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94년 7월 한여름. 햇살이 무척이나 따가운 날씨에 콘서트라 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노래들만 가득한 "정태춘.박은옥"의 노래공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 날따라 유달리 실수와 사고가 많았던 공연이었는데, 심지어는 박은옥씨가 노래를 시작하려는 남편 정태춘씨를 보고, "정태춘씨 기타 코드를 잘못 잡으셨네요..."라고 핀잔을 줄만큼 그날 공연은 사실 허술했었다. 미리 그 사실을 안 것일까... 공연을 보고 돌아오던 학교 앞에서 우리 일행은 우리 시대에 참으로 드문 "호외" 신문을 길거리에서 받아든다.

"김일성 주석 사망"

한반도의 절반을 반세기동안 통치해왔던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해 94년은 북핵위기의 고조로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던 해이고,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해였다. 역사라는 것이 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닌 것은 당연한 진리이지만, 북한의 현대사를 굳이 되짚지 않아도 그 개인의 영향력은 북한 현대사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절묘한 시기에 그는 사망했고 역사는 또 괴괴한 흐름을 계속한다. 책을 읽다 그 흐름에 나도 묻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는 무거운, 그것도 친근한 우리의 역사가 아닌 직설적인 구호와 선동, 이념과 투쟁으로 가득찬 북한의 현대사를 제목에서 나타내듯 사진과 그림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물론 문장과 해설 역시도 쉬운 글로 표현해 자칫 지루하기 쉬운 역사서를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듯이 쉽게 독자에게 다가선 역사서인 것 같다. 해방에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참혹한 한국전쟁, 폐허 위에 건설한 사회주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의 주체, 우리식 사회주의의 건설 그리고 현재의 위기까지 일목요연한 해설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점에서 북한 현대사의 개론서로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한때 북한학 학자들간의 논쟁으로 번진 북한연구의 방법론으로 등장한 "내재적 연구방법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북한연구를 위한 시각이 그간 남한 교과서에서 보여지듯이 남한의 입장에서 북한을 일갈한 것과는 달리, 북한 내부의 시선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 기존 북한역사서에서 느끼지 못한 좋은 점이라 보여지며, 또한 북한 현대사를 관통하는 북미, 북소(러), 북중, 남북관계 등의 대외관계 및 국제관계 속에서 현상에 대한 정치경제적 해설 및 설명은 그간 사건 중심적이고 단편적 지식을 제공하던 역사서에 비해 많은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듯해서 도움이 되었다. 다만 기초적인 북한역사가 아닌 좀 더 심도깊은 역사서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부적절한 책이라 보여지며,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초년생까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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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열린우리당의 386 형님들에게 ‘친구 유시민’을 말하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종이 신문은 외면했지만, 지난주 내내 인터넷에서는 유시민 의원이 스타가 되었다. 요즘은 둘 다 바빠서 통 볼 수 없는 처지지만, 그와 나는 대학 동기다. 유시민군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 386 의원들이 벌떼처럼 그의 말투와 ‘싸가지’ 없음을 비난해도 이 기억이 있는 한 나는 386 의원들의 비판을 수긍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시민이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에서 “잊을 수 없는 그 봄”이라 단 한 줄로만 표현했던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한홍구와 유시민, 양치기 소년이 되다


△ 유시민을 향한 비판들은 민주당 경선 과정 때 노무현을 향했던 비판과 닮았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광주 학살이 벌어지기 1주일 전쯤인 5월11일이나 12일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의 복잡했던 정세를 여기서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해지니 간단히 넘어가기로 하자. 당시 서울대에서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기에 앞서 학내에서 농성 중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군(10·26 사건 당시 선포된 계엄령은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이 먼저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많이 돌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300∼400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 9시가 지나 학생회 사무실로 여러 곳에서 주로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군이 출동한다는 긴박한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무슨 일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생회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그는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날 당번이 되어 농성을 이끌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복학생 선배들도 4학년 선배들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군이 쳐들어온다는데 농성 중인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군이 쳐들어온다는 게 확실한 정보라면 1·2학년이 대부분인 농성 학생들을 빨리 해산시켜야지 별수 있겠는가? 힘든 결정이야 그의 몫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답했던 것 같다. 아무튼 유시민군은 해산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날 밤 늑대는 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유시민군과 나는 다음날 아침 7시 조금 넘어 몇몇 친구,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만났다. 민망하고 쪽팔려 그저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날 아침 강의실마다 돌아다니며 양떼를 쫓아버린 전날 밤의 소동에 대해 사과와 해명을 하느라 혼이 났다. 그리고 5월14, 15일 가두시위에 이어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운명의 5월17일이 왔다.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대낮에는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학교로는 시시각각 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제보가 빗발쳤다. 각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오늘 밤 상황 발생이 100% 확실하다고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빨리 나가자는 말에 뜻밖에 그는 자기는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에게 텅 빈 학교를 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피해야지 무슨 얘기냐는 내 말에 유시민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됐던 그날, 학생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민망한 일로 여겼던 반면, 대의원회 의장인 그는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텅 빈 학교에 주둔하는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황현과 같은 선비가 목숨을 끊은들 그게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겠냐마는, 황현처럼 목숨을 끊는 선비 하나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이 얼마나 더 참담했을까? 유시민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폭력학생'의 대명사가 됐나

