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년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강진아 옮김 / 소와당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카모토 다카시의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은 김홍집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김홍집은 25세때 과거에 급제해  영의정에 오른 정치가이자 구한말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였던 인물. 갑오개혁을 비롯한 근대개혁을 이끌었던 핵심인물이었던 그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4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면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중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 오카모토는 그가 죽어가면서 “천명(天命)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고종을 비롯한 친러파의 반발과 갑오개혁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겹치면서 그의 목숨과 함께 그가 추구한 근대개혁은 좌절되고 말았다. 군중이 던진 돌이 그의 몸을 부수었어도 그는 다만 자신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창밖으로 한눈에 보이는 광화문이 새삼 달라보였다. 불과 백여년 전에 이곳에서 성난 군중들은 내각의 최고 책임자를 돌로 쳐 죽였다. 충성스런 경찰이 없어서였을까. 백여년이 지난 뒤 국정최고 책임자는 '산성'을 쌓아 군중의 접근을 막았지만, 그때는 산성도 경찰벽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외침도 없이 “천명”으로 알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쯤 되면 거의 영화의 한 장면이다. 풍운의 한 시대를 살았던 재상/근대개혁가/조선의 대표적 외교관이 역사의 풍랑을 운명으로 여기고 죽어가는 모습. 그가 살았던 1842년부터 1896년의 시대야말로 그 이후의 한반도 역사를 결정지은 최대의 역사시간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1868)과 중국의 아편전쟁(1840)이 열어젖힌 동아시아 근대의 최대 격변기였다. 세종대왕 상이 흉물스럽게 들어선 저 광화문 광장 한복판 어디쯤, 성난 군중의 분노와 김홍집의 외마디가 묻혀있을 수도 모를 일.

오카모토가 김홍집 죽음을 불러낸 까닭은 그의 죽음이 일본과 청을 오가며 ‘독립 자주’를 관철시키려 했던 대외적 노선의 좌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김홍집은 “독립이 환상인 이유를 조선의 입장에서 가장 잘 알고 있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청의 대조선 정책을 지지하고 일본의 갑오개혁에 협력했던 것이다... 김홍집의 사업은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 끝에서 그는 더 이상 뜻을 얻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스스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역시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p. 256)

성리학의 명분론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국제관계에 대한 ‘리얼리즘의 시각’은 관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얼리스트’였던 김홍집은 대내외적으로 그의 리얼리즘을 실현시킬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조선적 현실주의 노선의 죽음이기도 한 것. 오카모토의 책은 김홍집 개인의 죽음을 통해 당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세력관계를 해명하고, 조선과 중국, 일본, 그리고 영국 등의 국가들이 의해 추구되었던 ‘독립 자주 노선, 혹은 조선 중립화론’의 형성과 좌절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주변 강대국과 외세가 조선의 운명을 두고 벌였던 도박과 논쟁의 변천사다.

명청 시대 이래 조선의 대외관계는 사대교린(事大交鄰)이었다. 사대교린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속국 자주’라는 모순적인 관계규정을 낳았다. 속국자주는 현실적으로 ‘조공체제’라는 모습으로 외화된다. '상국' 중국과 '속국' 조선, 그리고 여기에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개혁에 성공한 일본이 부상하면서 한중일의 근대 동아시아 삼국지가 전개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3국지가 아니라 약소국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의 각축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속국자주는 ‘독립 자주’로 극복되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여기서 ‘독립’은 청과의 관계에서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독자적인 주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직전 조선의 군사적 공백(중일양군의 철수에 따른)과 중국과 일본의 ‘세력균형’은 청과의 오랜 관계를 벗고 ‘독립’으로, 나아가 자주의 길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일의 세력이 팽팽하게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지속되어야만 조선의 독립 자주는 가능했다. 김홍집의 노력은 바로 이같은 노선을 향한 전략적 선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독립 자주’는 주체의 역량보다는 ‘세력균형’의 산물인 것이다. 

대한제국의 성립 역시 사학계 일부에서 말하는 대로, 자주적 개혁군주로서의 고종의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이 조선에서 물러간 뒤 러시아가 일본과 세력균형을 이루는 또다른 주체로 등장한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만들어낸 '힘의 공백'의 필연적 산물이다. 청이 물러난 뒤에야 고종은 비로소 ‘조선의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오카모토의 말을 빌면, “속국자주를 독립 자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자주를 성립시키는 세력균형은 그대로 보지하면서도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독립은 청을 포함한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청일전쟁 이전의 ‘자주’는 국제적 세력균형은 갖추었으나 독립에 있어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것. 그래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속국 자주’ 시절의 대외조약을 폐기하고(청의 세력이 쇠퇴했으므로) 새로운 조약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참여하는 북핵폐기의 국제 공조 프로세스인 '6자회담'의 원형적인 형태인 셈이다.

