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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 한미동맹과 전시작전권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김종대 지음 / 나무와숲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의 대외관계를 좌우하는 키워드는 ‘사대교린’(事大交鄰)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는 ‘사대’ 이고, 일본과의 관계는 ‘교린’이었다. 하지만 사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 정치경제적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건 이슬람권에서 ‘메카’가 있는 사우디와 다른 이슬람국가와의 관계와 유사한 지도 모르겠다. 물론, 관계의 강도는 한중관계가 더 높았겠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유교의 종주국에 대한 존중의 표현에 가깝지 국가적 독립을 실질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웃 나라와의 친교를 뜻하는 교린은 다분히 해당 국가를 중국보다 한 수 아래에 두는 수평적 관계를 지칭했다. 사대교린은 필연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속국자주’라는 모순적인 대외관계를 만들어냈다. 속국이면서 자주권을 가진 관계라니,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바로 그것.
문명개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대정봉환을 거치면서 막부권력이 붕괴하고, 천황제가 근대적으로 부활되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외교문서에는 ‘천황’이 등장했다. 일본이 생각하는 국제관계는 ‘만국공법적 세계’, 곧 주권국가가 동등한 지위에서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이었다. (설사 만국공법적 세계가 실제의 세력관계를 반영하지 않은 허구의 세계라 할지라도) 일본은 만국공법적 체계를 근대적 외교패러다임으로 인식하고 이를 조선에 강요했다. 바로 이 지점이 한중일의 근세가 침략과 전쟁, 불평등 조약과 저항으로 얼룩지는 대목이다. 조선에 대해 속국이면서 자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중국, 중국을 ‘사대’하는 국가인 조선은 중국의 ‘천자’와 양립하는 ‘천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늘의 아들이 두명이나 있겠는가. 거기에 만국공법적 세계에서 조선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마당에 청나라가 왜 개입하는가라는 일본의 대외인식이 개입되면서 한반도의 이들 두 국가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청일전쟁이 필연적으로 예비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중국과 조선의 대외관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사대교린/속국자주’가 근대적으로 재편되지 않는 한 조선의 근대적 대외관계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오카모토 다카시가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에서 펼치고 있는 논리다.
이 책과 거의 동시에 김종대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를 읽었기 때문일까. 두 책에서 내가 얻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사대교린/속국자주라는 모순적 패러다임에 안주하며 근대개혁을 소홀히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후 한미관계는 한미동맹/주한미군의 우산 속에서 전개되며 한국의 외교안보는 정체되어 왔다. 조선이 사대교린을 넘어 근대적 외교관계, 근대적 국가주권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듯이, 지금의 한국사회는 ‘한미동맹’을 재편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노무현은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권의 운명을 걸고 도전했던 대통령이었다. 노무현이 “시대의 문턱”을 넘었다는 김종대의 평가는 바로 이 점을 의미한 것이다. 이라크 파병, 한미동맹 재조정, 전시작전권 전환, 주한미군의 감축과 전략적 유연성, (협력적) 자주국방, 동북아 균형자론, 남북정상회담 등 노무현 시대 내내 논쟁과 이슈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과제를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뼈대만 간추려 보자. 노무현 정부는 북핵위기와 이라크 파병이라는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출범했다. 이 책에도 잘 나오지만 이라크 파병은 북핵으로 야기된 한반도 전쟁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지렛대였다. 네오콘의 강경책이 지배하는 미국은 공공연히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언급하는 상황.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대북공세를 누그러뜨리고 한반도내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한국 외교안보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범위’를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을 두고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어찌보면 '미국이라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평화의 대안으로 “동아시아 지식인과 민중의 연대”니 하고 떠드는 일부 진보의 담론은 ‘농담’에도 이르지 못한 한심한 얘기다. 그러나, 과연 노무현의 이런 전략은(사실은 이종석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미국의 강경책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북핵문제의 해결도 북미관계의 질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 아닌가. 부시의 대북강경책은 결국 이라크전이 수렁에 빠져들면서 제기된 비판 속에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노무현의 외교안보 전략은 ‘한반도 문제의 한국 주도권 확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 국가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주권국가가 아니다. 노무현은 박정희 이후 사라져버린 ‘자주국방’을 공론화하면서 한미동맹을 재조정하려 했다. 자주국방은 국방을 중시하는 보수적 담론과 자주를 중시하는 진보적 담론이 뒤섞인 이차방정식의 구조. 이것은 보수언론이 쏟아낸 것처럼 한미관계의 파탄, 안보위기가 아니라 50년이 넘은 한미동맹을 변화하는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맞게 갱신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불가피했다. 미군이 전세계의 미군을 재배치하고 신속기동군화(GPR:Global Posture Review)하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에게는 조만간 주한미군 감축으로 현실화될 터였다. 언제까지 주한미군에 국가의 존립과 방어를 의지할 것인가.
