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김규환 지음 / 김영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그의 과거는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즐겁게 이야기 한다. 죽을 각오로 하면 안될 것이 어디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즐겁다. 즐겁지 않은 과거를 즐거운 현재와 미래를 위해 투자해 왔기 때문이다.
기업인수합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대우명장의 자리를 벗어나 두산인프라코어 명장으로 거듭나야 했던 위대한 인물 김규환...

'Happy700'을 지자체의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강원도 평창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쾌적한 고도인 해발 700m의 산골이다.
이른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던 반공소년 이승복이 초등학교를 갈 때 이십리 길을 걸어다녔다고 하지만 그보다 여섯살 많은 김규환 어린이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가난한 화전민 아들로 태어나 산길따라 70리를 등교길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자전거로 30리 포장도로를 달렸을 때에도 족히 30분은 걸렸던 기억해 보면 70리(28Km) 산길을 매일 걸어 다닌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아무리 서둘러 나서봐도 지각과 지각을 거듭하던 소년 김규환은 결국 일요일 포함 3일 연속 지각으로 등교해본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낫으로 탯줄을 자를 때 어머니를 팔을 붙잡고 있어야 했던 소년 김규환은 그후로 소년 가장이 되어 병든 어머니와 핏덩이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난다. 그때 떠나지 않았더라도 일년후인 1968년에 이승복 사건의 후폭풍으로 모든 화전민들이 소계령에 따라 산을 떠날 수 밖에 없던 사연도 있었으니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날 운명이었었다.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대구 남선냄비라는 공장에 취직했던 소년은 어느 더운 여름날 어머니의 죽음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무더운 여름날, 대구의 허름한 셋방에서 썩어 가는 어머니의 시신을 어찌할 바 모르고 지켜봐야 했던 소년... 뒤늦게 악취에 의해 사실을 알게 된 동사무소 직원들이 달려와 장례를 치뤄 주었으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무원을 비난한다 해도 그에게 공무원은 언제나 고마운 사람들 뿐이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기 보다 감사하는 법을 먼저 생각하는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한 많은 청춘에 죽어버렸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었다.
죽은 엄마를 생각하면 한 없이 슬펐던 손년은 2살 짜리 여동생에게 아이스께끼 하나 사주면서 죽음을 결심한다. 몇 푼 있지도 않은 돈으로 동생에게는 아이스께끼를 사주고, 자신은 자살을 생각하며 쥐약을 산 것이다. 맛있게 아이스께끼를 먹는 천진한 동생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유언을 하던 열다섯살 소년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간 아이스께끼의 막대기가 그의 목구멍을 찔렀다. 말도 못하는 동생이 오빠의 목구멍에 막대기를 쑤셔 넣은 것이다. "캑캑~ 야! 문디 가스나야... 뒤질 뻔 했다 아이가~!!" 그렇다. 자살을 막는 확실한 방법은 자살에 앞서 목숨을 위협하는 신체적 고통을 주는게 꽤나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
그때 목젖을 건드리던 막대기 하나는 원효대사의 해골물 못지 않은 깨달음을 준 것이다. 소년 김규환은 그때 결심한다. "그래! 죽을 각오로 살면 안될 게 어디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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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희 2011-06-23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아침이면 늘 바쁘게 아침준비,아버님 점심 저녁 우리부부 도시락준비로 정신없이 바쁜데
강사가 꿈인 나에게 남편이 한번 '아침마당'보라고 하기에 얼른달려가서 보니 거의 마지막 부분이어서,출근해서 컴 검색하니 너무나 대단한 분이고 나의 어려운 고통은 오히려 작아지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숨 걸면 못이룰일 없다, 준비해야 기회를 잡을수 있는것,....감동 감동입니다.
네이버-열성의 사는 이야기-에도 들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