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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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9살에서 13살 사이에 만난 '아이들'은 늘 내 머리 위에서 스팀이 피어오르게 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징징 거렸고, 짜증나게 만들었으며, 같은 어린이였던 나를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괴물'같은 존재였었다.
    어릴 때의 아이들로 인한 안 좋은 추억 - 그들로 인해 애꿎게 어른들한테 혼났다거나,
    나도 어린데 어리광을 피워보지 못했다거나 하는 그런 유치한 이유들 말이다 - 때문에
    나는 어느새 '아이들은 정말 싫어!' 하는 생각을 가지곤 했었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어린애니까)
   
게다가 어릴 때 부터 동년배 친구들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몸의 크기는 비슷한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들과 달랐기 때문일까.
    남들보다 어른이 빨리 된다는 것은, '아이구, 얘가 조숙하네' 하고 어른들의 칭찬이
    따르는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쟤는 뭐야' 하고 동년배들의 따돌림이라는
    슬픈 점도 있기에. 그것은, 지금의 나, 그러니까 자라지 못한 -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
    어린애를 안에 품은, 서투른 그러나 지독하게 냉정한 어른이 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2004년, 처음으로 어떤 작은 소녀가 내게 그런 쓸데없는 고집을 조금 부서트린 경험이
    있었다. 그 소녀는 글쎄, 몇 살 쯤 이었을까? 아마도..한..초등생 저학년? -_-
    (7,8살 정도?)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처들어 와서는 내게 초롱초롱하고 이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아주 뚫어지게. 그 당시 같이 일했던 어떤 동료가 데려온 딸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던져놓고 자기는 일 하러 가버린 것인지!!!! ㅡ.,ㅡ 
    나는 무시하고 계속 일하려고 했지만, 소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그 어떤 레이져
    보다도 강렬해서 결국 나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내 옆머리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그 소녀한테, 

    "심심해..?" 

    소녀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던 걸로 기억난다. 
    나는 내 일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소녀에게 A4 종이 1장과 아무 결제도장이나 주면서 말했다. 

   "이걸 찍으면서 놀아." 

    어린 소녀에게 색연필 대신 결제도장을 주면서 찍고 놀으라니, 지극히 나답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그랬지만 나는 어린 아이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들은 늘 나를 좋아해곤 했다. 그렇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소녀는 재밌게 도장을 찍으며 놀다가 A4 1장이 다 채워지면 내게로 왔다.
    그럼 나는 새로운 종이를 주었다. 적어도 A4 1장을 채우는 시간 만큼은 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나중엔, 도장 찍기가 질렸는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난 일해야 하니까.
    그래서 펜을 주며, 

    "자, 그럼, 집과 나무와 꽃을 그려봐." 

    그럼 소녀는 눈썹 휘날리게 그려가지고 왔다. 나는 칭찬해주고 또 다시 다른 제안을 하면
    소녀는 또 그림을 그려왔다. 그 소녀는 거듭되는 나의 칭찬에 기분이 아주 흡족해졌고
    왜 그런지 나에게 엉기기 시작했다. 굳이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올라오려는 것이다.
    소녀는 그것이 - 내게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는 것이 - 좋아함에 대한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끝끝내 내 허벅지 위에 그 작은 몸을 잘도 포개어 앉는 것이다.
    결국, 나는 소녀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꼴로 일을 하고 말았다.
    소녀도 고집이 있었고 나도 고집이 있었다. 소녀는 내 얼굴을 흐믓한 표정으로 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러던가 말던가 결국 나는 다리가 저려서 일을 중단하고 같이 놀아줘야 했다.
    소녀는 묘한 눈빛을 하고는 웃어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뜻이었겠지.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덩치가 클까. 나이는 나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이 책,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은 아마도 그 전에 선물로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왜 이런 책을 나에게 선물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언제나 자유분방하지.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면서 살아." 

