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역시 '생활'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고흐의 경우는 화구까지도. 그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구도자,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고독'은 고흐에게뿐 아니라 테오에게도 있었다. 그것을 처절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고, 그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일이 아우의 몫이었다.
- '거친 하늘과 밭' (고흐) -69쪽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략)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인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 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 '모래에 묻히는 개' (고야)-108쪽
두 형이 모두 출옥함으로써 우리 일가를 짓누르고 있던 운명은 하나의 구획을 지은 셈인데, 돌이켜보건대 잃은 것은 너무나 많고 또한 조국의 분단상태를 비롯하여 이러한 운명을 초래한 구도의 근본이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들이 아직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게 차라리 당연하다 하겠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에 배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일지도 모르겠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다.
- 에필로그 중-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