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정권 창출에만 매달리면 진보의 진정성 의심받아”
[1987년 그뒤 20년] 민주개혁세력 어디로 ③ 고은 시인 서면 인터뷰

 

 

 

» 고은 시인. 강창광 기자
고은 시인은 “이른바 진보 진영이 정권 창출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진보의 진정성도 의심받게 된다. 진보란 앞산 첩첩한 수구에 대한 고독이다”라며 “시민운동이나 조직, 노동운동이 너무 과체중이고 너무 이익집단화 함으로써 그 사회적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고은 시인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의) 민주적 역량 부족은 지적되어야 마땅하지만 지금 한국에선 어떤 천하 명군도 정치적 명답을 내놓기 어렵다. 이전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투명해진 것은 놀랍다”고 평가하면서 “노 대통령이 가장 아파해야 할 것은 한국의 부익부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곳이라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고은 시인은 건강상의 이유로 서면 인터뷰를 원했고, 지난 19일 질문을 팩스로 보내고 답변을 다시 팩스로 받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라면 먹으며 해온 민중운동 과체중에 정당성마저 흔들”

-올해가 87년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엔 어떤 변화가 이뤄졌다고 보시나. 우리 사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시나?

=두 젊은이 박종철, 이한열의 20주기이자 그 죽음을 극적인 동기로 삼았던 민주화 운동은 그때까지의 민주세력 실체인 재야와 학생만의 그것이 아니라, 시민 참여를 통한 하나의 종합운동으로 폭발한 것이 6월 항쟁이었다. 멀리는 70년대 반유신, 가까이는 80년 광주항쟁 이래의 커다란 결산이었다. 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출사표 전략회의 뒤 시내로 나와 서울역, 명동 입구, 동대문 일대의 시위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보도블럭을 뜯어 투석전을 지원하는 회사원이나 상인들의 뜨거운 저항을 목격하고 감격했다.

지난 20년은 시간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였고 카오스였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격동들이 담긴 정치적 포화상태가 된 것이다. 앞으로의 20년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오류와 가능성들이 귀납되는 시기가 되어야 겠다. 그래야 6월 항쟁에 하나의 고유명사를 짓게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4년 연임제 대통령제 개헌’을 제안했다. 여론의 반대에도 개헌안 발의를 2월에 하겠다고 밝혔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여론 지지가 낮아도 개헌안 추진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일까.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권위주의로만 체험하다가 낯선 평민주의에 대한 위화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을 스케치 한다면 이승만은 조선 태조였고, 박정희는 태종과 비슷하다. 신군부 대통령이라는 것도 국가를 군대조직체로 운영함으로써 절대 복종의 장군으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6월 항쟁 이후 문민이니 국민이니 하는 시대의 끝에 노무현이라는 ‘댓글 네티즌의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그는 큰 귀를 가지지 않고 큰 입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개헌 논의는 정치적 상상력에서 발단한 것인가, 즉자적인 현실 타파의 도발행위인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정권 말기의 수습정치 여지마저 없애기 십상이다. 당장 국회의 장벽 뚫기도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제 임기 마지막 해를 맞았다. 노무현 정권의 지난 4년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나. 노무현 정권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은 무엇이라 보시나.

=2만달러 소득이 눈 앞이다, 3천억달러 수출을 넘어섰다는 것은 성장주의 생각으로는 크게 평가해야겠지요. 그러나 국민 생활에 이같은 평가가 어떻게 직결되느냐는 문제는 별도이다. 아무튼 그의 성공론은 실패론의 대세로 실종된 점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처럼 국내·외적으로 십자 포화를 맞고 어린 아이부터 80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군중의 폭력성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민주주의는 일종의 타락이라고 본다. 지금 세계 각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현저히 후퇴하고 있는 것을 직시하면 우리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온 민주주의의 품위를 지켜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아파해야 할 것은 한국의 부익부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인도와 중국의 빈부격차라 해서 한국보다 못할 것이 없을 지경이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대의로부터 벗어났다”면서 민주개혁 세력은 노 정권과 결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의견을 어떻게 보시나.

=민주적 역량 부족은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노 대통령)가 민주주의 대의를 떠났다는 말은 찬성할 수 없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천하 명군도 정치적 명답을 내놓기 어렵다. 그렇게 우리 사회 각 영역의 유아독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투명해진 것은 놀랍다. 노무현의 매일매일은 우리 시대가 야생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는 당돌하고 거침없다. 그의 직설들은 누구의 충고도 받지 않는 오기로 보인다. 앞으로의 1년이 지나면 우리는 한동안 적막할 것이다.

“참여정부 성장 이끌었지만 빈부격차 최대국 아파해야”

-최근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 단체들에선 올해 대선이 이대로 가면 보수세력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까 보수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 단체 중심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

=현재 여당은 거의 속수무책인 듯하다. 바닥을 친다는 말이 있는데 바닥치고 일어날 힘이 없어 보인다. 대선 정국에 대한 정치공황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뜻밖에 한나라당의 대선 분열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데까지 파급될 공황이다. 들여다 보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3대의 민주화 정권 15년을 우리는 살아왔다.

이쯤에서 이른바 진보 진영이 정권 창출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진보의 진정성도 의심받게 된다고 본다. 진보란 앞산 첩첩한 수구에 대한 고독인 것이다. 이제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준다 해도 새로 등장한 정권이 지난 날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로 복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시대는 보수 진보라는 것을 소화해야 할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줄지 모른다.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민운동이나 조직, 노동운동이 너무 과체중이고 너무 이익집단화 함으로써 그 사회적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는 상태이다. 유신 시대의 민중운동은 라면 먹으며 해온 운동이다. 지금 전국의 시민단체가 몇 백개인가.

