다. 이런 관점은 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이자 자연 선택설의 기본 원리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당혹스러웠던 점은 진화를 그룹이나 개체 혹은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말을 쓸 수 있냐는 것이다. 즉, 유전자는 자신의 형질을 복사해서 남기고자 하는 본능이 있을 뿐 계속 존재하려는 의도는 없는데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도킨스는 "목적이란 생각은 어떤 경우에서나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다(p.315)"라고 말하며 목적이란 단어의 정의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동시에 약간 아쉽기도 하다. 오히려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적인 관점을 버린다면 도킨스의 이론은 더 명료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생물의 최소 생존 단위 혹은 기본 설계도에는 이기적인 생존 본능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의 이론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도킨스는 동물 행동학자이다. 이 책도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동물 행동을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의미를 축소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동물의 행동을 해석한 그의 논리가 아주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도킨스가 예외로 두었던 동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에게는 진화를 생각할 때 유전자만을 그 유일한 기초로 보는 입장을 버려한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개념이 인간의 문화를 고려한 '밈'이라는 것이다. 그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특별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인 혹은 유전자적인 관점에서만 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관점에서만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라는 말만을 가지고 마음대로 생각한다. 즉, 무생물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물이 되었고 그 생물은 어떤 방향을 향해 계속 자신을 발전시켜왔다고 믿는다. 즉, 환경을 정복하고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을 진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그 주도권이 자연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생물이 자신의 발전방향과 자식의 형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선택한 것이라는 관점이 진화론이다.


또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무생물에서 생물로의 진화,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의 진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등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왜냐면 과학이라는 학문은 실험과 관찰이 기본인데 아무도 그 진화 과정을 본 사람도 없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연히 유추와 가설을 사용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도킨스도 그 부분은 소설을 쓰고 있다. 즉, 그럴 듯한 상상만 있을 뿐이다. 또한 논리적인 비약과 우연이라는 소설의 특징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킨스는 그의 논리적 비약을 위해 '살아 있다'는 말의 정의를 흔들어 쓰러뜨려 버린다.(p.46) 다시 말해서 진화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 "Only two things are infinite, the universe and human stupidity, and I'm not sure about the former. " 과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야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신의 방법과 이론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도킨스가 그런 부담감을 버렸다면 이 책의 논리가 좀 더 명확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도킨스의 이 책의 예상 독자를 세 부류로 정의하고 있다. 생물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 전문가, 문외한에서 전문가로 이동하고 있는 학생 이렇게 세 부류이다. 도킨스가 나같은 기독교적 창조론자가 이 책을 유쾌하게 읽었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도킨스의 이론에서 새로운 관점의 유익을 배웠고, 생물학적으로 윤리의 기반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전 과학자들의 다소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이론에서 발전되고 있는 과학의 모습을 보았고 인간이 정말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생존 기계'라는 그의 진화론적 신념을 반영하기 위한 일종의 추론만 뺐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진화론 이야기가 나왔으니 창조에 대한 한 마디만 하고 마치려고 한다. 나는 웃찾사의 "잉글리쉬는 마음 속에 있는 거니까요."라는 대사를 좋아한다. 영어 해석이 그 때그때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잉글리쉬가 해석자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자연 속에 수없이 많은 종류의 살아있는 존재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가장 최적의 생물로 귀결이 안 되고 다양한 종이 분화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왜 인간으로서 다른 모든 생물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자연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주는 신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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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절 2007-10-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을 찾아보다가 들어오게 되었네요. 서평들이 인상적입니다. 저의 독서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실 듯.. ^^ 혹시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는 서평을 쓰실 계획이 없으신가요? ^^;;

설박사 2007-10-1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만들어진 신' 기회를 만들어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지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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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오스 이론은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카오스의 기본적인 개념은 가장 단순한 것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 영향력을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사고관으로 카오스 이론을 세상에 접목시켜본다면 개인의 가장 작은 행동 하나도 인류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에디의 천국' 등과 같은 소설도 이러한 영향력을 받은 것 같다. 카오스의 대표적 사례인 나비 효과는 CF를 통해서도 소개된 바가 있고, 오죽하면 카오스 세탁기라는 것도 있을까?


카오스, 즉 혼돈 이론은 그 이름에서부터 연구자들에게 좌절감을 준다. 그리고 역시나 그 연구 결과도 아직 미미하다. 뉴턴이래로 발전되어온 기계론적, 결정론적 사고관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아마도 혼돈 이론에 의해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세상은 복잡해서 알 수 없다.'


물리적 세상이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카오스가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법칙과 규칙을 발견해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노력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카오스는 단순한 예측 불가능성을 설명하지만 격변 가능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p.32-


그래서 저자는 세상의 '격변 가능성'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여기서 '임계상태'라는 것을 정의한다. 임계상태란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조건 사이에서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를 말한다. 안정화된 상태나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격변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풍선안의 나비가 수십만년 날개짓을 해도 풍선안에서는 태풍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태풍 속의 나비가 영원히 날개짓을 해도 태풍이 사그러드는 일은 없다. 안정화된 상태나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격변의 가능성은 없고 바로 그 중간인 임계상태에서만 격변이 가능하다. 재밌는 사실은 임계상태에서 일어나는 격변은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계상태에서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으로 모래더미 게임과 지진을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전혀 규칙이 없을 것 같지만 묘한 멱함수 법칙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산불, 도시의 크기, 전쟁의 사망자 수, 심장 박동 패턴, 역사적 사건 등 전혀 규칙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것에서도 이런 법칙이 성립한다.


그런 임계 상태의 법칙을 사회나 역사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멱급수 법칙이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법칙이 물리적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인간사, 세상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개개인의 미래는 결정할 수 없어도 인류 역사나 사회라는 큰 틀은 일정한 법칙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지 인류의 미래가 역사와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혼돈 그 자체여서 전혀 알 수 없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하는가? 과학은 현대 사회에 가장 추종자가 많은 종교라 할 수 있다. 전혀 규칙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곳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것은 과학자들의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분명히 규칙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과학계의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법칙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는 했다. 과학적 물리적 법칙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렌즈 역할을 해온 것이다. 과학적 발견과 혁명의 영향은 단지 과학의 영역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현대인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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