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었으니 파릇파릇한 풀향기 맡으러 나가야하나....밖을 보니 눈이 온다. 내일이면 개구리 나오는 경칩인데... 아~ 저 호쾌한 스윙. 역쉬 타이롱 우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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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시험감독 없던 중학교…그때 아하~ 깨달았죠
한겨레  
» 크리스찬아카데미 연극동아리 ‘혼’ 워크숍과 1977년 열린 크리스찬아카데미 대학생 모임에 참석한 손 대표(원 안)
홍보대행 인컴브로더의 ‘느림 경영’
2막-사람 중심 기업문화 꽃피우기까지

홍보대행사 인컴브로더의 ‘느림 경영’ 실험을 지난 주에 이어 소개한다. 이번에는 노동시간 줄이기를 비롯한 여러 실험들이 ‘왜?’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대부분의 기업, 기관이 업무 혁신을 꿈꾸되, 실제로는 되레 과욋일이 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직장의 이야기를 애초 3주간 다루려던 계획을 바꿔, 이번 주로 맺는다.

어떻게 하면 일하는 시간을 줄일까. 인컴브로더 등 세 회사가 지난해 1월 강원도 춘천시에서 연 팀장 워크숍의 주요 주제였다. 논의 끝에 두 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먼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만 제안을 내기로 했다. 홍보 대행사의 고객은 많은 곳에 제안을 할수록 늘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직원들의 일도 많아지게 된다.손용석 대표이사와 팀장들은 고객 수를 늘리는 대신 직원들의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더 큰 가치를 뒀다. 그 결과 인컴브로더 등 세 회사가 지난해 신규 고객 ‘개발’을 위해 낸 제안 수는 그러께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일을 줄이자 제안서에 담긴 내용이 더욱 알차져 성공 확률이 3배 이상 높아졌다. 모험 같은 결정이었지만 회사 매출은 오히려 더 나아졌다.

» 웃고있는 손 대표(왼쪽사진) 인컴브로더 등 세 회사 직원들은 쉐어링웬즈데이, 애드나이트, 펀데이 등 여러 모임과 행사를 통해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동료들과 나눈다. 사진은 ‘피아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오른쪽사진)

다음으로 다섯 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하는 ‘다일 데이’를 만들었다. 직원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다일 데이’를 쓸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지난해 10% 가량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인컴브로더는 이처럼 더디 가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광고·홍보 시장에 한파가 밀어닥쳤다. 1998년초 ‘인컴’은 위기 극복을 위한 세 가지 원칙을 마련했다. 첫째, 어떤 일이 있어도 해고는 하지 않는다. 둘째, 급여 삭감도 없다. 세째, 경비를 최대한 절감한다. 1997년 입사해 도모컨설팅에서 일하고 있는 최윤혁 부장은 “인력이나 급여를 줄이지 않겠다는 대표이사의 말은 무척 감동적이었다”며 “직원들은 더욱 똘똘 뭉쳐 열심히 일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손 대표는 “이익잉여금이 6억원 정도 있었는데 그 돈으로 버틸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시장상황이 바뀌었다. 다음해 외국계 기업이 대거 국내에 진출하면서 홍보대행 수요가 늘었다. 이때 ‘인컴’은 또 다른 기회를 누렸다. 사람을 자르지 않고 있던데다, 다른 회사에서 밀려나 있던 양질의 피아르 인력도 ‘인컴’이 흡수해, 늘어난 물량을 적기에 소화하게 된 것이다.

손 대표는 2002년 사재 2억원을 출연해 인컴피아르재단을 만들어 이우학교, 들꽃청소년세상,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노인복지회 등에 무료로 컨설팅을 했다. 들꽃청소년세상 김현수 목사는 “주위에 우리를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며 “재단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들꽃청소년세상이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직원들도 재단 일에 열심이다. 재단 운영을 맡고 있는 도모컨설팅 박일준 부사장은 “2~3개월 가량 밤늦게까지 혹은 휴일에 가욋일을 해야함에도 늘 필요한 사람보다 지원자가 2~3배 많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연말연시에 물건을 한 점씩 갖고와 경매 행사를 열어 모은 수익금을 복지단체에 보내기도 한다.

‘인컴’의 기업 문화는 외국계 기업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외국계 홍보대행사들이 국내에 몰려들기 시작한 2000년을 전후해 ‘인컴’은 자신들과 경영 철학이 가깝다고 느껴지는 브로더월드와이드와 제휴해 인컴브로더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브로더’의 존 브로더 회장은 인컴의 기업 문화에 감동받아 자신의 경쟁사인 플레시먼힐러드 존 그레엄 회장에게 한국 진출 때 이 회사를 파트너로 선택하도록 추천했다. 손 대표가 인컴브로더와 플레시먼힐러드 대표이사를 함께 맡게 된 이유다.

손 대표는 회사를 이렇게 이끌고 있는 자신의 가치관이 청소년기에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참 좋은 중학교를 다녔다”. 서울 건국대부속중학교의 전신인 건국중학교다. “외대 초대 학장인 안호삼 선생이 참교육의 뜻을 펼치고자 만든 학교로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했어요.” 감독이 없이 시험을 치르고, 학교 안에 무인판매대를 운영하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보장했던 그 학교에서 손 대표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이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푸른 꿈을 안고 들어간 명문 경기고의 ‘엄격함’은 그에게 상처를 줬다. 공부도 싫어져 그는 “공부하기보다 생각하는 학생”으로 바뀌었고, 부모님이 다니던 경동교회 다니고 크리스찬아카데미 활동을 하며 강원룡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목사님은 참된 크리스찬이라면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고, 현실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되며 베풀고 나누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함을 강조하셨어요.”

