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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매번 거침없이 토해내는 김훈의 냉정한 언어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욱 심란하게 할 것 같다. 작가 자신과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들을 혐오하고,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하며 자기 혐오에 시달려야 했다는 에필로그애 도달하기도 전에 심한 인간혐오에 이를 수 있는 소설이다.
나루터 사공의 아내 여옥이 강을 건너는 미친 남편을 만류하며 부른 옛 고조선의 노래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고, 교과서에서 접한 그 짧은 기억 하나로 책의 제목을 정하고, 도하를 만류하는 노래로써 이 험난한 세상살이를 냉혹하고 냉혹하고 또 냉혹하게 바라보는 글이다. 다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강... 바로 그 강을 건너지 말자는 작가의 손짓은 다소 비겁해 보이지만 어쩔 것인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을까?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더란 말인가.
신문 기자 출신이던 작가의 경력이 만들어 낸 주인공 문정수 기자의 시선이 그다지 길지 않은 300여 쪽을 잔인하게 추적한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노목희는 하나마나한 문정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말동무이며, 어정쩡한 의식화 과정에서 조직을 배반하고 해망으로 떠난 장철수는 몸을 팔아 가면서도 지킬 건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방서에서 일하다가 화재 현장의 보석들을 훔쳐낸 뒤 은퇴하는 박옥출은 지병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 낸 돈을 전부 쏟아내며, 이혼 후 식당일을 하다가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의 뉴스를 접하고 혼절하는 오금자는 내색하지 않는다. 방천석은 교통사고로 죽은 딸의 보상금으로 빚을 청산한 뒤 고향을 떠나며, 한국 남자에게 시집왔으나 부당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한 베트남 여자 후에는 왜 사는지 모를 삶을 억척스럽게도 살아간다. 문정수와 함께 일하는 욕쟁이 신문사 차장의 잡담마저 생활의 리듬이 되어가고 있을 때, 스위스에 교환교수로 떠난 타이웨이는 자신의 번역서 표지를 디자인 했던 노목희에게 유학을 알선해 주어 세상이 마냥 지옥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토리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을 추적하며 김훈의 글맛에 빠져서 이 책에 매료된다.
5년 전, 서북경찰서 관내의 영세민 밀집지역에서 존속 살해 사건이 있었다. 문정수는 수습을 마친 초임기자였다. 후처가 데리고 온 열다섯 살짜리 딸을 상습적으로 강간한 오십대 가장을 이십대 아들이 쇠절구로 쳐 죽인 사건이었다. 피살자는 건축공사장 잡역부였는데, 한 달에 20일은 일거리가 없었고, 아들은 퀵서비스 회사의 스페어오토바이 기사였다. 가족은 생활보호대상자의 차상위계층으로, 생계비 지원을 받지는 않았다.
방 두 칸짜리 임대아파트 건넌방에서 아들은 쇠절구를 끼고 앉아 기다렸다. 피살자가 학교에서 돌아온 의붓딸을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아들은 안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피살자의 머리통을 쇠절구로 내리찍었다. 쇠절구의 무게는 21킬로그램이었다. 피살자는 아랫도리를 벗은 채 현장에서 절명했다. 두개골이 깨져서 뇌수가 흩어졌고 아래턱이 떨어졌다. 실신한 딸의 얼굴에 피살자의 뇌수가 튀었다. 아들은 의붓동생의 머리를 끌어안고 얼굴에 묻은 뇌수를 닦아주었다. 아들은 범행 후 달아나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현관에 세워져 있었다. (19쪽)
이제는 무너져버린 저수지 뚝방에서, 노목희는 가끔씩 장철수를 만났다. 복합영농 하는 산간농촌 출신이며, 대학 선후배라는 근거만으로도 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젊음의 의리에 속하는 일이기도 했다. 저수지 뚝방에서 장철수는 늘 노학연대의 사업과 수배된 동창생들의 소식을 말해주면서 '이런 세상'을 괴로워했다. 저무는 수면을 바라보면서 노목희는 그의 괴로움이 어쩐지 보챔과도 같다고 느꼈다. 늦가을 저녁의 한기 속에서 장철수는 그 헐렁한 웃옷을 벗어서 노목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장철수의 옷에서 시큼한 몸냄새가 났고, 저녁의 수면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우면서 어두워갔다. (43쪽)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교회와 학교는 장례를 준비하고 친권자인 어머니가 나타나기를 대책없이 기다렸다. 담임교사는 어머니가 '고향에 갔다'는 말을 죽은 아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으나, 그 고향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문정수는 당직차장에게 현장 상황을 보고했다.
ㅡ개는 팔렸고 가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집단저항은 없어요.