유시민군을 다시 본 건 두달쯤 흐른 뒤였다. 전두환 일당의 ‘자비’ 덕에 그는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가게 된 것이다. 유시민군은 합동수사단에서 풀려난 지 며칠 만에 입대했는데, 친구 몇몇과 함께 유시민군을 만났다. 합동수사단에서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소문에 걱정했지만, 생각 밖에 그의 표정은 밝았다. 신경림 선생 시처럼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반갑다고 만나자마자 우리는 낄낄댔다. 철이 없어서였는지 위로해줄 말을 찾지 못해서였는지 우리는 유시민군에게 군대 가서 잔뜩 ‘좇뺑이’ 치라고 위악을 부렸고, 유시민군은 “흥, 인생만사 새옹지마야. 니들은 무사히 졸업할 것 같냐”며 지지 않고 응수했다. 하느님이 계엄포고령을 위반한 죄로 계엄군이 된 불쌍한 유시민군의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우리도 그해를 넘기지 못했다. 1980년 12월에 이른바 ‘무림 사건’이 발생했고, 군대 가는 유시민군을 놀렸던 악동들은 줄줄이 감옥과 군대에 가게 되었다. 유시민군은 친구라도 만나고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수사기관에서 그대로 군대에 직행했다. 그래도 억울할 것은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그때 다 같이 잡혀서 보안사에서 같은 버스 타고 군대에 갔으니까.

유시민군이 말한 대로 인생만사는 역시 새옹지마였다. “니들은 무사히 졸업할 것 같냐”던 그의 ‘악담’은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에게 돌아갔다. 친구와 선배들이 줄줄이 엮인 무림 사건이 터지자 이등병이었던 그도 무사하지 못했다. 보안사에 끌려간 그는 밖에서 일을 저지른 우리들보다 더 심하게 당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군대를 반년 정도 늦게 갔지만, 제대는 오히려 유시민군보다 빨리했다. 전두환 일당의 ‘자비’ 덕에 우리는 제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군사 교련 이수로 인한 6개월 복무 단축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유시민군은 33개월을 모두 채우고 만기 제대한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한 뒤 처음으로 단체로 군대에 끌려간 우리의 제대를 앞두고 악명 높은 녹화사업이 실시됐다. 나는 정말 운좋게 사단 보안대에 15일 잡혀가서도 프락치 공작을 강요받지도 않고 뺨 한대 맞지 않고 재미없는 정훈서적 읽는 것으로 녹화사업을 마친 반면, 유시민군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은 “일신의 안전을 위해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당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을 당해야 했다. 유시민군은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보안대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심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군대 시절의 유시민. 강제 징집된 그는 군대에서 다시 한번 '무림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를 일으켜세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녹화사업을 받은 여섯명의 젊은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할 수 없었던 그는 녹화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고, 1984년 9월 제적학생 복교 조치가 있자 학교로 돌아와 복학생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유시민의 복학생 생활은 보름을 넘지 못했다.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참 프락치도 많았고, 가짜 학생도 많았다. 그런데 프락치 공작에서 진짜 무서운 건 프락치가 적에게 물어다주는 정보보다도 프락치 침투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때문에 운동 진영이 스스로 자살골을 넣게 된다는 점이다(시기와 무대는 다르지만, 내 박사학위 논문이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 시절에는 기관원(우리는 그들을 ‘짭새’라 불렀다)과 전경들이 공공연히 학내에 상주했다. 교정의 벤치란 벤치는 그들이 모조리 점령하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빈 공간은 전경들이 족구나 팩차기를 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 이후 경찰이 이런 식으로 교내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경찰의 프락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학생 수가 늘어나 같은 과 학생끼리 서로 얼굴을 모르게 되면서 가짜 학생도 덩달아 많이 늘어났다. 기관원을 사칭하는 가짜 학생에게 여학생들이 교내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가짜 학생 또는 학생 신분이 아닌 사람이 적발되면 일단 그가 정보부나 경찰의 프락치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형편이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학생들이 이런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왕왕 폭력이 행사됐다. 그 중의 한명이 몹시 심하게 얻어맞았는데, 당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손상을 가할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마침 그를 직접 폭행한 친구가 복학생이었기 때문에 복학생협의회 의장이던 유시민군이 총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구속됐는데, 죄명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다.