그는 경동교회 학생부 교사에 이어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 담당 간사로 일했던 한명숙 총리를 통해 여성 문제에도 눈을 떴다. 그런 이유로 인컴브로더 등에는 성차별이 없다. 임신 여성에게 1달에 하루 유급 휴가를 주는 등 여성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많은 회사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하세영 전략기획팀장은 “급식 당번으로 학교에 갈 때 한번도 눈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님은 회식 때 성과 관련된 농담조차 하지 않는다”며 “성희롱은 생각할 수도 없는게 회사 분위기”라고 말했다. 서울 삼성동 공항타워 24층 인컴브로더 사무실 안내데스크에 걸린 액자에는 손 대표의 가치관이 담긴 글이 걸려 있다. ‘나를 위한 채움, 우리를 위한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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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직원들 일 줄이면 사장님 입이 귀에 걸려요
한겨레  
» 피알과 커뮤니케이션 전문회사 인컴브로더는 혁신, 창의성, 윤리외에 재미도 핵심 가치로 꼽고 있다. 재미없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는 대표이사와 간부들, 회사의 핵심가치를 지키기 위해 뜻을 한 데 모으는 직원들. 손용석 대표이사(가운데)와 직원들은 회사를 행복공동체로 만드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홍보대행 인컴브로더의 ‘느림 경영’ 1막-직원들 행복이 우선이다

인컴브로더, 플래시먼힐러드, 도모컨설팅 등 세 기업(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대표 손용석 등)은 관계회사로 묶인 외국계 홍보대행사다. 직원 80여명으로 관련 업계에선 규모가 꽤 큰 편이다. 〈한겨레〉가 이 회사를 찾은 까닭은 매출 규모나 그들의 주업무인 홍보대행 능력을 상찬하려 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직원의 만족도와 효율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좇는 독특한 기업문화 실험에 끌려서다. 이들의 실험 이야기를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손용석 인컴브로더 대표에게 최근의 관심사를 물었다. 커뮤니케이션과 피아르 전문기업의 시이오 입에서는 뜻밖의 답이 나왔다.

“저는 요즈음 우리 직원들이 정말로 행복한지 너무 궁금해요.” ‘우리 직원’에는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또다른 피아르 전문기업인 플래시먼힐러드와 그가 만든 ‘관계회사’인 도모컨설팅의 직원까지 포함된다.

얼핏 ‘입에 발린 말’처럼도 들린다. 그래서 기자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이들의 사무실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직원 여러 사람에게 이 회사를 선택해 붙어 있는 이유를 물었다. 일부 퇴직자도 만나 좀더 ‘솔직한’ 이야기도 들어봤다.

“컬처요”, “기업 컬처입니다”, “회사 분위기요”, “기업 문화요”, “컬처”, “컬처”, “컬처”. 모두들 기업 문화를 들었다.

이들이 답한 기업 문화는 이 회사의 안식월제에 잘 드러나 있다. 인컴브로더 등 세 회사는 3년에 한번씩 직원들에게 안식월을 준다. 연봉의 10%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직원과 함께 가는 1촌 이내 가족의 교통비를 지원한다. 회사 설립 때 만들어진 안식월제는 1998년 아이엠에프 사태 때도 거르지 않고 시행됐다.

안식월제는 회사로서는 손해처럼 보이는 제도다. 비록 다른 직원들이 일을 나눠 맡는다고 하지만 일의 진척은 더딜 수밖에 없다. 인컴브로더 김지혜 부장은 지난해 9월 두 번째 안식월을 다녀왔다. 2001년 남편과의 유럽 여행에 이어 지난해에는 한달을 셋으로 쪼개 친정 부모, 시부모, 아들과 국내외 여행을 했다. 그가 없는 자리는 김성혜 부사장, 조현숙 부장, 조경운 부장, 손선미 부장 등이 메웠다. 지난해 80명의 직원 가운데 13명이 김 부장처럼 한달 동안 브라질, 쿠바, 유럽 등을 다녀왔다. 업무에 차질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특히 안식월제 시행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고객이다. 고객들의 이해가 없이는 시행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김 부장은 “고객이 반대해 안식월을 제때 못 가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고객들이 대부분 우리 회사의 안식월제를 이해하고 부러워한다”며 “어떤 고객은 그런 문화가 있는 기업이라 더욱 믿음이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3년꼴 안식월 주고 가족 교통비 ‘보너스’
‘검은 청탁’ 고객은 매출 손해봐도 정리
신입사원에겐 멘토 ‘백일언니’ 붙여줘
‘느림 효율성’은요?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는다는 것

홍보 업무는 물론 일이 많다. 고객들의 요구가 많고 언론사를 상대하다 보니 일주일에 1~2번은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한다. 손 대표이사는 “워크 앤 라이프의 밸런스가 중요함”을 계속 강조한다. 지난해 이 회사 고위급인 팀장들은 워크숍을 통해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기까지 했다. 하세영 전략기획팀장은 “올해 조사해 보니 지난해에 비해 직원들의 노동시간이 10% 이상 줄었다”며 “사장님과 팀장들이 아주 흐뭇해하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트렌드, 빠름, 속도, 경쟁 등과 가까울 것처럼 보이는 회사지만 이 회사 사람들은 여유와 즐김, 느림과 자유 속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회사 기업문화의 또 한가지 특징인 윤리경영도 ‘느림의 효율성’과 잇닿아 있다. 지난해에는 주요 고객 한 군데가 회사의 핵심 가치에 어긋나는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기자에게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매출의 15%를 차지하는 주요 고객이라 부담이 컸다. 그럼에도 이 회사는 회의를 통해 전 사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동의를 구했다. 결론은 그 고객의 ‘정리’였다. 손 대표는 “(눈앞의 매출 손실이 있지만) 직원들이 회사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데 보람을 느끼고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다”며 ‘긴 안목’에서의 효과를 꼽았다. 15%의 손실은 다른 고객을 개발해 3개월 만에 회복했다. 몇 해 전에는 리베이트를 요구하는 주요 고객을 ‘잘랐다’고 한다.

이 회사는 멘토링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엠비엔〉에서 2004년 10월 이 회사로 자리를 옮긴 윤성은 과장은 기자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의 변신이 무척 힘들었다. 일주일에 2~3번씩 밤 11시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스트레스로 몸까지 아팠다. 그는 “멘토였던 도모컨설팅의 최승호 과장님 덕에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이 회사는 설립 때인 1993년, 멘토링이라는 말이 낯설던 때에 이미 신입사원을 백일 동안 챙긴다는 뜻에서 ‘백일언니’라는 이름으로 멘토링을 시작했다.

