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에 있었던 일이다. 

  5시까지 급하게 가야할 곳이 있었는데,
  늦장 부리는 바람에 허겁지겁 옷을 입고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택시를 타러 신나게 걷고 있었다.
  (그렇게나 택시 타기를 싫어하던 내가 ... 요즘은 매일같이 탄다. -_-) 

  그런데 웬 남학생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너무 불쌍하고 추운 모습으로
  (어제같이 추운 날, 그 학생은 교복 셔츠 위에 달랑 조끼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했다. 

  "저...죄송한데요, 형이 술을 사오라고 시켰는데..대신 사다주시면 안될까요..?
   안그러면 제가 맞아요.." 

  이건 뭥미..? -_- 

  시간에 쫒겨 정신이 없었던데다가 내 뇌리에 박힌 것은 

  '제가 맞아요'  

  어떤 시바스리갈 놈이 어린 학생한테 술 사오라고 시키면서 때린다고 협박한겨?
  라는 불끈거림과 동시에
  이 추운 날 내가 거절하면 이 아이는 또 한참을 밖에서 서성대야 하는가?
  라는 측은함이 있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그 형이란 놈 데리구 와봐" 

  라고 말하고 면상이나 갈겨주고 싶은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 결정한 것은 그 학생을 어서 따뜻한 집에 들여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아~ 안돼는데. 안돼는데~" 

  라고 입은 외치면서 그 학생이 준 천원짜리 5장을 들고 내 발은 편의점을 향하고 있었다.
  하이트 피쳐가 5,200원이더라.
  그래서 내가 좀 보태서 영수증까지 받아 기다리던 학생에게 가서 말했다. 

  "영수증 보여달라고 할지 모르니까 가져가" 

  혹시나 학생이 거스름돈 먹었다고 그 시바스리갈 놈이 지랄할까봐 챙겨줬다. 

  "예..감사합니다..안녕히가세요." 

  라고 내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하는 남학생이 어찌나 불쌍해보이던지. 
  택시를 타러 가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미성년자를 대신해 술 심부름을 한 것도 옳지 않지만,
  혹시나 그 시바스리갈 놈도 미성년자이면 나는 도덕과 내 양심을 버리고
  동정을 택한 것이 되어버리게 되므로. 

  누군가 나를 보고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 녀석이 억울하게 맞는게 싫었다. 그래서 사다주었다.
  그런데도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예전에 나도 친하게 지내는 미성년자 동생들에게 술을 사준 적은 있지만
  그건 어제와 또 다른 상황 아닌가.
  내가 함께 술을 미성년자와 마셨을 때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를
  했던 것이고, 이번은... '안되는데' 하면서 사주었다는 것. 

  만약 내가 거절했다면, 과연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그 녀석이 맞는다는데....어쩔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과연 내가 옳은 행동을 한 것일까? 

  묘한 딜레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12-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1 : 불쌍한 표정을 지은 아이가 엘신님께 술을 받아들고 골목을 돌자마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
"아 간만에 한 잔 빨겠군 하하하" 할수도 있는 상황.
상황2 : 정말 학교 1진이라는 잡놈이 시켜 어쩔 수 없이 심부름을 강요받은 상황일수도 있는 것.

확인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미행"

상황 1이면 그 불쌍한 표정 지은 놈 먼지 나도록 패버리면 되고 상황 2면 심부름 시킨 녀석(들)을 작살내면 됨.

단, 위의 상황은 자신이 스트리트 파이터로서의 수많은 실전경험을 토대로 17대 1의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함. 그렇지 못하다면 소 닭보듯 쳐다보고 내 갈길 가는게 상책..^^

L.SHIN 2008-12-28 06:00   좋아요 0 | URL
그쵸? 정말 미행했으면 좋았을걸...ㅡ.,ㅡ
제가 17대 1의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건 아니지만, 누군가한테 부탁하면..? ( -_-)
그러나 그 부탁을 하는 순간 내가 먼저 혼나겠지만 말입니다.ㅋㅋ
차라리 상황1이면 낫겠습니다. 상황2면 그 녀석은 또 다른 암울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쩝...

chika 2008-1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이 술을 사오라고 시킨 건 맞을 것 같고요... 형하고 같이 불쌍한 표정으로 둘이서 마시지 않을까..싶은 상황인 것 같은데요?

전 수학여행 온 녀석들이 술 좀 사달라고 하는 거 항상 안된다고 거절하다가 비도오고 날도 추운데 그녀석들이 포기할 것 같지 않아서 딱 한번 대신 사 준 적 있어요. 그..근데 여자애 다섯이어서 '세병이상 안돼!'라고 외치고 맥주를 꺼내들었더니 애들이 놀래면서 '어, 소주 세병 아니었어요?'라고 말해서... 당황했었더랬슴다. ㅡ,.ㅡ
애들이 평소 지들 주량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리 많은 술을 권하겠습니까. 어릴때 술 마시지 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 오늘은 추억 겸 맥주 셋으로 끝내라고, 안그러면 안 사준다고 협박(?)하고 손에 들려보냈는데... 왠지 씁쓸한 기분이었던... 음....

L.SHIN 2008-12-28 06:02   좋아요 0 | URL
흐음, 치카님이 했던 방법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맥주 사주면서 '이 이상 안돼' 하는 협박(?)
적어도 아이들에게 약간의 어필은 할 수 있으니까..흐음...
그래도 씁쓸하긴 하네요.

전호인 2008-12-2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딜레마가 정답일 듯 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네요. ㅎㅎ
메피님과 치카님의견도 날카롭긴 합니다.

L.SHIN 2008-12-28 06:0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_-
하지만 다음번에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거절할 것입니다. 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