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참 우리 고전 5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돌베개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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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다리의 학과 검은 깃의 까마귀가 제각기 자기 천분을 지키며 사는 격이며, 우물 안 개구리와 작은 나뭇가지 위 뱁새가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양 으스대며 사는 꼴이다.” 18세기의 지식인 박지원은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주자학에 대한 숭배에 빠져 스스로 정체(停滯)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그와 동시대의 지식인 박제가는 이같은 비판을 넘어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방법을 제시한다.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명저로 널리 알려진 박제가의 ‘북학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도모할 세목들이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는 ‘조선사회 개혁론’이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이용과 후생 가운데 한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로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게 된다”고 말한다. 이용과 후생보다 ‘정덕’(正德)을 근본으로 보았던 조선사회 주류 전통을 부정하고,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단적 주장이다. 이같은 박제가의 ‘개혁론’은 ‘북학의’를 구성하는 ‘내편’과 ‘외편’, ‘진소본 북학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편’은 중국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관찰한 기록이다. 수레와 배, 벽돌과 기와, 자기와 주택, 창호, 교량, 목축, 소, 목재, 철, 화폐 등 중국문명의 기저를 이루는 생활 필수품의 목록과 이들의 쓰임새, 생산과정에 대해 거의 르포작가에 버금갈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외편’은 일종의 개혁의 구체적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밭을 개량하고 거름을 만드는 ‘농업이론’에서부터 농업과 잠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책략, 과거제도 개혁론, 중국과의 통상외교, 군사론 등을 펼치고 있다.

개혁사상가로서 박제가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마지막 편인 ‘진소본 북학의’ 역시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과 함께 개혁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조선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던 양반의 도태까지 서슴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세계화의 진전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18세기 사상가의 급진개혁·개방론을 읽는 맛은 각별하다. 박제가가 제시한 근대개혁론이 조선사회에 수용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 더 실감나는 것은 그의 주장이 갖는 현재성이다.

그는 경이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봤지만, 그것을 당대 조선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개혁의 정신으로 바꿀 줄 알았다. “만나기 어려운 것은 성스런 군주이고, 아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에 닥친 절호의 기회입니다.(…중략)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힘을 다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할 때 우리도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직책을 맡은 신하가 태평성대를 아름답게 꾸밀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염려합니다.” 그의 염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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