이뿐이 아니다. 회사는 직원들의 동아리 활동도 적극 권장해 활동비의 70%를 회사에서 지원한다. 포도주를 즐기는 모임인 ‘와디(와인 & 디오니소스)’ 같은 모임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직원들이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지원하고 있다.

같은 홍보대행업계의 다른 한 직원은 인컴브로더를 “꼭 가보고 싶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 해에 절반 가량이 자리를 옮기는 홍보업계의 현실과 달리 이 회사의 이직률은 10%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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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정권 창출에만 매달리면 진보의 진정성 의심받아”
[1987년 그뒤 20년] 민주개혁세력 어디로 ③ 고은 시인 서면 인터뷰

 

 

 

» 고은 시인. 강창광 기자
고은 시인은 “이른바 진보 진영이 정권 창출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진보의 진정성도 의심받게 된다. 진보란 앞산 첩첩한 수구에 대한 고독이다”라며 “시민운동이나 조직, 노동운동이 너무 과체중이고 너무 이익집단화 함으로써 그 사회적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고은 시인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의) 민주적 역량 부족은 지적되어야 마땅하지만 지금 한국에선 어떤 천하 명군도 정치적 명답을 내놓기 어렵다. 이전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투명해진 것은 놀랍다”고 평가하면서 “노 대통령이 가장 아파해야 할 것은 한국의 부익부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곳이라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고은 시인은 건강상의 이유로 서면 인터뷰를 원했고, 지난 19일 질문을 팩스로 보내고 답변을 다시 팩스로 받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라면 먹으며 해온 민중운동 과체중에 정당성마저 흔들”

-올해가 87년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엔 어떤 변화가 이뤄졌다고 보시나. 우리 사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시나?

=두 젊은이 박종철, 이한열의 20주기이자 그 죽음을 극적인 동기로 삼았던 민주화 운동은 그때까지의 민주세력 실체인 재야와 학생만의 그것이 아니라, 시민 참여를 통한 하나의 종합운동으로 폭발한 것이 6월 항쟁이었다. 멀리는 70년대 반유신, 가까이는 80년 광주항쟁 이래의 커다란 결산이었다. 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출사표 전략회의 뒤 시내로 나와 서울역, 명동 입구, 동대문 일대의 시위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보도블럭을 뜯어 투석전을 지원하는 회사원이나 상인들의 뜨거운 저항을 목격하고 감격했다.

지난 20년은 시간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였고 카오스였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격동들이 담긴 정치적 포화상태가 된 것이다. 앞으로의 20년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오류와 가능성들이 귀납되는 시기가 되어야 겠다. 그래야 6월 항쟁에 하나의 고유명사를 짓게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4년 연임제 대통령제 개헌’을 제안했다. 여론의 반대에도 개헌안 발의를 2월에 하겠다고 밝혔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여론 지지가 낮아도 개헌안 추진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일까.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권위주의로만 체험하다가 낯선 평민주의에 대한 위화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을 스케치 한다면 이승만은 조선 태조였고, 박정희는 태종과 비슷하다. 신군부 대통령이라는 것도 국가를 군대조직체로 운영함으로써 절대 복종의 장군으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6월 항쟁 이후 문민이니 국민이니 하는 시대의 끝에 노무현이라는 ‘댓글 네티즌의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그는 큰 귀를 가지지 않고 큰 입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개헌 논의는 정치적 상상력에서 발단한 것인가, 즉자적인 현실 타파의 도발행위인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정권 말기의 수습정치 여지마저 없애기 십상이다. 당장 국회의 장벽 뚫기도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제 임기 마지막 해를 맞았다. 노무현 정권의 지난 4년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나. 노무현 정권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은 무엇이라 보시나.

=2만달러 소득이 눈 앞이다, 3천억달러 수출을 넘어섰다는 것은 성장주의 생각으로는 크게 평가해야겠지요. 그러나 국민 생활에 이같은 평가가 어떻게 직결되느냐는 문제는 별도이다. 아무튼 그의 성공론은 실패론의 대세로 실종된 점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처럼 국내·외적으로 십자 포화를 맞고 어린 아이부터 80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군중의 폭력성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민주주의는 일종의 타락이라고 본다. 지금 세계 각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현저히 후퇴하고 있는 것을 직시하면 우리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온 민주주의의 품위를 지켜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아파해야 할 것은 한국의 부익부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인도와 중국의 빈부격차라 해서 한국보다 못할 것이 없을 지경이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대의로부터 벗어났다”면서 민주개혁 세력은 노 정권과 결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의견을 어떻게 보시나.

=민주적 역량 부족은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노 대통령)가 민주주의 대의를 떠났다는 말은 찬성할 수 없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천하 명군도 정치적 명답을 내놓기 어렵다. 그렇게 우리 사회 각 영역의 유아독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투명해진 것은 놀랍다. 노무현의 매일매일은 우리 시대가 야생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는 당돌하고 거침없다. 그의 직설들은 누구의 충고도 받지 않는 오기로 보인다. 앞으로의 1년이 지나면 우리는 한동안 적막할 것이다.

“참여정부 성장 이끌었지만 빈부격차 최대국 아파해야”

-최근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 단체들에선 올해 대선이 이대로 가면 보수세력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까 보수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 단체 중심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

=현재 여당은 거의 속수무책인 듯하다. 바닥을 친다는 말이 있는데 바닥치고 일어날 힘이 없어 보인다. 대선 정국에 대한 정치공황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뜻밖에 한나라당의 대선 분열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데까지 파급될 공황이다. 들여다 보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3대의 민주화 정권 15년을 우리는 살아왔다.

이쯤에서 이른바 진보 진영이 정권 창출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진보의 진정성도 의심받게 된다고 본다. 진보란 앞산 첩첩한 수구에 대한 고독인 것이다. 이제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준다 해도 새로 등장한 정권이 지난 날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로 복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시대는 보수 진보라는 것을 소화해야 할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줄지 모른다.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민운동이나 조직, 노동운동이 너무 과체중이고 너무 이익집단화 함으로써 그 사회적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는 상태이다. 유신 시대의 민중운동은 라면 먹으며 해온 운동이다. 지금 전국의 시민단체가 몇 백개인가.