군사정권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다들 긴급조치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포고령,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뭔가 있어 보이는’ 법률 위반으로 감옥에 갔지 ‘폭처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회심의 반격, 항소이유서

저들도 학생운동을 정치적 법률로만 탄압하면 오히려 영웅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프락치 사건’을 대대적으로 활용하여 학생운동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경위야 어쨌든 폭력이 행사되고 사람이 다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학생운동은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아니, 사람 좀 친 것 갖고 학살 정권, 고문 정권이 저럴 수 있느냐며 분개하기도 했지만, 남의 허물이 내 잘못을 덮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들의 선전 공세에 분하고 억울하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있을 때 회심의 반격을 날린 것은 바로 폭력과격 학생의 대명사가 돼버린 유시민이었다. 여기 몇줄로 줄여서 소개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명문인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시민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러시아 시인의 말을 빌려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옹호했다. 이 글이 어떤 글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원래 착한 유시민이 군사독재의 모략에 맞서 ‘독한 마음’ 먹고 착한 모습을 보인 글”이라고 농반진반 말하곤 했다.

스물일곱살의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 뒤 칼럼니스트로서, 방송인으로서, 저술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을 규정하는 꼬리표가 되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2002년 여름 그는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병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으로 또 하나의 격문을 날렸다. 정규군이 지리멸렬 무너지자 그가 의병의 깃발을 내걸고 뛰쳐나간 것이다. 사람들이 적당히 잊어버려야 역사이야기에 쓸 수 있을 터이지만, 이 일은 너무 가까운 과거의 일인지라 역사에 편입시키기에는 생뚱맞아 보인다. 그렇지만 여의도에 있는 이른바 386 의원들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불과 2∼3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 "열린우리당의 젊은 의원들이여, 쉽게 잊혀지지 않으려거든 철들지 말라."

추미애·김영환처럼 잊혀질 것인가

싸가지 없고, 독불장군이고, 독선적이고, 말을 함부로 하고,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당내나 원내에는 지지세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인터넷에서만 극렬 지지세력들을 갖고 있고, 인간이 가볍고, 정통 세력이 아니고… 꼭 3년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두고 나왔던 말이다. 유시민이 노무현이 아니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너무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 어떤 386 의원은 유시민을 두고 지지의원이 다섯명도 안 되는데 당의장 경선에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리지만, 기억하는가, 노무현이 경선에 나왔을 때는 노무현 본인도 국회의원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의 곁에는 단 한명의 의원도 없었다. 한때 같은 변호사 사무실에 있었던 천정배 의원이 그나마 노무현을 지지했고, 김근태 후보가 경선을 접은 뒤 그의 캠프에서 옮겨간 이재정 의원이 노무현 후보의 옆을 지켰다.

독자들이 이 글을 볼 때쯤이면 열린우리당 경선도 다 끝났을 텐데 내가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유시민의 옛 친구라서도 아니고, 정치인 유시민이 당의장이 되는 것을 바라서도 아니다. 열린우리당 경선 과정을 보면서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의원들에게 한편으로는 크게 실망하면서, 그래도 독수리 5형제 세대의 막내인 젊은 그들의 앞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탄핵 직후 인터넷을 떠돌며 사람들 반 죽도록 웃게 만든 ‘아무개 의원의 탄핵일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잘나가는 정치인 말아먹는 기계… 동전만 넣으면 멀쩡한 인간이 깡통처럼 구겨져나오는 그 깡패 같은 넘 땜에… 그 넘 땜에 폐인된 유능한 정치인이 어디 한둘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탄핵에 가담한 민주당에도 참 아까운 인물들 많았다. 지금 그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부터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그런지 자꾸 나이를 따지는 글을 쓰게 되어 젊은 독자들께 죄송스럽다. 386이나 유시민군이나 나나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386 의원들이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려 아직 철이 덜 난 유시민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이제 그분들을 형님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든다. 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숱한 386 중에서도 일찍 어른이 된 의장님, 회장님들만 의원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내가 독자들이 이 글을 볼 때쯤이면 열린우리당 경선도 다 끝났을 텐데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유시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유시민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으로서 386들이 유시민의 어떤 점 때문에 거품을 무는지도 요즘 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나 유시민을 비판하는 386 의원들에게 꼭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유시민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수구에게 날을 세워 싸워봤느냐고….

