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에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하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소프트하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고.
   말로의 말이야." 

  주인공 슌페이의 말이다.
  그는 중학생 때, 챈들러의 추리소설 속 인물 '말로'에 의해 탐정이 된 엉뚱한 사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인생도 스릴과 멋진 모습으로 가득찰 줄 알았건만,
  허구한날 하는 것이라곤 실종 동물 찾기의 연속임에 입이 비죽 나왔음에도
  늘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지치지 않는 탐정 지망생'이랄까.(웃음) 

  만화나 영화 주인공을 좋아하는 어린 소년팬처럼 그는 늘, 소설 속 탐정을 흉내내며
  그 뜨거운 여름날 태양 아래 숲과 공원 등에서 동물들을 찾으면서도 멋부린 양복을
  벗지 않는 -  쓸데없이 고집쟁이인 그는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사건에 기꺼이 휘말리고,
  동물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건에 뛰어들어 '본의 아닌' 고아가 되어버린 개를 위해
  위험도 무릎쓰고 떠맡아 키우는 등 의외로 부드러운 면을 가진 그는 자신의 입버릇처럼
  '하드하게 그러나 소프트하게' 살아가는걸까. 

  완숙계란 

  생각해보았다. 왜, 굳이 계란과 연결지어 '하드보일드生'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계란의 껍질은 내용물을 뜨거운 물 속에서 완전히 지켜낼 정도로 적당히 단단하고
  내용물은 먹기 좋게 적당히 부드러워서일까?
  개인적으로는 목구멍을 질식시켜 버릴 것 같은 단단한 노른자의 완숙보다 부드러운 반숙이
  더 좋긴 하지만, 중심부터 겉표면까지 통일된 노란색으로 자기 색을 고집한 완숙의 노른자가
  어설프게 익어서 흐린색부터 진한색으로 변화되는 반숙보다 완벽해 보이기는 하다. 

  슌페이도 말로에게서 배운 말이기는 하지만, 공감을 안할 수가 없었다.
  하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니. 세상에 쉬운 인생살이는 없지만 또 그렇다고 온통 불가능한
  것만 있지는 않으니까, 적당히 단단하고 적당히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단단한 상태로 흐믈흐믈 자신의 모습을 만들지 못해 우왕좌왕할 내용물을 지켜내다가
  때가 되어 껍질은 깨지고 바들바들 윤기나고 결점 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며 태어나는
  완숙 알맹이는 부드럽지만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유지하지.
  소프트하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니. 처음엔, 이게 뭔소리야?
  그러나 곧 알게돼. 강하게 살아야돼. 험난한 세상살이 빈틈을 보이면 안된다구.
  그렇게 자신을 달달 볶으며 살아가긴 해도 정작 타인에게는 또 부드러워야 멋진 남자라고 믿는
  그러나 결코 가식이 아닌 진심의 배려와 이해가 필요한 우리 내면의 소프트, 소프트. 

  솔직히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지루할까. 또 내가 예쁜 표지와, 약간의 코믹스러운 책 내용 발췌분을 읽고
  충동질을 했구나, 아뿔사' 싶었다, 처음에는.
  그러다 중간부터 제법 그럴싸한 사건이 동물과 연관되면서 '악' 하고 책을 집어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해주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이게 중요해. 내가 책을 '먹지' 못하고 '읽었다'라는 것이)
  하지만 가만히 보면, 슌페이와 여든살이나 먹은 최고령 비서 아야와의 옥신각신 투닥거리는 대화에서의
  유머라든가 은근슬쩍 아야의 입을 통해 삶에 대한 교훈적 메세지는 그나마 나쁘지는 않았어.  

  나의 계란은 어디까지 익었을까?
  익을 생각은 안하고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노른자와 흰자가 섞여 버리는 엄청난 혼돈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껍질이 사회적, 표면적 성격 혹은 외모 그리고 그 자신을 지켜내는 세상살이에 대한 바리케이트라면 흰자는
  의식할 수 있는 내면, 자아, 진짜 모습쯤 그 어디일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의식, 초자아쯤 되는 노른자가 어떤 모습이냐지.
  너무 크거나 작아서 현실과 연결되는 중간다리 흰자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잖아.
  어쨌든 흰자는 노른자를 품에 안고서 살아가니까.
  노른자가 아예 없거나 노른자만 있는 경우도 있겠지. 대체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그런 부류들. 

  인생은 계란이야.
  익어보지도 못하고 와장창 깨지는 경우도 있고,
  너무 익어서 노른자와 흰자 사이에 독기를 품은 녹색 띠를 두루고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가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적당히 익기는 했는데 껍질이 깨지지 않아서 그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어쨌거나, 하드하게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고, 역시 소프트하게만 해서도 살아갈 수가 없어. 
  하드와 소프트의 환상적인 만남이 필요한거야.
  필립 말로나 슌페이만이 주절거릴 일이 아닌거야,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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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5-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한 필립말로와 슌페이가 사랑하는 필립말로 모두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속 주인공 필립말로맞습니다. 하드보일드의 대표적 소설이자, 담배와 술을 즐기는 거친 남자 탐정의 전형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많이 인용되지요 ^^
전 아직 설익은 계란인듯~
참 어찌 글도 맛나게도 쓰는구려.

L.SHIN 2009-05-31 22:4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전자제품일 것 같은 이름과(필립) 담배 이름일 것 같은 이름의(말로) 합성은
그다지 흔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웃음)

전 아직 익기 전의 날계란입니다. 푸하핫,

2009-05-29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31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6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8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