-뉴라이트를 어떻게 평가하시나. 이게 건전한 좌우 논쟁, 우리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뉴라이트란 이름만 내건 수구세력의 발호라고 보시나.

=미국 네오콘의 그 ‘네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는 안다. 한국의 뉴라이트의 ‘뉴’라는 것도 최근의 행태로 보아 매우 우려된다. 그것이 지난날의 수구에 지적인 장치를 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서 왜 우파는 극우파로밖에 표현되지 않는가. 그리고 미국의 우파는 미국이라는 세계 지배의 논리로서의 조국이 있고, 일본의 우파 역시 일본이라는 조국의 패권 확대에 투신하는데 한국의 우파는 이런 미·일의 우파에 종속되고 있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지 않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미·일에 의한 안보주의가 나 자신의 이념적 내면에 대해 남남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좌우 불화의 지속은 조선 후기의 여러 사화나 당쟁의 비극과도 닿아있는 봉건적 야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앞으로 노무현 정부 임기가 1년 남았다. 남은 임기 동안 노무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대통령을 안 한다, 할 생각 없다고 연거푸 말하고 있지만 그에게 남은 큰 과제는 남북 정상회담이다. 때마침 6자회담 재개의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나는 6자회담이 북핵문제 회담으로만 그치지 않고 동북아시아 상설기구로 유지 발전시킴으로써 장차 한반도 평화통일을 전담하는 국제적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유엔(UN)의 동아시아 기구와 같은 역할이 거기에서 있게 될 터이다. 정상회담에서 얻을 것이 많다. 북의 창조적 변화도 거기서 모색해야 한다. 비핵 체제로의 길은 대륙과 해양 두 세력의 담합이 아닌 민족 내부의 과제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와 있다. 책상정돈과 교실 청소가 남아 있다. 새로 공부할 교실을 남겨놓아야 한다.

-여러 면에서 민주화 세력 또는 민주개혁 세력의 처지가 곤궁한 것 같다. 무능하다는 평가도 많고, 과거의 민주화운동 세력, 예를 들면 노조나 운동단체들이 이제 기득권 세력화했다는 비판도 많다. 앞으로 민주개혁 세력 또는 진보 진영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한말씀 해달라.

=다 써버렸다는 탄식도 있다. 그 뜨거운 열망들이 식었다는 체념도 있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은 한 정치 연대기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자체의 퇴장까지도 책임지는 동력이 아닐 바에는 다 타버린 재가 되어도 좋다.

여기서 깊이 헤아려볼 이유가 있다. 진보란 미래 사회에서 좌편향이나 이데올로기로서의 개혁을 의미하기보다 문명으로서의 재앙을 의미하게 되는 사실 말이다. 나는 이 시대를 황홀하게 하는 문명의 여러 혜택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자본의 논리는 마르크스의 잘 맞지 않은 자본주의 필멸론과는 다른 쪽에서 그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다. 요컨데 문명이나 과학이 자본과 만나서 인류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나의 복제가 나를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임상수 영화감독은 선생님께 ‘부드러운 래디칼’이란 표현을 썼다. 이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현 시대 래디칼은 부드러워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함석헌 옹은 지난날 래디칼의 참 뜻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사상의 행위가 유연한 순환성으로 살아있기를 꿈꾼다. 극단은 사실인즉 속박이다.

-지난해 12월 한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이라면 정치적 발언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시인들은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고 보시나.

=이 세계나 사회에는 수많은 발언들이 있다는 원론이었다. 그 발언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발언이 행여 미리 지지자를 예상한 그것이라면 거기에 별로 의미 부여할 생각도 없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최근 펴낸 소설에서 현정부와 386 진보세력을 강도 높게 비판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이 또한 문인의 ‘정치적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

=문제는 담론의 공공성이나 누구의 강변이 아니고 어느 층의 대변이 아닌 것, 그런 높은 단계의 사회적 발언이야말로 역사 진행에 기여할 것이다.

-선생님께선 최근 언론 인터뷰 등에서 “차이들이 공존할 때다”,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을 위해 중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차이는 현실이자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차이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죽일 때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살아 있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다. 이런 차이들이 자발적으로 융합될 때 우리는 그곳을 낙원이라 할 것이다.

세계는 생존 경쟁이나 적자 생존으로만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주의 시대일수록 그 반대의 지혜인 상호 의존주의와 상보 상생주의의 생존방식, 독점의 논리를 관계의 논리가 압도하는 방식을 적극화해야겠다. 나의 부가 남의 빈이라는 그 부는 부정되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을 불러오는 행복은 범죄적이다.

-지난해 말 선생님의 시가 스웨덴에서 번역돼 호평을 받았고, 또 몽골에서도 번역되고 있다고 들었다. 올해 선생님의 시작과 번역 계획을 들려주셨으면 한다. 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이에 대한 소회를 부탁드린다.

=미국과 스페인,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 내 시집들이 각각 3천부 이상 팔리고 있다. 현지 시인들도 놀라워 한다.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2년 연속 ‘만인보’와 ‘순간의 꽃’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외국의 시집이 이런 경우는 없었다 한다. 오직 나는 내 문학에 묵묵히 정진할 뿐이다.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끝> 정리=박찬수 정치팀장 사진=강창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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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그뒤, 20년] 민주개혁세력 어디로 ① 최장집 교수
민주정부로서 노무현 정부 실패, 이 시점에 개헌 제기 매우 파괴적, 반민주세력 집권 가능성 운운해, 비판 막는 건 권위주의·비민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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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실패했다면 교체되는 게 당연”

올해는 1987년 6월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2월엔 대통령선거도 치러진다. 지난 20년 동안의 변화 속에서,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변화와 민주개혁 세력의 집권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어느 때보다 논란에 휩싸여 있는 민주개혁 세력의 갈 길을 살펴보기 위해, 민주화 운동의 원로로 꼽히는 세 분과 연쇄 인터뷰를 가졌다. 학계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종교계의 함세웅 신부, 문화·예술계의 고은 시인과의 인터뷰를 차례로 싣는다.

