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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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공회대 전인권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전기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다. 그는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한국문화의 구조적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던 중 “한국은 무슨 한국이냐, 먼저 너 자신의 꼬라지나 정확히 알아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자란 그 자신이 벌써 한국적이요, 권위적인 인간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한국문화의 구조적 특징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접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탄생’은 이렇게 해서 쓰인 한 정치학자의 치열한 자기탐구서다. 5세부터 12세까지의 유년기를 통해 한국 남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핀 독특한 저작이다. 사회과학이 주관적 경험을 배제하고 객관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분야라면, 이 책은 그런 사회과학의 전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정 개인의 주관적 경험 분석을 통해 한국문화 전체를 조명하려는 시도로는 아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남자의 탄생’은 개념과 이론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도표와 수치로 포장하지 않아도 뛰어난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아버지는 가장의 의무와 책임감을 가진 존재이자 가정내 질서의 근원이었다. 아버지와 자식간에는 엄격한 상하의 질서가 지배했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 제 얼굴을 잊어버린 채 살아야 했다. 전교수 가족의 사례는 한국의 평균적인 가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국가가 확대된 가족[國家]으로 받아들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전교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국가와 세계질서의 대변자였다.  

 

어머니는 그 질서에 복속된 존재로 남편과 자식들에게 제 정체성을 의탁한 존재에 불과했다. 저자는 196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의 경험은 바로 한국인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같은 가족질서는 학교·회사·군대 등 한국 사회를 이루는 여러 집단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 한 가족의 이야기는 결국 한 국가와 사회의 구조와 문화로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저자는 스스로를 ‘동굴속 황제’라고 부른다.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진보·자유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봉건적 권위와 신분질서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동굴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비로소 자신의 가족이 행복해지며, 나아가 한 사회에 민주적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네 아버지를 살해하라”는 말로 정리한다. 물론 이는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 살해’다. 전교수의 저작은 한국 사회가 경험해왔던 ‘문화코드’의 저류를 추적함으로써 앞으로 지향해야 할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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