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결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바로 여기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번역) 44쪽 각주에서 인용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 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각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곳,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일방통행로> (조형준 번역) 33쪽 ‘알리는 말씀 : 우리 모두 삼림을 보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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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is 2010-05-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방통행로> (최성만, 김영옥, 윤미애 번역) p80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모든사이 2010-05-03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시의 '서정적인' 번역과 조형준의 '서투른'(?) 번역과 최성만 등의 '건조한' 번역. 그래도 김남시 번역이 어쨌거나(!) 울림은 더 큰 것 같구만요..

alanis 2010-05-0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구나 어떤 물건을 떠올릴 때면, 그 모양보다는 그와 연관된 기억,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삐삐"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른 느낌이 있다. 보통은 음악을 녹음해 두었던 삐삐 인사말에, 어느 춥고 바람 불던 날 술먹고 귀가하다가 쓸쓸한 마음에 음악 대신 진짜 인사말을 녹음하고선 다시 전화 걸어 들었을 때 전혀 낯설은 내 목소리가 주던 그 어색함, 부끄러움, 당혹감, 약간의 공포...

내 귀로 들어가는 내 목소리는 입안에서의 울림과 더해져 달리 들린다는 과학적인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인식되는 나를 사실은 나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당혹감.... 그 시절 유명한(?) 소설 제목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고 당당히 외칠 수 없는 상황.... 내 자신이 온전히 나를 통제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약간의 편집증, 강박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평소 대인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는 나로서는 또하나의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인식조차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찌 소화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벤야민의 글을 곱씹어 읽어보다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이란 구절에서 불현듯 삐삐의 공포를 떠올렸다.

결국은 그 공포감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였을까? 그 목소리가 말하는 뜻은 같으나 전혀 다른 내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것 또한 내 감정)과 내가 그 말을 할 때의 감정간의 불일치감에서 오는 공포감. 일종의 라캉이 얘기하는 상징계로 넘어가지 못한 감정에 대한 상상계적 혼란이 아닐까?

감정이 실재하며 진실된 순간임을 알지만, 불쑥 떠오르는 감정은 그때 그 전화기속 내 목소리처럼 낯설고, 부끄러우며, 당혹스럽고, 공포스럽긴 여전하다.

모든사이 2010-05-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감각은 실존하는 것이다. 이 봄날, 미치도록 환장한 꽃 내음 속에서 잠시 우리는 감각의 실존에 몸을 가누고 거기 도취하는 것이다. 순간, 무엇이 있어 이 현전하는 감각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취한 채 그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흔들리거니. 더 흔들리고 흔들려 제 몸이 따라 흔들릴 때 그 때, 우리는 알게 되리라. 바람의 근원은 결국 제 몸뚱아리인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 없는 이 육체성의 현현 앞에 우리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할지니. 그건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넉넉한 긍정이려니. 긍휼스러워 말지어다, 그대여. 언젠가 간직하고 잃어버렸던 맑고 투명한 여의주 앞에, 잠시 엎드려 경배하기를. 라일락 향기가 너무 짙어 그 그늘아래 취했거늘, 관능을 열어 가쁘게 숨쉴 밖에 다른 그 무엇을 탓하겠는가. 주름살이 아름답게 보이는 자, 이제 비로소 지극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으려나.

april 2010-05-0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둘이 사귀나봐...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ㅎㅎ

모든사이 2010-05-0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에 홀려 한잔 한 탓이겠져. 오마르 카이얌의 옷자락 한올 잡았달까? ㅎㅎ

술은 액체로 된 루비, 술잔은 나의 현현
술잔은 육체이며, 그 안의 술은 영혼
술로 흡족해 하고 있는 그 맑은 술잔은
눈물,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의 피이네
- 오마르 캬이얌, <루바이야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