인터뷰 / 박찬수 정치팀장

최장집(64) 고려대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년간) 노무현 정부의 정책 내용과 방향이 민주화 세력의 기대에서 많이 벗어났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 정부’로서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최 교수는 “내용도 없으면서 다시 모여 재집권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정부가 실패하고 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교체되는 게 당연하다. 한나라당이라고 안 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고 여권의 정계개편론을 비판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오후 최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이뤄졌다.

 

» 최장집 교수

-노무현 대통령을 최근에 만난 적 있나?

=당선자 시절에 한번 보고 그 뒤로는 본 적 없다. 당선자는 당시 취임사 내용에 대한 자문을 듣고자 했고, 다른 교수 두 사람과 함께 만났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헌 제안하면서 그 명분으로 1987년 헌법체제 미비점의 보완·극복을 얘기하셨는데, 87년 헌법체제가 우리 사회 민주화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비판은 학계에서도 있어왔다. 87년 헌법체제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보시나?

=‘87년 체제’라는 것은 학계에서도 얘기되는 말이다. 민주화 이후 체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87년 체제란 말은 사태를 단순화하기 위해 서술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최근의 이 용어가 정치적으로 동원되면서 이데올로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87년 체제’ 대 ‘민주헌정체제’라고 하는 대립적인 형태의 담론을 동원해 한국 민주주의의 모든 문제를 87년 체제 때문으로 돌리는 식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위험한 효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87년 체제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하나는 운동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는 혁명적 단절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체제의 연속선상에서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요소가 일정하게 결합되어 운동과 제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운동이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동시에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국민들이 위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세력과 공존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곧 87년 체제의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여기에 돌리면서 뭔가 획기적으로 정치의 틀을 확 바꾸면 된다는 주장이 과도해지고 정치적 슬로건이 되면 근본주의의 문제를 부를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뭔가 이상적 헌법이나 제도가 있다는 발상도 위험하다. 모든 것이 87년 체제 때문이고 5년단임제 때문이고, 지역주의 때문이고 그래서 대연정하고 개헌해야 한다는 접근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이다.

-87년 체제가 있고, 그 이후에 드러난 문제점이 있는데 그 문제점들을 87년 체제의 책임을 돌린다는 말씀 같다. 설령 그렇더라도 87년 체제 이후 20년 지났고, 그 20년 동안 우리 사회가 바뀌면서 다른 이유에서도 문제점도 있고 담아낼 게 있다. 그런 점에서 헌법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 대통령 얘기처럼 5년 단임제가 87년 체제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정치문화 등 여러 잘못된 문화 때문에 단임제 폐해 커졌는데, 그걸 고치려면 비록 책임을 돌릴 수 없어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는데, 87년 체제라는 것은 하나의 정치, 민주주의의 틀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만들어졌던 균형점을 표상하는 틀이고, 제도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틀 때문에 정치가 발전하지 못했거나, 민주주의 발전이 제약 당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 내용을 뭐라 하든 87년 체제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를 정초시킨 제도적 틀이다. 그 위에서 좋은 정치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갈등을 해결해 가고 필요한 개혁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민주화는 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했던 제도와 틀 안에서 개혁과 발전을 해 가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 문제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갈등을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 갑자기 새로운 이슈나 갈등으로 치환하려고 하는 데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권위주의로부터 축적된 문제가 민주화로 폭발했다. 따라서 권위주의 하에서 억압된 여러 갈등, 사회경제적 문제, 남북관계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민주화이후 체제에 부과되었다. 그런데 이런 과제를 소홀히 한 채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 때문이다 라고 하면서 기존의 보다 중요한 갈등을 치환해버린 것이다. 나는 지역주의를 한국 사회의 중심적인 갈등,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7년 선거에서 민주 대 독재의 갈등을 치환한 것이 지역주의였듯이 지금도 현실의 중요한 갈등을 지역주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정치란 어떤 갈등을 선택하고, 어떤 갈등을 배제하느냐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파워게임이다. 현실의 중심적 갈등을 배제하고 새로운 갈등으로 대체하려 할 때 정치가 갖는 파괴적인 양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중요 균열, 구조, 표현의 자유는 억압되고 기회의 구조는 축소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방법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데,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정치 밖에서 외재적 제도를 부과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헌법이 잘못됐다, 단임제 때문이다 하는 식으로 정치 밖의 제도의 힘을 통해 안 풀리는 정치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사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든다. 대연정 시도도 같은 성격의 문제를 가졌다. 갑자기 반지역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불평등과 양극화 등 우리 현실의 실제 갈등을 이데올로기적 허상으로 대체하려 하고 선거를 통해 성립한 정당정치의 구조를 일거에 대통합하자는 태도의 연장선에 지금의 개헌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중심 과제가 지역주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노 대통령은 왜 이렇게 지역주의에 집착하는지, 한국사회의 제일 큰 문제가 지역주의라는 노 대통령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노 대통령은 자신이 호남과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들의 지역주의 혹은 지역주의적 경쟁 틀을 넘어서 지역주의 논리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따라서 지역주의 문제를 제기할 때 자신은 현재의 정치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부터가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악의 축이 아니며 점진적으로 개선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것은 지역주의의 문제라거나 난 지역주의가 아니라거나 하는 식의 접근은 자기합리화라고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게 주어진 헌법적 권한,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다. 정략적이지 않다는 점 보여주기 위해 임기만 고치는 원포인트 개헌하겠다고 했다. 국민들로서는 갑작스럽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인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대통령이 개헌 이슈를 지금 이 시점에서 제기한 것 자체가 매우 파괴적인 정치행위이며 해서는 안 될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방법 자체가 무슨 군사작전 하듯 하는 것도 문제고, 전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 나를 따를 것이냐 아니냐 식의 극단적 양자택일로 몰고 가는 것도 문제다. 대통령이 임기 1년 남겨둔 상황에서 제기해선 안 될 문제를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현임 대통령의 임기 말 제일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여러 분야에서의 정책추진을 순조롭게 마무리해서 성과를 남기는 일이며, 다른 하나 중요한 것은 대선을 관리하면서 여야 누가 집권하든 권력 이양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기 말에 정치의 게임룰 변경을 전격적으로 제기하고 공세적으로 나올 때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야당의 보수파들은 현임 대통령의 개헌추진을 일단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령 한나라당이 집권해 임기 말이 되었고 민주파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 가정할 때, 갑자기 한나라당 대통령이 나서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하면 야당이나 민주파 인사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경계하고, 정권 연장을 위한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 아닌지 의심하고 두려움 갖게 될 것이다. 이슈 자체가 제기되는 시점, 방법이 대단히 좋지 않다.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잘한 일이냐 못한 일이냐고 하는 것을 따질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4년 연임제나 총선 대선의 주기를 일치시키자는 개헌 내용 자체도 문제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다. 지난 4년 동안 민주정부로서 해온 역할,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 어떤 문제점을 가졌는지 총체적 평가를 부탁드린다.