학생운동의 역사를 볼 때 세대로서의 386은 너무 겉자랐다.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1950년대도, 60년대도, 70년대도 학생운동이 너무 많은 짐을 져야 했다. 그러나 광주를 거치면서 과대 성장한 국가기구의 대표선수인 군과 발육이 부진한 시민사회의 대표선수인 학생이 가장 첨예하게 격돌했던 80년대만큼 학생운동에 많은 짐이 지워진 적은 없었다. 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급격히 쇠퇴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다른 분야에 축적돼가면서 다른 부문의 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족민중운동의 상황이 이제 386 의원들처럼 의장님, 회장님 출신의 스타가 나오기는 어려워졌다. 독수리 오형제의 막내인 386들이 김문수, 이재오가 돼서는 안 되고, 추미애나 김영환처럼 나름대로 대단한 활약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잊혀져서도 안 되지 않은가?

철들지 않고 살면 즐겁지요

앞서 태어난 조카는 있어도 앞서 태어난 아우는 없다지만, 조폭 세계에 가면 나이 어린 형님을 모시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파이란>의 최민식처럼 늙다리 조폭 생활을 하다 보면 젊은 형님에게 굼뜨다고 야단맞기도 하는데, 이런 때 울컥 치미는 말이 있다. “형님도 내 나이 돼보슈.”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에서 오지혜가 윤민석에게 한 말을 나는 유시민에게, 그리고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모두에게 하고 싶다. 제발 철들지 말고 살라고…. 아는 의사에게서 철들지 않은 걸로 치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알았다는 하종강 형님 같은 분도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처럼 점잔 빼는 사회에서 나이 들어 철들지 않고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386 형님들도 이 나이가 돼보신다면, 유시민처럼 철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즐거움 또한 꽤나 쏠쏠하다는 것을 아실 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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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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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역시 '생활'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고흐의 경우는 화구까지도. 그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구도자,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고독'은 고흐에게뿐 아니라 테오에게도 있었다. 그것을 처절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고, 그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일이 아우의 몫이었다.

- '거친 하늘과 밭' (고흐) -69쪽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략)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인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 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 '모래에 묻히는 개' (고야)-108쪽

두 형이 모두 출옥함으로써 우리 일가를 짓누르고 있던 운명은 하나의 구획을 지은 셈인데, 돌이켜보건대 잃은 것은 너무나 많고 또한 조국의 분단상태를 비롯하여 이러한 운명을 초래한 구도의 근본이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들이 아직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게 차라리 당연하다 하겠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에 배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일지도 모르겠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다.

- 에필로그 중-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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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살아가다 보면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러한 왜 사는지에 대한 철학적, 실존적 의문 이전에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스스로에게 지친 자학적 푸념이 앞설 때가 있다. 이 책을 주저없이 선택하게 되었던 이유도 종교적 구도자의 길을 걷는 한 스님의 자기 수행기를 통해, 그런 자학적 푸념에 대한 일말의 위안을 삼고, 의욕을 얻고자 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이의 뜻과는 관계없이, 학벌 중심적 사고에 젖어있는 한국독자들을 효과적으로 파고들만큼 선정적인 "예일대 졸업생 스님"이라는 문구와 왠지 사막이라면 풀 한포기도 없을 법한 모래언덕 위에 절을 짓고 있다는 신비감에 도취될 정도로 책 겉표지가 장식되어 있지만, 실상 글 쓰는 무량스님은 이에 대해 무덤한 것 같다. 오히려 이 책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우리 모두의 알음알이도 다 던져버리라고 한다.

왠지 이런 수행기를 읽다보면, 선불교의 가르침에 한 발 다가서고, 글 쓰는 이의 고뇌를 통해 나의 삶을 투영하고 대리수행의 감정도 가질만 하지만,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량스님은 출가하기 전의 삶과 출가하게 된 배경과 계기, 출가한 후의 태고사 건축과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어찌보면 수행기를 읽는 독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기대를 져버리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글인 것 같다. 다만, 무량스님의 입장에서 10년전부터 시작해 지금도 짓는 과정에 있는 미국의 태고사는 노동과 수행의 과정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절터를 찾고, 무엇을 어떻게 지을지 황량한 사막 위에서 결정한다는 것이 그리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태고사를 통해 펼치고 싶은, 누구나 찾을 수행도장을 만들고,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환경친화적이고 인류평화에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그의 수행기가 절 짓는 일기장이라 하더라도 의미는 충분하다 싶다. 다만 그런 기대를 갖고 책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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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2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절판


이 책에 대해서는 이제 잊어버리고, 우리 모두의 알음알이도 다 던져버리고, 너와 나,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는 '오직 모를 뿐'의 신비로 들어가, 온 마음을 다해 이 물음을 캐묻도록 합시다.

맑고 푸른 하늘엔 눈부신 햇살
부드러운 땅 위엔 두 발자국이 남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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