네오콘의 강경파 롤리스가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해온 다음부터 벌어지는 청와대와 국방부, 군 내부의 논쟁과 미묘한 갈등이 이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전략적 유연성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미래의 한중관계를 포함하여 동북아의 평화와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했다. 중국 원바자오와 일본의 고이즈미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은 앞으로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 "나는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가진 군대로 전환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있는 한 그러한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싼 청와대 내부의 극심한 논란과 갈등은 노무현의 청와대가 대통령의 인식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사례일 것이다.
한미동맹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국방개혁2020이었다. 전쟁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나라는 주권국가가 아니다. 미군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국방은 이제 한국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국방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고민과 모색의 산물이 국방개혁2020이다. “국방개혁은 본질적으로 국방력을 더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군의 ‘자주적 방위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미 북한을 압도한 한국의 국력이 주변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시대를 여는 국가적 역량이 바로 ‘자주적 방위역량’이다. 자주가 없는 국방개혁은 목표와 방향성이 상실된 맹목적 개혁 지상주의가 되고 만다. 또한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자주란 만용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군사적 감상주의다.”(p. 562) 국가주권의 핵심적 조건으로서 군사적 자주와 그것을 위한 개혁, 노무현이 넘은 시대의 문턱은 바로 이것이다.
임기 후반기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공부’에 천착하면서 점점 역사철학자가 되어 갔다. 그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라기 보다는 자신이 딛고선 위치가 어디인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어디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도자였 다. 임기 후반기의 그가 쏟아낸 말들은 그 자체로 정치학 개론이자 한국정치사, 언론학 개론이자 한국언론의 정치경제학, 국제관계론이자 동북아 평화 안정론이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선가 그가 펼치는 담론을 두어시간 동안 들으면서 가장 생생한 역사철학과 정치학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석학적 대통령’이라는 찬사 아닌 비아냥을 했던 것이 기억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펼쳐 보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이게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자 역량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 없이도 대통령 하는 사람 참, 많지 않은가. 이 책에서 김종대는 ‘대연정론’을 이런 역사철학적 고민의 소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그의 이해방식이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현실정치에서 그것이 발휘했던 효과와 역풍을 빼자면 말이다. 어쨌거나 역사철학자로서 노무현이 끝까지 고민하고 넘어서고자 했던 것은 외교안보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그것의 핵심 중 하나는 자주국방이었고.
그러나, 겨우 문턱을 넘은 이 새로운 자주국방의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본인 입으로 전작권을 환수하겠다는 이상희 합참의장은 나중에 이를 번복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 국방장관이 되어서는 전작권 환수 연기를 외친다. 노무현 국방개혁의 핵심인 국방개혁2020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보수언론은 입을 모아 전작권 환수 연기를 떠들어 대고, 국방개혁에 대한 담론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군 자주화를 지지해 왔던 예비역 장성들은 한 때 그들이 금과옥조로 신봉했던 ‘자주국방’이라는 말 자체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작권 전환을 목청 높여 반대하는 지도급 예비역 장성들은 과거에 국방개혁을 반대했고, 군정과 냉전의 영속을 바라마지 않았던 인물들이 다수다.”
이 책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바로 이같은 한국군의 모습이다.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분석하라는 노무현의 주문에 국방연구원은 육해공군의 엄청난 압력과 로비에 시달린다. 이미 수십년 간 북한의 10배가 넘는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북한보다 전력이 뒤진다고 써달라는 한국의 군대. 그래서 나온 결론은 육군은 열세, 해공군은 대등 혹은 다소 우위. 주한미군이 감축되면 금세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군대. 그러면서도 2차대전 이후의 온갖 재래식 무기부터 최첨단 무기까지 거느리고, 수많은 재래식 전력 중심 부대를 운용하면서 ‘승진할 자리’를 만들어내는 군대. 군인으로서의 소신은커녕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는 저 숱한 ‘똥별’들, 이 책에는 이 똥별들이 만들어내는 추악한 냄새가 진동한다.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냉전에 사로잡혀 있는 인식의 불구자들, 백령도 천안함 침몰도 이런 후진적인 군대의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외교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보이는 외교부의 면모는 조직이기주의와 관료주의, 게다가 국익보다는 주재국 혹은 자신이 주재했던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때로는 대통령까지도 기망하기를 서슴지 않는 모습이다. 정부의 모든 업무평가에서 꼴찌를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최고의 인재집단이라는 착각이 매우 심한 사회. 이종헌 외교부 조약과장의 평가는 기억할 만하다 : “우리는 대통령이 정책을 결정하면 절대 복종한다. 그러나 외교부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기준대로 움직이고 거짓말하고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외교부의 습관이다. 외교부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p. 254) 주한미군 감축과 이전비용에 대해 노무현을 속이려 들던 반기문 장관은 노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하자 “외교부 역량이 미치지 못할 때 대통령께서 명쾌한 지침을 주셔서 앞길을 가르쳐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한다. 반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은 절대로 그의 역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 덕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외교부와 NSC가 국정상황실과 벌인 청와대 내부의 ‘전쟁’이다. 노무현을 기망하고 한미간의 쟁점을 은폐하려 했던 외교부와 NSC. 그리고 이 암투의 과정에서 환멸을 느끼고 정부를 떠난 권계현. 전언에 의하면 외교부 출신인 그는 지금 삼성 상무로 재직하고 있고, 자주파로 불린 이종헌도 시련을 겪다가 좌천되고 말았다. 이 문제를 취재했던 후배기자가 특종기사를 들고 왔을 때, 나는 ‘대통령 기망’이 뭔지 이해를 못했다. 이제 보니 그 후배는 국정상황실에 ‘빨대’를 두고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청와대 내부의 전쟁과 그 전쟁의 와중에 언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위해 ‘활용’되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청와대가 가진 조정과 통합의 능력이 대단히 취약했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참여정부의 외교안보 상의 혼란과 논쟁은 소수자 정부가 넘어설 수 없었던 한계로 평가하고 싶다. 정작 외교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군과 외교부는 저항하고, 보수언론은 연일 폭탄을 터트리고, 미국은 딴지를 걸며, 대통령은 외롭게 몇몇의 행정관들과 함께 상처입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상황.