=(길게 포즈, 아...) 글쎄요. 한마디로 뭐라 얘기하긴 어렵다. 대통령 선거 당시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여망이랄까 기대와 이 정부가 실제 수행한 정책의 내용과 성격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는 사실, 이것이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 대통령이 말하는 레토릭과 정책의 결과 사이의 격차가 큰 것이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경제적 정책이라 생각한다. 노정부의 경제정책이 어떤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 내놓을 수 있는 정책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한미FTA(에프티에이) 등이 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노무현정부가 개혁적 또는 진보적이다 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무엇보다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것의 하나는 노 대통령이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과 그것이 가져온 매우 부정적 효과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당정분리를 내걸고 당과 국회의 역할을 가급적 우회하거나 회피하려 하고, 청와대 중심의 정책 산출, 전문가 중심의 정책 산출, 관료 중심의 정책 산출에 너무 크게 의존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정치관이 대연정이나 지금과 같은 헌법 개정 추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얘기하면서 그 논거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배치되는 요소를 많이 갖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헌이 필요하다는 논리의 근본에는 대통령 권력 혹은 통치의 효율성과 안정성이 많이 거론된다. 어떤 정치체제든 통치의 효율성과 안정성이 필요하므로 그 자체는 나쁠 게 없다. 문제는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는 거다. 선거를 낭비로 보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현재 대통령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요구로부터 유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정과 비생산적 혼란이 결과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원인이 이러함에도 선거를 통한 견제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거나 통치의 효율성을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 때문에 문제이고 효율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부족해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나는 문제를 그 역으로 본다.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의 부족과 신자유주의의 과잉 때문에 문제라고 본다. 한국에서 선거가 지나치게 많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틀린 사실이다. 한국은 선거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가장 적은 나라의 하나이다. 미국을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은 선거가 우리보다 많고, 선거를 통해 결정하는 내용도 우리보다 훨씬 많다. 지방정부의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총장, 경찰서장도 선거한다. 작은 정책 하나도 투표하는 주가 많고, 수많은 형태의 주민투표가 있다. 독일도 16개 연방이 거의 매달 어디선가 선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선거가 잦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선거 많이 해서 문제라고 한다. 현재 상태에서 선거가 많다고 하고 그래서 선거를 줄이자고 한다면 사실 민주주의를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통치의 효율성만을 놓고 보면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보다 더 효율적이다. 지금 개헌론을 옹호하는 많은 주장들에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여기에 도전하는 주장이 많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선거와 같은 참여를 통해 뭔가 이뤄질 때 시민은 자부심을 갖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공화주의적인 충성심을 느끼게 된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환호하고 깃발 들고 나가고 뭔가 집합적 열망을 표출하려 하는 것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 개헌이 실제로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개헌론이 낳고 있는 문제는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관념이 약해진다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1년 동안 노무현 정부는 뭘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두 가지 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존의 정책과 제도를 잘 운영하고 관리해서 권력 이양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대통령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 다음에는 중요한 정책 사안들을 중심으로 리더십과 행정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고 서민생활이 개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정책 같은 것인가?

=부동산 정책도 중요하고, 교육정책도 중요하다. 실생활에 가장 밀접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푸는데 전력을 해야 한다. 덧붙일 것은 리더십의 윤리적 기초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실천해줬으면 좋겠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가혹하지만 임기를 끝낸 대통령에 대해선 관대하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으로서 좋은 정책, 리더십을 보여준 사안이 있으면 꼭 평가해준다. 레임덕은 어느 권력이든 존재하는 것이다. 실현될 수 없는 이슈를 난데없이 제기하거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뭔가 기본 구조를 바꿔보려는 시도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는 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윤리적 기반을 송두리째 해치기 때문에 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임기 말에는 많은 비판자들로부터 최악의 대통령으로 공격받았지만 퇴임 뒤에는 제대로 한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있는 대로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노 대통령은 현실을 거역해서 지금의 어려움에 처했다. 재보궐선거와 지난 지방선거의 결과는 민의의 평결이 어떤 내용을 갖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민의의 평결을 대통령은 존중하고 따랐어야 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정치를 승부를 거는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대통령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거냐 식의 극단적 선택을 국민에게 윽박지르는 거다. 이렇게 하면 합리적 비판이나 건설적 대안은 형성되기 어렵다. 지금 또다시 민주파들에게 비합리적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 개헌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한나라당 좋은 일 하게 그냥 둬야 하느냐, 한나라당으로 권력이 넘어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의 동원에 노출되어 있고 혹시 개헌론으로 반한나라당 연합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몽상적 정향에 흔들리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커지고 뭔가 합리적 방향에서 힘을 결집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4년간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로서 실패했다고 보나.

=난 실패했다고 본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너무 단정적일 수 있지만 적어도 지지자의 신뢰 상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등 객관적 정책수행의 지표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정부로서는 실패했다고 해도 남은 임기동안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서 윤리적 권위를 회복할 기회까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지난해 9월 <경향신문> 인터뷰 때 민주화 세력은 노무현과 결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매섭게 비판하신 이유가 뭔가?

