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나니아 나라 이야기 그 여섯번째 이야기 '은의자'를 꼭 읽어봐야 한다. 은의자의 여행 안내자로 끊임없이 비관적이고 재수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퍼들글럼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퍼들글럼의 이야기는 정말 멋졌다. 나도 순간, 유스터스와 질과 함께 "퍼들글럼 만세"를 외쳤다. 이 극적인 순간은 미리 이야기해주면 재미가 없으니까 직접 확인해보시기를.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지극히 기독교적인 책이라는 것은 여기서도 여러 가지 모습에서 드러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5권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할 때도 되었다. "아슬란이 직접 나서면 안 되나? 왜 꼭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어려운 일을 시키는 걸까? 제대로 잘 하지도 못 하는데 말이지." 은의자에서도 아슬란은 어린 소녀 질에게 임무를 주지시킨다. 네 가지를 순서대로 해야하는데 질과 그의 일행들은 계속 아슬란의 표시를 놓친다. 그래서 결국 아슬아슬한 순간에 아슬란이 나타나서 도와준다. (헉, 그래서 아슬란인가? ^^) 아마 아슬란은 질, 유스터스, 퍼들글럼이 헤맬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슬란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왜 자주 안 나타나고 급박한 상황에서만 도움을 주는지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이었다. 하루는 아내과 아이와 함깨 팥빙수를 같이 먹게 되었다.  우리 아이는 아직 두 돌도 지나지 않은 상태라서 숟가락질을 잘 못한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에게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아이는 팥빙수를 떠먹다가 옷과 테이블에 흘렸다. 그러자, 아내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말하며 아이의 얼굴과 손, 옷에 묻은 것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 상황이 흥미로웠다. (내가 이런 식으로 관찰을 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흘릴 줄 알았으면서 왜 숟가락을 쥐어주었을까?


숟가락은 참 중요한 도구이다. 잘 먹고 잘 사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가 성장하고 독립하기 위해서는 꼭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도구이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슬란도 아이들이 성장하고 독립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임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과 독립이 아슬란에게는 더 큰 관심사일지도 모른다. 아슬란이라면 한 방에 해결할 문제 아닌가. 성경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에게 숟가락을 쥐어주는데 사실 숟가락이라기보다 칼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왜냐면 위험하니까. 그것은 '자유의지'라는 칼이다. 결국 인간은 그 칼을 하나님께 들이대다가 쫓겨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유 의지가 있어야만 인간의 사랑은 고귀해지고 인간의 노동은 숭고해진다. 원해서 하는 사랑,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일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단지, 인간은 호르몬 분비에 의해서 조작되는 화학물질 덩어리, 프로그램된 로보트 혹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유의지라는 것을 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닐까?


퍼들글럼의 태도는 기독교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용기있는 삶을 위해서 꽤 괜찮은 태도인 것 같다. 퍼들글럼이 혼자서 재수없는 소리는 다하지만 또 혼자서 용감한 행동도 다 한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얘기했다. "난 항상 최악의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 다음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오." 그래서 그런지 정말 말도 안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만을 이야기한다. 거의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태도가 좋은 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항상 실제 이야기는 최악보다는 나은 상황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태도, 아마도 그래서 퍼들글럼이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독교적인 책이니까 비기독교인들은 읽으면 안 될까? 나는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는 패러독스-모순인 것 같으면서 진리-가 넘치는 종교이다. 그런데 동화책은 아무래도 그게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분명 성경책으로 보았으면 "말도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무리없이 넘어갈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나니아 나라 이야기들을 읽으면 성경을 표절한 줄거리 때문에 스토리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다.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도 예측가능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저것을 언제 우리 아이에게 읽어줄 수 있을까? 나니아와 아슬란, 퍼들글럼을 언제 소개시켜줄 수 있을까? 흠, 우리 아이도 나처럼 퍼들글럼의 매력에 빠져들겠지? ' 우리 아이는 아직 두 돌도 안 되었는데 이런 성급한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부모로서 아이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과 소년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3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칸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별이 수놓은 밤하늘과 진실이 수놓은 가슴이라고 했다.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래서 가끔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가로등조차 없는 그런 곳에 가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그런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지구라는 섬에 떨어진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캄캄해서 주위 사물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나의 사고는 우주 공간까지 확장된다. 마치 낮에는 지구인이었다가 밤에는 우주인이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우주라는 건널 수 없는 바다 그 너머에 지구보다 훨씬 광활한 세계가 분명 존재하지만 나는 그 세계를 동경하듯 바라볼 뿐이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번째인 '말과 소년'에서 별이 촘촘히 떠 있는 한밤중에 말을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샤스타라는 한 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노예로 팔려갈 위험에서 도망하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 이유는 밤하늘의 별과 자유를 찾아 달리는 한 영혼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년의 이름이 샤스타(Shasta)인 것도 우연은 아니니라. 덕분에 개인적으로 나니아 나라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었다.

