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탈리즘>(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를 읽으며 고대생 김예슬의 선언을 떠올렸다. 이 고대 자퇴녀의 선언은 최근 몇 년 동안 읽은 글 가운데 최고다. 잔대가리 굴려 쓴 글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쓴 글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야,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청춘도 있구나. 인터넷에 서식하는 저 무수한 키보드워리어니 하는 인간들보다 수백 배 낫지 않은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저 당당한 선언, 무슨 밀교적 제의처럼 블로그를 쏘다니며 저들만의 담론을 만드는 아해들보다 얼마나 싱싱한가. 우리사회의 주류적 질서가 강요하는 질서를 이탈하여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일, 기투(企投)의 삶이란 저런 것이다.

김예슬의 선언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80년대의 대학인들은 자본주의와 파쇼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대항담론을 만들어냈으나 거기에는 ‘개인의 실존’은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해방이후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논리로 무장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자본주의에 가장 잘 적응했다. 그들은 운동권에서 나오자마자 벤처기업가로, 펀드매니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판대상의 논리를 쉽사리 실존적으로 내면화했던 것이다. 이념과 삶의 괴리는 이미 발생론적으로 예비되어 있던 것이다. 박노자가 어느 글에선가 썼듯이, 군사파쇼를 비판하던 이들은 아무런 내면의 고통없이 군대를 갔고, 군대의 질서를 회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예슬은 다르다. 그녀는 ‘자기에의 배려’를 알고, 그것을 실천할 줄 알며, 동시에 그것이 지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 역시 통찰할 줄 안다. 부디, 이 친구가 잘 버티고, 잘 살아내기를!

김예슬의 선언은 리처드 세넷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서사를 벗어나 ‘개인의 서사’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른바 ‘경제경영 실용서’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실용서들은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으며, 당신이 어떻게 해야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왜 우리가 자신의 ‘삶의 서사’를 회복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미국의 이른바 ‘컨설턴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멍청한지, 그들의 컨설팅이 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세넷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에 의하면, 제도와 시스템의 신봉자들인 그들은 그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스펙’을 쌓고, 퇴출의 공포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근원적 불안’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한때 상사로 모셨던 김영희 대기자는 자신은 세 종류의 책을 늘 펼쳐 놓고 읽는다고 했다. 하나는 세계관과 가치에 관한 것으로 그에게는 헤겔철학서가 대표적이다. 또하나는 보다 중범위적 정치사회적 전망을 할 수 있는 책으로, 토플러나 프리드먼의 책이 그런 경우다. 마지막은 순수하게 ‘정보’를 얻기 위한 책. 리처드 세넷의 이 책은 그중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정처없이 표류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을 규명하면서 탈주의 길을 모색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자본주의는 지속되기 어렵다. “장기보다는 단기를 선호하고, 잠재력만을 중시하며, 과거의 경험을 기꺼이 내 팽개칠 수 있는 개인의 자질이란 아무리 어려움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지금 여기서의 내 삶을 아프게 찌른다. “유동적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삶”, 유동성은 끝없이 증대되어 왔으되, 삶은 정처를 잃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질서 속에서 불안하게 견뎌 내는 것. 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고 떨치지 못하는가. 종횡으로 얽힌 구조의 사슬 속에서 개인은 주류적 질서와 과감히 결별하지 못하고(혹은 안하고) 내 것이 아닌 열망으로 살아간다. 이보다는 차라리 포디즘 시대, 산업시대의 삶이 더 낫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의 관료제적 질서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서사화할 수 있었다. 9 to 5의 삶속에서, 직장의 엄격한 상하관계 속에서, 기계적인 노동속에서도 인간은 내년이면 월급이 얼마나 오를지, 언제 집을 살 수 있을지를 설계할 수 있었다. 노동은 팍팍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라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시대의 상대적 안온함)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구성원이 자신의 조직을 믿지도 못하고(언제 짤릴지 모르니), 사람들 간의 관계도 붕괴되었다.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었다.” 유동하는 근대화(지그문트 바우만)가 만들어내는 삶은 끝없이 유동하는 불안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노마드’는 국내적으로는 비정규직의 확대요, 글로벌 차원에서는 노동이주민의 급증을 은유한다. 디지털 노마드족? 88만원 세대에게 그런 소리 하다 돌 맞는다.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해 보여줬던 절제의 미덕도 절약의 노동윤리도 사라졌다. 오로지 오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끝없이 이동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을 던질 뿐.

리처드 세넷은 미국의 68세대 신좌파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에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이런 진술, “지난 10년간 내가 만난 미국인 중산층은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체념한 채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훼손되고 학교가 민간기업처럼 경영되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누구라도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비정규직 증가속도가 전세계 최고 수준이고, 학교는 학원화되고(아, 쓰벌 대체 교육의 ‘출구’는 없는 것일까?) 모오든 것이 시장화 하는 곳이다. 소수의 비판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그래서 변화의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출구로서의 정치는? 세넷은 대안을 말하지 않고 현실을 말한다.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다섯가지 이유. 1) 정치의 플랫폼화 : 폭스바겐이 공통의 플랫폼을 갖고 고급세단과 보급형 차량을 만들어내듯이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유사한 표준 플랫폼을 공유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중도주의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그 속성은 노동유연화, 세계화, 능력사회로의 전환이다. 2) 정치적 금박 입히기 : 플랫폼이 유사하니 사소한 차이밖에 없고, 이 사소한 차이를 갖고 죽자 사자 싸운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무슨 플랫폼의 차이가 있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금박’을 입히지만, 이건 쉽게 벗겨지게 마련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협력’해 비정규직법을 통과시킨다.

3) 인간성이란 휘어진 목재 :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펴지만 그로 인해 완전한 목표달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제도의 불완전성을 말하면서 ‘인간성이라는 휘어진 목재’를 거론한다.) 사람들의 일상을 배제한 채 만들어지는 정책이란 얼마나 허약한가. 친서민 정책이라고 자랑하고 떠들어대지만, 실제 서민의 일상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4) 사용자 중심의 정치에 대한 신뢰 강요 : 시민들이 소비자처럼 행동하게 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소비자로서 시민은 나태해지거나 첨예한 현안은 눈길을 돌린다. 5)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치신제품들 : 첨단제품들은 존재론적 불안을 야기한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는 노동당에 대한 신뢰는 경향적으로 떨어진다. (소비자로서의 시민) 새로운 제품을 사기 위해 타올랐던 욕구는 사자마자 사그러든다.(소멸하는 열정, 한국으로 치자면 롤러코스터 민주주의, 열망과 절망의 사이클)

우석훈과 박권일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선동했지만, 세넷은 보다 실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시간과 경험의 축적(경험많은 노동자를 함부로 자르면 안된다), 개인 유용성의 발휘, 장인정신의 세 가지. 이런 대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인의 서사화’다. 개인의 자기 삶의 주제로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살아) 가는 것. 이건 들뢰즈 용어로 개인의 재영토화, 혹은 생활세계의 회복쯤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리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20대의 어린 대학 자퇴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결론, “나는 하나의 역설, 즉 새로운 권력구조가 대단히 천박한 문화를 통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이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분명히, 지금의 새로운 질서 그 다음 단계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처럼 깨지기 쉬운 문화에 대한 반란이 장식하게 될 것이다.”

ps. 한 ‘영국 애호가’(?)가 빌려준 책인데, 그녀가 이 책을 빌려준 이유는 네 실존을 곱씹어 봐라는 오묘한 의미에서인지, 저자에 대한 애정이 넘쳐 빵처럼 나눠먹기를 바라는 마음에선지, 잘 모르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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