=노무현 정부는 우리 사회, 전체적인 사회 세력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볼 때 민주개혁을 바랐던 사람의 지지를 받고 수립됐다. 그러다보니 노무현 정부는 민주개혁 세력의 대표가 되었고 실제 정책 내용과 수행결과는 민주개혁 세력에게도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선출된 정부는 자기를 지지해준 세력에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대표와 책임의 고리가 유지될 때는 그 관계가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고 집권 이후 정책 내용과 방향이 지지 세력의 기대로부터 벗어날 때 그 고리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나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민주화 세력의 기대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민주정부의 권위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권력의 운영 스타일도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386 세력을 부당하게 매도해서는 안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권력에 참여한 운동세력과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세력 간의 괴리는 굉장히 커졌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참여한 사람과 세력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정부가 민주화운동세력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모든 민주화 세력의 책임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주개혁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안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그 가능성을 확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정부와 분명한 차이를 강조하고 싶었다.

-올 12월 대선에서 민주개혁 세력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딜레마인데, 일부 시민사회 운동에선 어쨌든 보수 세력에 정권 넘길 수 없다며 정치세력화의 움직임이 있다.

=지금 현재 노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여당과 한나라당 간의 구분이, 이제는 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실제 정책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제 정책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전통과 이상에서 너무 멀어졌다. 투표의 결과에 있어서 서민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경향은 더 강해진 느낌이다. 그렇다고 민주세력이냐, 반민주 세력이냐 하는 식의 낡은 구분에 구속될 단계도 지났다. 반민주세력 집권 가능성을 운운하는 식으로 두려움을 동원해 비판을 가로막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이다.

나는 민주화 세력도 노무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나라당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것이 전제되어야 민주적일 수 있고 합리적일 수 있다고 본다.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열린우리당이든 새로 만드는 정당이든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비판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면 한나라당 도움 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아무 것도 없는데 한나라당 때문에 지지하라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최열 대표, 정대화 교수 등이 모여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세력에 정권이 넘어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움직임과 명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썩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이슈 들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문제를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제기된 이슈와 의제에 대해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이 그 대안을 조직하는 데 있다. 몇몇 명사들이 모여서 사회의 이익이나 갈등을 초월해 문제를 던지는 방식에 대해 난 회의적이다. 그런 방법으로 좋은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별로 안 생긴다.

-어쨌든 보수 세력한테 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생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민주세력이) 잘못했으니 (정권이)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고, 어떤 수를 내서든 (여권이) 재집권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다. 열린우리당 정계개편 논의의 시발점도 그런 것이다.

=그런 접근은 나는 맞지 않다고 본다. 민주파 또는 개혁파를 자임하고, 스스로 그렇게 규정한다고 해서 이 그룹들이 언제나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세력들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는다. 기존의 권위주의 체제는 우리가 개혁해야 할 과제와 그 내용을 이미 분명하게 남겨 놓았다. 분명한 개혁 과제와 이슈가 있는데 그간 이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 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달리해왔으면서, 무작정 보수파 집권만은 막자고 한다면 안 된다. 내용도 없으면서 정치적, 이념적 라인을 따라 다시 모여 재집권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어떤 정당이든 다수가 지지하면 교체해서 다수가 더 많이 지지하고 다수에 더 순응하는 권력을 만드는 것을 그 원리로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민주파로 자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책비전이 뭔지, 대안이 뭔지,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그걸 실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보수파 집권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꼭 재집권을 해야 한다고 한다. 재집권에 실패하면 역사의 죄를 짓는 것이라 하는데 그때의 역사는 뭐고 그때의 민주주의는 뭔지 모르겠다,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면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해 한국 사회가 오히려 후퇴했다고 한다.

=선거를 통해 집권정부가 실패했다고 다수가 평결하면 그것이 곧 민중의 평결이 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의 표현이라 해서 모든 것은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실패하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교체되는 것이 당연하다. 한나라당이라서 안 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

-그 10년을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후퇴로 볼 것이냐, 여기엔 민주개혁 세력이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사회가 진보한 측면도 있지 않나.

=총체적으로 다 실패했다거나 과거로 후퇴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꼭 했어야 한 의제에서 실패했다거나, 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면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중시 여기는 것은 한 사회의 시민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제, 즉 사회경제적인 분야에서 나빠졌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불평등해지고 서민이 빈곤해져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또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에 정권이 넘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퇴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후퇴 여부는 누가 집권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는 기준에서 봐야 한다. 개혁파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해 야당이 된다 해도 그 후 실력을 쌓고 다시 경쟁해서 승리하고 전보다 낳은 정책수행력을 보인다면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개혁세력의 패배가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의 정당을 더 강하게 만들고, 지지기반을 확대하려는 노력의 계기가 되고 좋은 정책 대안을 심화하는 기회가 안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청와대에선 ‘진정성’이란 단어를 많이 쓴다. 노 대통령은 선의로 하고 순수한데 진정성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선의를 국민들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모든 걸 정치적 계략에서 내놓는다고 본다. 노 대통령 집권 4년 동안 국민과 소통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노 대통령이 정치적인 계산을 해서 행동한 것으로 보나.

=진정성이란 말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자연인으로서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가치라고 본다. 그러나 정치일반에 있어 진정성이냐, 아니냐는 기준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오히려 못 보게 한다. 바꿔 얘기하면 진정성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가 사태를 이해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다 진정성이 있다고도, 또 다 없다고도 봐도 정치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진정성 여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번 개헌 이슈를 제기하면서도 대통령의 진정성을 자주 인용하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논리가 많이 동원되곤 하는데, 그건 의미 없는 얘기라고 본다. 일단은 정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 핵심은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의 분배효과를 다투는 데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설령 진정성이 없다 해도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면 정치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건 정치행위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제도화돼야 하고, 서로의 이해관계와 전략이 어느 정도는 투명하게 표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진정성이 없는 정치행위의 부정적 효과가 정치체제 내적 논리에 의해 제어되도록 하는 데 있다. 진정성을 정치행위의 이유로 제시하는 순간 그 진정성은 레토릭이자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 정치세계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조·중·동의 공격 때문에, 노 대통령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보수세력으로부터 공격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논법은 실패의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와 뭐가 잘 안 되는 원인을 조·중·동이나 보수세력의 저항, 이런 식으로 얘기하곤 한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국가권력은 굉장히 강하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이번에 개헌론을 제기하면서 현행 헌법 하에서는 대통령이 뭘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사실이 아니다. 한국의 헌법은 강한 대통령 권력을 제도화한 대표적인 유형이다. 현행 헌법 하에서 한국의 대통령 권한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보다도 강하다.