    그랬던 이유였을까. 나를 그 소설속의 아이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나도 그
    소설처럼 동화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던 것일까. 지금도 고개를 갸웃거리긴 하지만
    이 책을 지금에서야 읽고 난 후의 기분은, 그 때 내게 이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소녀처럼
    아주 흡족한 상태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다.  

    '가브리엘 루아'가 실제로 했던 교사 생활을 바탕으로 쓴 중, 단편들의 글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바로 앞에서 상영되는 작은 드라마같이 이쁘고 동화스럽고 재밌으며 다정했다.
    고작 다섯 살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이 이쁘고 젊은 여선생님에게 드릴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자신의 부모들을 달달 볶는 것에서의 오는 순수함과, (집요함과 더불어)

    "저의 엄마가 선생님의 양말을 뜨고 있어요. 정말이지 잠시라도 한 눈 팔면 안된다니까요.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또 어딘가로 놀러갈 거에요." 

    "저는 아빠한테 분명 2파운드짜리 초콜렛을 달라고 했어요. 1파운드짜리는 모양새가 없잖아요?
     아빠가 아직 망설이고 있는 것 같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2파운드짜리로 달라고 강조했거든요."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눈발이 날리는 밤, 자신 집에 방문했던 선생님을 베를린 마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달리다가 마을이 보였다. 선생님이 '이 즐거운 시간이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워 하자, 14살 남자 아이는 말 고삐를 돌리며, 

    "그럼 다시 되돌아갔다가 다시 이 길을 달릴까요?" 

    그 나이 청소년들이 그렇 듯,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복장과 어른같은 섬세함을 지닌 채 아직은
    서툴지만 나름대로의 따뜻한 배려심을 발휘해 보이는 모습들은 나를 정말 즐겁게 해줬다.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종달새처럼 노래를 잘 부르며 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듬어 주는 아이, 임신만 하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 혼자서
    모든 집안을 꿋꿋히 하는 집 보는 아이, 틀에 박힌 교육 보다는 산과 들로 다니면서 자연에서
    인생을 배우려는 아이... 

    1900년대 초이기 때문일까.
    그 당시 아이들의 순수함과 다정스러움, 솔직함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여교사의 부드러운 마음이
    따뜻한 코코아 한 잔 마신 것처럼 너무나 편안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아이들은 '순수함' 그 자체 만으로도 이쁘다는 것.
    입으로는 '난 얘들이 싫어'를 주절거리지만 막상 내 눈 앞에 있으면, 어느새 그들과 같이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딱히, 내가 그들을 '어른스럽게' 이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처럼 똑같이
    어린애기 때문에 같이 놀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게 좋은가 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들은 외계 어린이인 내가 좋은가 보다. 

    아마도, 어느 때고 어떤 애를 만나도 그들은 또 다시 나와 놀자고, 내게 장난치느라 나를 잡고 있는대로
    흔들어 대겠지.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딱 하나 뿐이야. 같이 노는 것.
    저 여교사처럼 어른스럽게 애들을 이뻐하는 법은 모르거든.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달라진 게 있다면, '모든 얘들이 다 짖굳은 건 아니잖아'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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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 어린이'란 표현이 맘에 들어요. 악동의 눈빛을 갖고 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도 지을 줄 아는 엘신님에게 딱이에요.^^
어린 아이 에피소드와 이 책에 대한 감상이 잘 어우러져 있네요. 읽으면서 내내 잔잔하게 웃을 수 있었어요. ^^*

L.SHIN 2009-12-21 13:27   좋아요 0 | URL
푸흐흐흐...
정확히 보셨네요. '악동의 눈빛'
온통 장난칠 궁리만 하고 있는 제게 딱인 별명이랍죠.^^

302moon 2009-12-2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적 그랬던 거 같아요.
꼬맹이였을 적에는 동갑의 친구들과 거의 못 어울리고,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나 오빠들과 더 떠들며 놀았던.
새 친구들과 사귀었어도,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멀어지거나,
그들 쪽에서 서서히, 날 멀리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제 어설픈 소설에서 살짝 풀어낸 적 있는데,
혹 읽으셨을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