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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 소녀
헬렌 오이예미 지음, 박상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밀랍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달려가던 신화 속의 이카루스...
공교롭게도 내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던 토요일 아침의 트렁크 팬티 브랜드 또한 이카루스...
이 소설은 어떤 이카루스일까?
18세 영국 소녀가 대입을 준비하며 가볍게 쓴 소설인데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조지오웰스러운 1984년생으로 지금은 20대 중반의 전업 작가가 되었다.
책날개를 펼치면 그녀는 두툼한 입술에 짙은 피부가 매력적이다. 그렇다. 바로 흑인 소녀다. 나이지리아 이민2세라고 한다. 나이지리아는 인구가 무려 1억5천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19세기 초에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가 1960년대에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곳이다. 소설 속의 나이지리아 풍경을 읽다 보면 성공회가 등장하는 등 영국과 친밀한 설정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것도 영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한 소녀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벽장 속에서 고민하는 취미를 가진 주인공 제서미(제스)는 여덟 살이다.
친구들은 '이상한 아이'라며 상대도 해주지 않으니 학교에서는 늘 왕따다.
엄마는 그런 소녀를 데리고, 회계사인 백인 남편과 함께 머나 먼 친정으로 여행을 떠난다.
비행기 안에서 제스는 골을 부렸다.
나이지리아 때문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이지리아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19쪽)
처음으로 만난 외할아버지는 소녀에게 나이지리아인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고 사랑을 주지만 점점 더 소녀는 혼란스럽고,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소녀의 마음도 헤아려 주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난생 처음 제대로 된 친구가 찾아왔다!
"내 이름은 티티올라야." (64쪽)
신비로운 소녀 티티올라에게 발음하기 편한 이름 '틸리틸리'를 붙여주고 두 소녀의 우정은 시작된다. 제스는 틸리틸리로 인해 어른들이 해결해 주지 못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거듭나지만, 이제 틸리틸리는 제스의 새로운 친구 관계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악의적으로 변해 간다.
"틸리틸리는······ 실재하는 사람일까?" (204쪽)
어느날, 재스는 자신이 틸리틸리를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틸리는 사람 만나는 걸 싫어 했고, 정작 가족이나 그 누구도 틸리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혼란에 빠진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와 같은 이중자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애 이름은 펀이었어." (219쪽)
대단한 스토리 탤링... 재스는 틸리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죽은 쌍둥이 동생에 대한 사실을 듣게 되며, 그것을 전해 들은 부모는 재스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놀란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소녀 재스가 느끼는 성장통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점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녀의 감수성은 점점 예민해져만 간다.
"때때로 엄마는 내가 어떠어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이를테면 나이지리아인이 되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저는 그렇게 바뀌고 싶지 않고 그럴 수도 없어요. 그러면 아플테니까요." (333쪽)
이야기는 결국 축복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만...
10대 소녀의 감성이 자아낸 몽롱한 기법으로 인해 다이나믹한 마무리를 향해 달려 간다.
표지가 특히 멋스러운 '이카루스 소녀'는 헬렌 오이예미라는 독특한 작가 이름도 끌렸다.
다 그렇지 않지만 며칠 전에 읽은 '다이어트의 여왕'이나 'X형 남자친구'와 비교할 때 이 출판사의 외국소설은 국내 소설과 달리 탄탄하고 소장하기 좋은 재질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말하면 괜히 두껍기만 하고 허술해서 대를 물려 전하기에 허섭한 책들에 대한 경멸이다.
어쨌거나 내가 처음접한 헬렌 오이예미의 소설은 몽롱했고, 책의 재질은 우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