샤스타를 나니아로 인도하는 것은 나니아에서 살던 '브레'라는 말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유를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자유의 나라 나니아와 그 나라에서 살던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는 브레 덕분에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샤스타와 그의 일행이 사자에게 쫓기는 부분이다. 그 때 샤스타는 가던 길을 멈추고 사자와 대항하지만 브레는 계속 도망친다. 그 순간 때문에 브레는 자책감에 빠져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에겐 노예 생활이 어울려. 나니아의 자유로운 말들 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 암말과 어린 여자 애와 사내애를 사자 밥이 되게 내버려 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 게 바로 나라고!"


나는 브레한테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브레, 자유란 그냥 네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니? 그런데, 네가 자유로운 말이기 때문에 더 괴로운 거야?" 아마 그런 듯 했다. 자유로운 말이기에 위험한 순간에 용기를 내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브레를 더 부끄럽게 한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로서 브레의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했다. 진리라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실상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봐도 금방 두 말씀 사이를 연결할 수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사람을 자유케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교리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자유와 구원이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 교리는 방종을 조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있는 질문 중에 하나가 "자유가 선을 격려할 수 있는가"이다. 즉,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이 선을 행하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유로운 말 브레의 태도를 보고 오래된 질문이 떠올라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일단, 자유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를 한다면 브레가 괴로워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먼저, 브레가 도망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브레는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즉, 그는 자유가 없는,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정말 자유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말은 곤충으로 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변했을 때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말은 말이어야 하고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장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브레 때문에 너무 고민을 많이 했다. 덕분에 자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유가 방종을 조장한다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좀 더 할 말이 생겼다. '말과 소년'은 이 외에도 볼거리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나니아 나라 이전 편에 비해서 스케일도 커지고 재미도 더해졌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나니아의 창조자 아슬란을 짐작해보는 것도 흥미를 더해 줄 것이다. 그리고, 노예처럼 살던 샤스타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마지막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데 그 장면 또한 흐뭇하다. 아슬란과 샤스타가 만나는 장면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들이 새로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의 영혼을 자극할 만한 책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C.S.루이스는 동화 작가도 아니고 그가 주로 낸 책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들을 고민해서 논증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그가 과연 '재미있는 판타지 동화를 쓸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읽고 나서 C.S.루이스의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통해 나의 영혼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다면 별빛 아래 사막의 차가운 공기 속을 샤스타와 함께 달려볼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어린이들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7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직장을 그만둔지 3주 정도 되었나 보다. 직장을 그만두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는 왠지 모를 중압감과 함께 지독한 감기와 어지러움증에 시달리고 있다. 몸 상태는 조금 안 좋은 지점과 아주 안 좋은 지점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왔다갔다했고 건강이 안 좋으니 마음 상태가 가벼워질 리 없다. 일단,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조금씩 읽어 나가던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고 어느덧 마지막 편을 읽게 되었다.


'마지막 전투'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완결편이다. 제목만 보고 책 내용을 짐작했을 때는  나니아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아슬란이 다스리는 영원히 평화로운 나니아의 모습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마지막 전투로 나니아는 다른 나라에 점령당하고 그 이후 나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완전히 멸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나니아 나라의 멸망 이후 나니아보다 더욱더 경이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아슬란은 그 세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면서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마친다.


"이제 다 끝난 거지. 축제가 시작된 거야. 꿈은 끝나고 이제 아침이 된 거다."