청일전쟁 '전야'와  더불어 러일전쟁 직전의 상황 역시 독립자주의 또다른 기회였다. 청이 물러간 자리를 대신한 러시아는 이제 일본과 조선을 둘러싼 새로운 세력균형을 형성했다. 이즈음 한국의 중립화론이 등장한다. 1894년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을 1) 독립국화 2) 보호국화 3) 청일 양국 정부에 의한 상호승인(태국의 경우?) 4) 중립국화(스위스, 벨기에)라는 네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에서도 조선에 대해 중립화 구상안이 유력하게 제시된 바 있다. 물론 그 이후의 역사는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로 뒤결되었다. 초기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조선중립화론은 세력균형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대외적인 세력균형을 깨뜨린 것은 러시아의 남하(여순, 대련 조차)로 벌어진 국제관계의 악화. 영국은 여우처럼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세력으로 청을 선택하더니, 청이 몰락하자 이제 일본을 선택한다. (영일동맹) 국내적으로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러파가 등장하면서 중립화 구상은 현실적 동력을 상실한다. 러시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중립화 구상을 폐기하고 조선 진출을 가속화하게 된다. 이 둘 사이의 충돌, 러일전쟁은 그러한 움직임을 최종적으로 완결한, 사실상 조선을 둘러싼 그 이후의 질서를 완결한 역사적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한 4차 김홍집 내각의 붕괴. 김홍집은 타살당하고, 재무장관 어윤중은 도망중 살해당하고, 외무장관 김윤식은 체포되어 유배당하면서 온건개화파는 궤멸된다. 남은 것은 친러파 관료. 그러니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한 뒤 조선의 개혁주체는 남았을 리가 없었던 것. 오카모토는 이들 온건개화파의 좌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청이나 일본 혹은 열강의 특정 일개국가와 걸핏하면 일방적으로 결탁하려고 하는 당파 사이에 서서 항상 극단적인 움직임을 억제하고,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배려하면서도, 지나친 압력에는 결코 굴하지 않는, 이른바 절도를 지닌 균형자(balancer)였다. 그들의 역할과 존재는 청일전쟁 이전에 조선의 ‘속국 자주’ 및 그것이 가져온 세력균형을 체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224)

늘 그렇듯이 조선말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더구나 근대초기의 식민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씁쓸하고 우울한 경험이다. 오카모토의 시각은 새롭고 신선하지만  또다른 우울의 목록을 추가한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그리고 근대 이후로는 미국과 소련(러시아)라는 또다른 ‘외세’가 개입하고 간섭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살길은 주체적 노력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은 독하게 쓰다. 한반도는 속국자주의 현대판인 한미동맹이 작동하고 있으며, 청일전쟁 직전의 상황처럼 ‘6자회담’과 같은 국제적 공조가 오히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다. 과거의 청일․러일의 세력균형이 현대에 와서 미(일) vs. 중(러)의 세력균형으로 치환되고 있는 셈이다. 자주적 통일은 이러한 역사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될까.  


김홍집이라는 인물을 새삼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우유부단한 정치가, 친일관료 쯤으로 알고 있던 그의 대외 노선은 노무현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떠올리게도 했다. 오카모토가 김홍집 세력을 balancer로 규정했을 때, 그 균형자는 노무현의 시각과 거의 일치한다. 19세기 영국이 그러했듯이 '패권국가에 의한 균형'이 아닌 조정과 타협의 주도자로서의 균형자 말이다. 저자의 서술은 국내 사학자들의 춘추필법 혹은 열혈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대단히 실증적이고 담담하다. 실증은 당대 중국과 일본의 외교문서와 사료에 충실하다는 의미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대목도 여럿이나 대체로 이 단명한 시대에 관한 역사상을 그려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책을 산 지는 한달이 넘은 듯한데, 지난주에야 책장을 덮었다. 5년여 계속된 동아시아 근대사 공부의 한 줄기를 끝낸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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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사이 2010-04-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