ㅡ야, 문정수. 현장은 됐어. 애 엄마를 찾아. 엄마를 만나서 빈민가족의 해체 배경과 아이가 고립된 과정을 취재해. 아주 자세해야 돼. 이럴 땐 정책을 가는 것보다 디테일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 알잖아. 애 엄마를 찾아. (69쪽)
장물브로커는 절도전과 3범으로, 귀금속 소매업자와 재가공업자 양쪽에 선을 대고 있었다. 브로커는 장물의 프레임과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고 감정협회의 감정서를 붙여서 소매업자에게 넘겼다. 경찰의 장물수배망은 그의 유통망에 근접할 수 없었다. 그의 거래선은 서울 서남, 남동지역의 보석상과 부유층을 고객으로 하는 혼수전문상가에까지 닿아 있었다.
ㅡ내가 신고하면 당신은 끝장이고 나도 끝장이야. 당신이 신고해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우린 서로 믿을 수가 있는 거지.
한강 고수부지 공원 벤치에서 만난 브로커는 말했다. 박옥출은 물건을 가지고 나가지는 않았다. (110쪽)
ㅡ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의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라고, '인간'을 네 번씩이나 앞세워가며 소리질렀는데, 그떄 이미 배신의 조짐을 만인 앞에 과시한 것이며, 그가 말한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는 인간은 바로 장철수라고 창야 사람들은 말했다.
장철수는 경찰에서 풀려난 직후 창야에서 잠적했다. 그의 잠적은 그의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의 증거가 되었고, 그가 경찰에서 수배자들의 은신처를 불어버린 대가로 풀려났다는 소문에 사실의 지위를 부여했다. (161~162쪽)
방미호의 죽음은 교통사고였으나 그 파장은 컸다. 매립공사가 진척되어가자 반대운동에 대한 호응도는 낮아졌다. 공유수면 매립에 반대해온 지역 시민단체들은 물막이공사가 끝나가자 사실상 반대운동을 포기했다. 방미호가 방조제 도로공사 현장에서 크레인에 깔려 죽자, 시민단체들은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려냈다. 지역 환경운동가들이 시위를 재조직했고, 어업 보상금 액수에 불복해서 소송을 제기한 해안지역 주민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178쪽)
한밤중에 라면을 끓여서 나누어 먹으면서 대파와 달걀과 라면 국물과 파미르 고원에 관하여 주고받는 이야기는 하찮았지만 거기에는 하찮음 만큼의 위안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문정수가 놓쳐버린 것들, 혹은 놓아버린 것들을 향해서 괜찮아······ 내버려둬······라고 말해주는 일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는 사랑이라기 보다는 연민일 것이라고 욕실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노목희는 생각했다.
문정수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문정수는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아 발가락 사이의 물기를 닦고 스프레이 무좀약을 뿌렸다.
ㅡ미안해. 추잡해서. (221쪽)
공항 청사에 딸린 호텔에서 최인수와 후에는 첫날밤을 치렀다. 서울행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 9시에 출발 예정이었다. 최인수는 프런트에 아침7시 모닝콜을 부탁했다. 최인수는 베트남 말을 몰랐고 후에는 한국말을 몰랐다. 성교는 밤11시에 끝났다. 짧은 성교였다. 우기의 밤은 무덥고 끈끈했다. 후에는 욕실에서 땀을 씻었다. 최인수는 에어컨 눈금을 올렸다. 둘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최인수가 담배를 피웠다. 후에는 바다를 건너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생각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난 후에는 일찍부터 처녀가 아니었다. (265쪽)
병원 직원이 장철수가 누운 침대를 제2수술실로 밀고 들어갔다. 마취된 장철수의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다. 인접한 제3수술실에는 박옥출이 마취되어 있었다. 장철수는 옆 수술실의 박옥출을 알지 못했고, 박옥출도 장철수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사소한 인연도 없는 타인으로 인접 수술실에서 마취되어 있었다. 의사가 장철수의 옆구리를 가르고 복막을 열었다. 장철수의 살점에서 경련이 일었다. 장철수가 혼수상태에서 입맛을 다셨다. 장철수는 복막이 열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의사가 절개구에 복강경을 들이댔다. 장철수의 복막 안쪽이 비디오 화면으로 확대 복사되었다. 화면에서 붉고 검고 푸른장기들과 흰 기름덩어리들이 꿈틀거렸다. 의사는 장철수의 옆구리에 열린 절개구와 비디오 화면을 번갈아 들여다 보면서 시야를 확보했다.
의사가 긴 집게를 절개구 안으로 넣어서 장철수의 신장을 끌어냈다. (307쪽)
방미호의 영결식 장면에서 들려오는 312쪽의 찬송 소리가 공무도하의 역설이 되어 들려오는 것도 인상적이다.
강 건너편 언덕에서
주님 나를 손짓해 부르시네.
나는 건너가리니.
주여 못 박힌 그 속으로
내 눈물 닦아주소서.
강 건너로 미호가 떠난 뒤 아버지 방천석은 빚을 청산했고, 환경운동가들은 명분을 얻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럴까?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