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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로부터 분리된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것은 나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인에게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매트릭스 세계를 진짜라고 믿고 있는 네오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불행하게도 나는 네오를 매트릭스에서 빼내 줄 알약이 없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어떤 사람에게 알려주시는데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그러니 계시가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참 맥이 많이 빠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신비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매트릭스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인 모델을 갖는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좋은 학교에 들어간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 중 하나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결국 죽어야 하는 걸까? 사실 이 부분보다 사람을 더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고통당할 때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한 세계로 가는 하나의 출입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정말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출입구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낸시 피어시를 통해서 또 다른 입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라는 입구였다.
이 책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기념비적인 책이 될 것이 분명한데 이유는 그 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고 내 안에 계속 담아만 두었던 나의 태도의 180도 변화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그냥 속으로 '그건 아닌데요'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었다. 피어시는 "복음전도는 불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과 실제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돕는 데서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도할 때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그렇게 꽁꽁 숨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믿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이야기는 나도 하나님께 종종 요구하는 내용이다. "아니 사람들한테 짠 나타나시면 될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무식한 전도라는 방법으로 나를 고생시키십니까?" 결국 나의 이런 짜증 섞인 불만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냥 사람들에게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나게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도는 너무 무식하고 계시 외에는 사람을 일깨워줄 방법이 없는데 보통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언젠가는 혼란스러운 인생의 때가 오면 그 때는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표를 하나 그렸는데 그것은 가치와 사실 영역에 관련된 표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자연주의는 가치 영역에서는 의미가 없고 유익하지 않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는 가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유익하고 실용적이고 의미가 있지만 사실 영역에서는 그 진위 여부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피어시가 이 책의 제목을 완전한 진리(Total Truth)라고 정한 이유는 그 동안 기독교가 가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사실 영역을 자연주의에게 완전히 내어준 듯한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가치적인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진리임을 그래서 하나님의 이야기,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한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다. 즉, 가치 영역과 사실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진리여야만 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낸시 피어시가 위험하다고 말한 바로 그 위치에 내가 서 있었다. 즉, 기독교가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치적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피어시가 예를 든 미국의 실용주의를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기독교가 상층부의 영역 즉 가치 영역에서만 위치하려는 경향은 신학적인 흐름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온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이라는 가치 뿐이라는 주장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다.
나의 위치를 알게 해 주고 나의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지도와 좋은 책의 공통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내가 있어야 할 올바른 장소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잘못된 장소에서 헤매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해서 창피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세계관을 통한 복음 전도 방법은 '아니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왜 한 번도 해 본적인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복음 전도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나의 삶의 한 부분만 차지하고 전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향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앞으로도 '완전한 진리'라는 낸시 피어시의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견해는 내게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나를 격려해주고 힘을 줄 것 같다. 내가 나중에 쉐퍼처럼 시골 촌구석에 살면서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집에 온 사람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쉐퍼의 제자인 '낸시 피어시'와 이 책 '완전한 진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