-뉴라이트를 어떻게 평가하시나. 이게 건전한 좌우 논쟁, 우리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뉴라이트란 이름만 내건 수구세력의 발호라고 보시나.

=미국 네오콘의 그 ‘네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는 안다. 한국의 뉴라이트의 ‘뉴’라는 것도 최근의 행태로 보아 매우 우려된다. 그것이 지난날의 수구에 지적인 장치를 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서 왜 우파는 극우파로밖에 표현되지 않는가. 그리고 미국의 우파는 미국이라는 세계 지배의 논리로서의 조국이 있고, 일본의 우파 역시 일본이라는 조국의 패권 확대에 투신하는데 한국의 우파는 이런 미·일의 우파에 종속되고 있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지 않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미·일에 의한 안보주의가 나 자신의 이념적 내면에 대해 남남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좌우 불화의 지속은 조선 후기의 여러 사화나 당쟁의 비극과도 닿아있는 봉건적 야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앞으로 노무현 정부 임기가 1년 남았다. 남은 임기 동안 노무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대통령을 안 한다, 할 생각 없다고 연거푸 말하고 있지만 그에게 남은 큰 과제는 남북 정상회담이다. 때마침 6자회담 재개의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나는 6자회담이 북핵문제 회담으로만 그치지 않고 동북아시아 상설기구로 유지 발전시킴으로써 장차 한반도 평화통일을 전담하는 국제적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유엔(UN)의 동아시아 기구와 같은 역할이 거기에서 있게 될 터이다. 정상회담에서 얻을 것이 많다. 북의 창조적 변화도 거기서 모색해야 한다. 비핵 체제로의 길은 대륙과 해양 두 세력의 담합이 아닌 민족 내부의 과제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와 있다. 책상정돈과 교실 청소가 남아 있다. 새로 공부할 교실을 남겨놓아야 한다.

-여러 면에서 민주화 세력 또는 민주개혁 세력의 처지가 곤궁한 것 같다. 무능하다는 평가도 많고, 과거의 민주화운동 세력, 예를 들면 노조나 운동단체들이 이제 기득권 세력화했다는 비판도 많다. 앞으로 민주개혁 세력 또는 진보 진영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한말씀 해달라.

=다 써버렸다는 탄식도 있다. 그 뜨거운 열망들이 식었다는 체념도 있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은 한 정치 연대기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자체의 퇴장까지도 책임지는 동력이 아닐 바에는 다 타버린 재가 되어도 좋다.

여기서 깊이 헤아려볼 이유가 있다. 진보란 미래 사회에서 좌편향이나 이데올로기로서의 개혁을 의미하기보다 문명으로서의 재앙을 의미하게 되는 사실 말이다. 나는 이 시대를 황홀하게 하는 문명의 여러 혜택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자본의 논리는 마르크스의 잘 맞지 않은 자본주의 필멸론과는 다른 쪽에서 그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다. 요컨데 문명이나 과학이 자본과 만나서 인류를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나의 복제가 나를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임상수 영화감독은 선생님께 ‘부드러운 래디칼’이란 표현을 썼다. 이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현 시대 래디칼은 부드러워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함석헌 옹은 지난날 래디칼의 참 뜻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사상의 행위가 유연한 순환성으로 살아있기를 꿈꾼다. 극단은 사실인즉 속박이다.

-지난해 12월 한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이라면 정치적 발언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시인들은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고 보시나.

=이 세계나 사회에는 수많은 발언들이 있다는 원론이었다. 그 발언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발언이 행여 미리 지지자를 예상한 그것이라면 거기에 별로 의미 부여할 생각도 없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최근 펴낸 소설에서 현정부와 386 진보세력을 강도 높게 비판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이 또한 문인의 ‘정치적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

=문제는 담론의 공공성이나 누구의 강변이 아니고 어느 층의 대변이 아닌 것, 그런 높은 단계의 사회적 발언이야말로 역사 진행에 기여할 것이다.

-선생님께선 최근 언론 인터뷰 등에서 “차이들이 공존할 때다”,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을 위해 중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차이는 현실이자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차이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죽일 때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살아 있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다. 이런 차이들이 자발적으로 융합될 때 우리는 그곳을 낙원이라 할 것이다.

세계는 생존 경쟁이나 적자 생존으로만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주의 시대일수록 그 반대의 지혜인 상호 의존주의와 상보 상생주의의 생존방식, 독점의 논리를 관계의 논리가 압도하는 방식을 적극화해야겠다. 나의 부가 남의 빈이라는 그 부는 부정되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을 불러오는 행복은 범죄적이다.

-지난해 말 선생님의 시가 스웨덴에서 번역돼 호평을 받았고, 또 몽골에서도 번역되고 있다고 들었다. 올해 선생님의 시작과 번역 계획을 들려주셨으면 한다. 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이에 대한 소회를 부탁드린다.

=미국과 스페인,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 내 시집들이 각각 3천부 이상 팔리고 있다. 현지 시인들도 놀라워 한다.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2년 연속 ‘만인보’와 ‘순간의 꽃’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외국의 시집이 이런 경우는 없었다 한다. 오직 나는 내 문학에 묵묵히 정진할 뿐이다.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끝> 정리=박찬수 정치팀장 사진=강창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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