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아요. 우린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고, 가끔 전화 통화를 했으며 한 두번 만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아인 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정수리 부근이 파르스름했던 기억이 나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속엣말을 못하는 사람의 머뭇거림과 이제는 재생을 할 수 없는 테이프가 기억이 나요. 그리고 여전히 가끔씩 머리에 꽂는 큐빅달린 머리핀도. 

 우리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생일인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받고 며칠이 지나자 불룩한 편지봉투가 배달됐죠. 편지 봉투 속엔 자신이 고른 노래들이 빼곡하게 담겨진 테이프가 있었어요. 미안하게도 전적으로 내가 다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테이프의 속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제목과 가사를 적고,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을때는 투박한 맘이 정해져 가슴이 찡해지고 말았지요.  

 어느 날엔가는 자신이 직접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가 실려있기도 했고, 시를 녹음하기도 했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두서없이 들어있기도 했죠. 상큼하거나 톡톡 튈 정도로 센스있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맘이 참 예뻤어요. 상큼하고 톡톡튀는걸 해줄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인 저도 가끔씩 그 아이에게 테이프를 선물하기도 하고, 시나 노랫말을 편지지에 빼곡히 적어 보내기도 했죠. 그 아인 그것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모은 테이프가 5개. 남녀관계의 일반적인 패턴대로라면 우린 몇번을 더 만나 서로의 맘을 끌어보려고 하거나 상대의 맘이 어떤지 궁금해 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 아인 그 아이대로 난 나대로 서로 평행선만 긋고 있었어요. 테이프를 다섯개 보내고 난 뒤 그 아이는 이제 연락을 못한거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렇게 짧게 끝난 편지 속엔 돌돌말린 종이가 있었어요. 그 속에 머리핀이 들어있었구요. 머리핀은 여전히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카세트 역시 뽀얀 먼지를 먹으며 서랍 한켠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때의 그 아이는 조금 특이했던 이름 말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컴퓨터에 있는 노래를 간추려서 굽고, 자판을 튕겨 평하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도 요새는 이런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보다 어렸던 내가 자, 아날로그식으로 살아볼까 했던 것도 아닌데 속속들이 느리고 한번씩 숨을 참고 있다 훅하고 내뱉는 느낌이 드는건 그 당시의 소통 방식때문이었겠죠. 지금은 그때보다 즉각적이고 신속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서랍 속을 채우며 먼지를 먹고 자랄만한 것도 없고, 배달이 안 되는 편지로 애가 타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죠. 무형의 파일이 왔다갔다하고, 메시지는 숨찰 정도로 짧죠. 가끔씩은 자신의 취향을 곤고히 해주는 물건들을 위풍당당하게 짊어지고 등장하는 사람의 옆에서 '왜 나를 만나는걸까.'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혹은 각각의 네트워크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보다는 좀 딱하단 생각도 들구요.

 뭐가 좋다, 옳다란 기준은 없지만 왠지 난 그때가 좀 그리워요. 지문이 잔뜩 묻은 편지봉투를 끈적거리는 손으로 뜯는 순간이, 지웠다 돌렸다 다시 녹음해댄 테이프를 빨리감기, 되감기, 정지, 다시 재생을 해대며 들었던 순간이, 삐삐 전에 있던 사서함(혹시들 알아요?)에 시를 녹음해주고 조용히 고백을 했던 순간이, 고백을 한 다음 날 부리나케 다시 사서함으로 달려가 지우려다 들었단 그 한마디에 얼굴이 시커먼 다크서클로 뒤덮이던 순간이, 무전기처럼 생긴 무선 전화기를 어떻게 하면 내 방에 숨겨서 전화통화를 할까 고민했던, 그게 그런대로 내 세상을 덮은 색이 되던 그 순간이 가끔씩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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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2-08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기억이 나는군요.
저도 어릴 때는..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선곡해서, 일일히 10여장의 CD에서 하나의 테이프로 더빙한 후,
정성스럽게 손으로 제목과 가수를 적어서 선물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죠.
공테이프도 최고급만 사고..그렇게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선물하는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요.^^
그랬던 내가..요즘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이젠 테이프 데크가 있는 오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아서 그 선물도 힘들겠죠?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삐삐 소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자, 아치님의 아날로그에게는 ☆☆☆☆☆

순오기 2009-02-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내가 잘가던 클래식 다방의 디제이 친구가 내가 원하는 곡만 6개의 카세트네이프에 담아준 걸 아직도 갖고 있어요. 아마도 L.SHIN님의 아나로그 이벤트에 올라온 사연의 종합편을 내가 다 갖고 있을 듯... 더구나 인증샷이 가능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죠.^^

L.SHIN 2009-02-09 05:10   좋아요 0 | URL
인증샷 요청입니다.(웃음)
그러니까, 오기님의 아날로그도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어서어서~

Arch 2009-02-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그그 최고급 공테이프 나도 알아요. 속지 자체의 질감부터가 달랐죠. 삐삐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불편했는데도 그때는 세상과 연결된 끈같았죠. 엘신님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기술이 불편할 틈을 안 주는 것 같아요.

순오기님, 제가 감히 상상컨대 우리 순오기님은 이벤트에 응모되는 작품의 면면을 살피다 아날로그 종합편 사진전을 떡하니 열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인증샷으로 이벤트계를 평정, 저같은 피래미들은 달나라로 보내버릴 강력한게 있을거란 짐작. 아님 말구요~ ㅡ,.ㅜ; 좀 더 자야겠어요.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

L.SHIN 2009-02-09 05: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불편할 틈을 안준다라..그렇다해도 요즘, 전 너무 게으르다구요. ㅜ_ㅡ

참, 내가 말했던가요? 아치님의 지금 이미지 무척 마음에 든다는거.(웃음)

순오기 2009-02-09 11:25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역시 아치님은 똑똑해!
글발로 따라 잡을 수없으니 인증샷으로 평정할랍니다!ㅋㅋㅋ

Arch 2009-02-09 13:05   좋아요 0 | URL
저도 열게으름 해요^^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자기 좋으라고(웃음)

순오기님 2년만에 처음으로 똑똑하단 소리 듣고 우쭐해져있어요. 히히 아마 곧 평정될 듯.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