나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이렇게 끝날 줄 상상도 못했다. C.S.루이스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동화책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상당히 논란 거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인류 종말과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해 C.S.루이스의 철저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판타지 동화이기 때문에 작가의 허무맹랑한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이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은 "판타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독자들은 판타지를 읽음으로써 친숙하던 것들에서 놀랍고 새로운 뜻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즉, 판타지는 어떤 존재의 눈에 보이는 외관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적 가치를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그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판타지가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실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위장해서 내면을 숨길 수 있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는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존재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나는 마지막 전투를 통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C.S.루이스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진리와 진실,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C.S.루이스의 도움으로 나는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과 이 세상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켄타우로스 룬위트는 숨을 거두는 순간 "모든 세계에는 종말이 있으며, 고귀한 죽음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는 귀한 보물"이라는 말을 남긴다. 나니아라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꼭 죽게 마련이다. 나니아가 멸망하고 나니아 사람들이 죽는다면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C.S.루이스는 "그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항상 새로운 장이 그 이전 장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 아니 끝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니아 나라 멸망 이후에 더 깊고 더 높은 곳에 영원히 존재할 나니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C.S.루이스는 이 나라를 묘사하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곳에 있는 과일 맛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다른 과일과 비교해서 기껏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과일을 먹고 나면 이제껏 먹은 가장 싱싱한 자몽도 그저 그래 보이고, 가장 즙이 많은 오렌지도 말라 보이고, 입에서 살살 녹는 배도 딱딱한 나무껍질같이 느껴지고, 가장 달콤한 산딸기도 시큼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세상의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가장 멋진 풍경이라고 해도 그 세계에 가게 되면 그저 그런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나니아의 묘사가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성경의 잠언서에 보면 '아굴의 기도'라는 것이 나온다. 중학교 때 처음 읽고 알게 된 부분인데 내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아굴은 이렇게 기도한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나는 이 기도가 멋있어 보이면서도 이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게 된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정말 많은데 그것들 한 번 누려봐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니아 이후의 영원히 지속될 나니아가 존재한다면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세상에 좋은 것으로 내 입에 넣어 보려고 내 눈을 채워 보려고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이라도 새로운 나니아에서는 시시한 것이 아닌가? 단지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아굴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런 세계가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나니아, 영원한 나라 나니아의 존재를 믿는다.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나는 이 세상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서 몸이 많이 회복되었고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체스터턴은 "완벽한 힘에는 일종의 가벼움,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고 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C.S.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야말로 그런 완벽한 힘을 가진 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나도 그 힘을 조금 얻은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읽기로 결심한 것은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고 나서였다. 그 책을 통해 판타지 소설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경험은 판타지 문학뿐만 아니라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이유는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도 알아가기 빠듯한데 허구 세계까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자 일종의 시간 낭비라고 여겼다. 또한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야기했듯이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재밌는 세계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판타지 소설이 내 주의를 끈 것은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 마치 현실처럼 나타나는 제2의 세계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부흐하임이나 반지의 제왕에서의 중간계(The Middle Earth),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나니아처럼 판타지는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 또 다른 세계가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판타지가 완전한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나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고 판타지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판타지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실존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르귄이 "판타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이다."라고 판타지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것과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판타지 문학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가치를 인식해서 나타내주는 일종의 내면적 가치를 향해 열려져 있는 눈이다. 따라서 나는 3대 판타지 문학 중 하나인 C.S.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보고 싶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두번째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C.S.루이스가 처음으로 쓴 나니아 이야기이다.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들어간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나니아의 창조자는 사자 아슬란이었지만 네 아이가 나니아에 이르렀을 때 그 곳은 하얀 마녀의 지배를 받아 끝도 없는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슬란이 돌아왔고 그의 죽음을 통해 에드먼드의 생명을 구하고 네 아이는 예언대로 나니아의 왕이 된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기 전에 이 책은 루이스가 기독교 교리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라는 이야기를 귀따갑게 들어왔던 터라 줄거리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기독교나 성경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읽게 되면 상당히 독창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인인 내가 보기에는 루이스가 다소 억지로 끼워 맞춘 부분이 있지 않나 싶은 부분도 꽤 있었다. 그러나,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의 앞부분에서 루이스가 나니아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부분을 읽고서 다시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를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동화책을 지은 것이다.