나는 곳곳에서 탄식하고 분노했다. 참여정부 시절, 저자는 함께 술을 마실 때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 놓고는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술자리 방담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고, 하나의 줄거리로 완성되었다. 아, 그래서 김선배는 그런 얘기를 했었구나,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뒤늦은 자각. 그가 술자리에서 전해준 말들은 이제 보니 하나같이 ‘특종감’이었으나 둔한 내 머리로는 도무지 맥락이 그려지지 않았다. 네오콘의 한반도 담당 행동대장 쯤 되는 롤리스가 한번 한국에 왔다가면 조중동은 ‘한미동맹’이 파산 직전이라며 대서특필을 해댔다. 노무현은 외교 아마추어였으며, 한반도에 안보공백을 만들어내는 얼치기였다. 참여정부 시절, 조중동의 한미관계 보도는 한마디로 그악스러울 정도로 심했다. 이들이 매일이다시피 쏟아낸 저주와 폭론들은 가뜩이나 취약했던 한국의 대미협상력을 위태로울 정도로 약화시켰다. 반노무현이라는 ‘맹목’으로 인해 그들은 아예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이 참여정부 시절 독극물이었던 것은 맞다.
사건이 터지고, 암투가 벌어져도 누군가는 그것을 기록한다. 그래서 역사는 무서운 법이다. 참여정부 외교안보 현장에서 벌어진 중요한 일들은 김종대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외교안보의 대전환기에 터진 숱한 이슈와 쟁점들은 격렬한 토론속에서 좌초되기도 했으며, 조금씩 진전되기도 했다. 김종대는 그것을 차갑게 혹은 뜨겁게 기록하고 있다. 참여정부 청와대의 유일한 민간인 출신 국방전문가로서 이제 그는 뛰어난 글쟁이로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외교안보라는 재미없는 주제의 책을 그는 무협지처럼 재밌고,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 놓는다.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같다. 누군가 참여정부가 외교안보에 대해 어떤 일을 했던가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서슴없이 이 책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내게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상당수 사람들이 자신들은 전작권 전환을 반대했다고 써달라고 사정하더라고 전했다. 정권이 바뀌면 소신도 바뀌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모양이다. 놀라워라, 그런 그들 대부분이 ‘장성’들이다. 그래, 기록의 목적은 기억하기 위함이다. 이제 사람들을 기억하자. 시대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고민했던 노무현, 군기득권 구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전을 만들어갔던 윤광웅, 안광찬. ‘가짜 자주’를 넘어서려 했던 자주파 외교관리 이종헌과 권계현. 소신과 논리를 갖춘 보수 김희상. 그리고 반대편에 선 숱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야할 것은 조중동,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김정안 기자 같은 사람이다.
동아는 2004년 미국기업연구소(AEI) 같은 네오콘 싱크탱크의 입을 빌려 특집 시리즈로 노무현을 공격해댄다. 김정안 기자는 이 시리즈 말미에서 “문제는 (AEI 같은) 창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데 청와대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외교안보전략을 구상하는데 네오콘 싱크탱크를 활용해라? 대북 강경파이자 군사모험주의자들인 그들의 논리를 가져다 쓰라? 노태우때의 작전권 환수에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이들이 노무현의 전작권 환수에는 저주와 비아냥을 퍼붓는다. 이런 그들이니 부시가 일방주의를 포기하고 다자주의로 회귀하려 했을 때 ‘배신감’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반노에 눈이 멀어 국익도, 안보도 팽개치는 이들. 김정안 기자는 자신이 노무현 시대에 썼던 기사들이 부끄럽지 않을까. 아니, 그를 포함해 숱한 저주의 기사를 썼던 기자들, 외교안보가 파탄이라고 네오콘의 입을 빌어 썼던 기자 아닌 기자들은 또 어떤가. 이제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만들어 냈던 ‘거대한 기만의 세계’, 그게 지난 정부 5년 동안의 한국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