미국의 대통령은 예산 수립이나 집행을 맘대로 할 수 없다. 예산에 대한 권한은 우선적으로 하원에 있다. 인사에 대한 의회의 비준권도 우리보다 더 강하다. 사법부의 견제도 받아야 한다. 미국 헌법은 국가의 권력을 쪼개고 분할해서 견제와 균형의 틀 안에서 움직이게 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한국은 대통령이 강하지 의회가 강하지 않다. 한국 대통령의 경우 정치력만 잘 발휘하면 그가 제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는 매우 크다. 4년 연임제로 대통령 권력을 8년으로 연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질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국가와 대통령은 제도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매우 강한데, 이걸 더 강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보수 언론과 보수세력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민주정부와 대통령의 정치적 실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보수언론의 논리가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설득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하는 건 이제 보수언론만이 아니기도 하다.

» 최장집 교수
-한국 현실에서 4년 연임 대통령제보다 5년 단임제가 더 낫다고 보시나?

=그 얘기를 하려면 길게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 문제는 정답이 연임제니까 선택하라는 것 아니냐. 국회의원과 대통령 임기 맞추는 것도 정답이니까 찬성할거냐 반대할거냐, 이렇게 윽박지르는데.(웃음) 방법도 문제지만 난 개헌안 내용 자체도 찬성하지 않는다. 좋은 제도에 대해서는 늘 고민하고, 있으면 택해야 하고, 개헌은 필요하면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5년 단임제가 나쁘다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 아니며 4년 중임제가 반드시 좋은 제도인지도 증명할 도리도 없다. 헌법과 정치학이 만나는 영역은 가장 어려운 분야여서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의 기초가 튼튼한 대가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이 분야 전공자일수록,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일수록 제도효과에 대한 확신은 약하다.

당신은 어떤 제도를 좋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유럽적인 정부 형태를 선호한다. 지금 개헌안 제시의 모델이라는 건 엄밀히 말해 미국적 모델을 추수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미국의 제도를 따른다고 해서, 미국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한국에서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제도는 장점도 많지만 한국에서 그대로 시행하기 어렵다. 미국은 처음부터 입법, 사법, 행정의 견제와 균형을 지향해 만들어졌고, 연방제와 양원제의 구조 위에서 제도적으로 디자인 된 모델이다. 또 미국식 양당 제도는 한국에 들어올 경우 상당히 보수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4년 중임제와 총선·대선의 주기를 일치하는 것은 큰 정당들에게 유리하며 따라서 제3정당에게는 치명적이고 노동과 같은 계층적 이해가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것을 어렵게 하는 효과가 있다. 결국 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의 제도화가 어려워질 것이다. 헌법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제도적 토대이지만, 민주주의가 헌법에 의존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효과가 커진다. 민주주의의 대표성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제약하는 것이 헌법의 기본 목적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경시하는 것 같다. 헌정주의라는 말 자체에 대해 그래서 나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미국식 제도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면,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권위주의 때부터 지금까지 중산층 이상의 계층들이 정치에 과다 대표되고 엘리트 중심의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는데, 이걸 제도적으로 개혁할 수 없게 된다고 본다. 유럽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런 면에서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보다 광범위하고, 사회의 이해관계들이 다당제를 통해 폭넓게 대표될 수 있는 것이 유럽식 제도의 장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난 대표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일단 대표된 다음에야 책임이 부여되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표 자체가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굉장히 협애하게 제도화 돼있다.

유럽을 의회중심제라고만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의 준대통령제(세미 프레지덴셜리즘)는 대통령 중심제와 의회중심제를 결합한 체제로 작동한다. 대통령 중심제로서의 장점을 가지면서 다당제가 기능한다. 물론 독일이나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의회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의 리더십이 약하지 않다. 현대 정치의 추세는 의회중심제에서도 수상의 역할이 대통령처럼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집권도 점점 장기적이 되고 있다. 사회 이익이 폭넓게 대표되고 소수 이익도 잘 대표될 수 있고, 승자 독식 체제도 아니면서 리더십이 기능할 수 있는 체제라고 본다. 좋은 제도를 생각할 때는 유럽 제도의 장점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의의 문을 열어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세미 프레지덴셜리즘’을 흔히 이원집정부제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분권형 대통령제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준대통령제라고 한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같으면 대통령제에 가깝게 운영되고 서로 다르면 대통령이 정부형성 권한을 야당에 위임함으로써 사실상 의회중심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원집정부제라고 하면 잘못 번역한 것이다.

차제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지식인들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이번 개헌을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학자나 지식인들이 과도한 제도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떤 정치학자도 정치 밖에서 제도를 불러들여 정치가 좋아진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행 헌법 때문에 문제고 개헌하면 좋아진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이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정치인들은 정치가 잘못되면 제도적으로 책임지게 된다. 지식인들은 스스로 책임윤리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정치의 윤리는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데 있다. 진정성만 있다면 정당화된다는 것은 정치의 원리가 아니다. 설령 진리라고 해도 모두 말 되어져서는 안되는 게 정치다. 정치에 있어서 센세이셔날리즘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자꾸 더 센 이슈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표를 보다 현실화하면 좋겠다. 권력의 소유권을 둘러싼 선거경쟁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과정이고, 이를 잘 관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부의 과제라 생각한다.

정리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최장집 교수는 누구?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1980년대 이래 한국 정치학계의 진보적 흐름을 대표해온 학자로 꼽힌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조합주의, 과대성장 국가론 등 서구 학자들이 중남미에 적용한 정치학 이론을 한국 상황에 대입해 시민사회, 노동운동, 국가, 정당 등 한국의 정치현실을 설명하려는 이론적 노력에 천착해왔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때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그 자리를 그만둔 뒤엔 현실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연구 활동에만 몰두했다. 저서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1988),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6),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 <민주주의의 민주화>(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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