루이스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의 가장 상위 단계의 내러티브이다. 즉, 루이스는 창조, 인간의 타락, 죄의 능력과 그 대가, 구원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성경의 가장 큰 흐름을 그의 책에 반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세한 이야기들은 풍유나 비유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단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도구에 불과한 듯 하다. 따라서,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을 기독교 교리에 연결시켜보려고 했던 것은 나의 실수였다. 나이 50이 넘어서 저명한 영문학자가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책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단지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한 전도용이라고 여기고 던져버리기 전에 무신론자였던 그가 알게 된 진리의 힘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순전한 기독교를 비롯한 주옥같은 기독교 변증서를 펴 내던 그가 다소 유치해 보이는 동화책을 펴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그것은 그가 알게 된 진리에 대한 강한 긍정이다. 변증하고 논증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찾아서 변호해야 할 진리가 아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대로의 진리를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누가 동화책의 내용을 따지고 들 수 있는가? 단지 읽던가, 읽지 않던가 둘 중에 하나일 뿐이다.


사실 내게는 다소 뻔한 줄거리보다는 루이스가 묘사하는 아슬란이 나타나기 이전의 나니아의 모습이나 의심하는 에드먼드, 아슬란을 묘사하는 비버의 말 등이 더 인상적이었다. 아슬란이 나타나기 이전 나니아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겨울의 시간 속에 있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 보이고 정리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생명력이 없는 차가운 모습, 아마도 루이스가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일 듯 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 좋은 편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하며 아슬란을 의심하는 에드먼드의 모습 역시 루이스의 모습과 딱 어울린다. 그것은 단지 루이스의 모습일 뿐 만 아니라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의심하며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비버의 말이었다. 나니아 나라의 비버는 아슬란을 만나는 것이 안전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안전이라고요? 지금 우리 집사람이 한 말 못 들었나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죠? 당연히 안전하지 않아요.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 분은 왕이신걸요." 내가 느끼는 진리 혹은 신이 그렇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가끔 잠자리에 들 때나 어둠 속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설까봐 겁이 난다. 비버의 말에 절대 동감이다. 루이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다가온 순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우는 헤겔주의 숲에서 쫓겨나 이제 빈터에서 세상의 모든 불행을 안고 달리고 있었고, 몸은 흠뻑 젖고 지친 상태이며, 바로 뒤에선 사냥개가 따라왔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이제 한패였다." - 예기치 않은 기쁨, C.S.루이스 -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루이스는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모든 지식 체계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허물어야 했을 것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단지 아이들만 읽는 책이라고 하기에는 그 사상이 너무 심오하다.  그러나, 그 심오한 사상을 다 헤아리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재밌게 읽으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특별히 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어린 나이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에 일종의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핵폭탄은 폭발 당시의 위력보다 후폭풍이나 낙진을 통해 더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단지 재미있다, 재미없다로 끌날 수도 있지만 나중에 후폭풍을 비롯한 영향력은 언제,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른다. 즉 어린 시절에 읽는 책은 바로 프로이트나 융이 말한 인간의 잠재의식을 형성하는 커다란 한 부분이 될 것이고 그것이 언젠가는 의식의 영역으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비롯한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를 역동적이고 재밌게 또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나니아 나라 이야기와 같은 양질의 도서로 마음에 폭발을 일으킨다면 두고두고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서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라... 다소 촌스러운 제목이지만 나는 루이스라면 아무 생각없이 제목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의 판타지 소설을 비롯한 소설이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이지만 나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단 이 책의 주인공은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아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주인공은 단연코 사자이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횟수가 적다고 하더라도 항상 책은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아마,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1권부터 7권까지 모두 읽게 된다면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아슬란이 언젠가 당신을 초대할지도 모른다. 그 때 어리둥절해하지 말고 그가 아슬란인 것과 당신이 초대받은 세계가 자유의 나라 나니아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라 2005-09-2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설박사님. 아라입니다. 설박사님 서재는 처음이고요.^^ 저도 이 책 '사자와 마녀와 옷장' 을 읽고 리뷰를 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리뷰들 중에서도 특히 이 책의 리뷰에 관심이 많이가요,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설박사 2005-09-30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아라님. 저도 아라님 리뷰 읽어보았습니다.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재미있는 책이죠?
종종 들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

은총알 2005-09-3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이거 예전에 읽고 재미있다고만 생각 했는데.... 음..같은거 보고 무쟈게 다르다..

설박사 2005-10-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가 더 재밌게 읽으시던데... ^^

날개 2005-10-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서평 이벤트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우수리뷰로 뽑히셨어요..^^*

설박사 2005-10-2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날개님.. 오랜만이여요.. ^^

JelicleLim 2007-09-1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그에 관련된 글을 찾던 중 이 곳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루이스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가던 중이고, 여기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설박사 2007-09-17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