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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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껴 두는 아이의 마음-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절제가 아니라 충족이 주는 낯선 소멸과 허무 때문일지라도-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가 결국 땅거미 질 무렵 귀가 길의 비참함을 꿈에서 보아 버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김연수의 유일한 산문집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은근한 기대나 설렘과는 다르다. 애써 감춰 둔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 여부만 알고 있는 낡은 편지의 내용처럼 짐짓 모르는 척 하는 마음에 가깝다. 서른 다섯. 소설가는 청춘을 정리한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순간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그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 분명하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날씨를 핑계로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젖어있다. 현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순간이 발화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그 아쉬움을 달래듯, 자신의 젊음 혹은 과거의 한 찰나들을 정리한다. 과연 이런 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소설이 아닌 현실속의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이 아니라 현실 속의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마주하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의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시대적 공감이다. 동년배이거나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거나 생활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공통점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알고 있으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한다. ‘그때 그 시절’을 노래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흑백으로 포장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도 굳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과 삶의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서 한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꿈과 희망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먼지 묻은 뮤직 박스와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에 대한 기억,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의 죽음,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사랑한다는 고백, 중문 바다에 대한 회고,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삶의 불확실성…….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와 낄낄거리고 소주를 한 잔 했으며 어깨 겯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다가 김광석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반어적으로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 시편들, 노래들과 얽힌 추억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연수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은 맨 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어설픈 가난과 시간에 대한 불가해함을 읊조리는 문장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애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작가의 말대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먼 기억 속에서 안개처럼 모호하게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제발, 부디 오래도록 철들지 않고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을 기다려 본다.그와 함께.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080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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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일곱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6
김리리 외 지음, 김경연 엮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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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어릴 적 내 꿈은 서른일곱 살 아저씨가 되는 거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천천히 멋있게 늙어가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함의가 포함된 ‘멋’있는 사람이 되긴 쉽지 않다. 2008년이 들어서면서 나이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자신의 나이가 싫어진다는 것은 분명 늙어간다는 반증이다. 빨리 나이 먹고 싶어 애꿎은 떡국만 퍼먹던 시절이 그리워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제 나이를 줄여 말하고 싶은 나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호기심’이다. 그것이 사라져간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경계를 알 수 없지만 이제 미치도록 궁금하거나 끝까지 파헤쳐 알고 싶은 것들이 줄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변화중의 하나이다.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열정과 욕망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호기심>은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일곱 명의 소설가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쓴 단편이 묶여있다. 이번 주제는 ‘사랑과 성’이다. 10대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과 재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중요한 것은 10대라는 제한 조건이다. 2차 성징이 끝나고 사춘기를 겪고 나면 어른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10대라고 부르든 청소년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그들은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성숙이다. 자신의 의사 결정권이 제한되고 사회적 억압이 기다리고 있으며 부모의 통제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그들은 갈등하고 고민하며 혼란을 겪는다.

  누구나 똑같은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지만 부모와 사회에 대한 대응 방식은 각기 다르다. 스무 살이 넘도록 부모에게 기대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 큰 어린이도 점점 많아진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자립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자신의 신념과 의지, 꿈을 향한 열정과 신나는 노력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눈과 이제 10대의 홍역을 치르는 사람들의 눈은 제각각이다.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그들의 꿈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고방식과 새로운 세대가 지닌 가치관은 늘 충돌하고 갈등하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선악의 가치 판단은 무의미해지고 ‘사랑과 성’이라는 것도 쉽게 규정되지 않는 세대의 고민들을 소설가들은 잘 이해하고 있을까? 사회, 문화적 환경이 달라지면 ‘사랑’에 대한 개념도 ‘성’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학교나 사회에서 보여주는 성인들의 가치관과 문화는 청소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의 ‘사랑과 성’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고스란히 성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아련한 추억 속에 낡은 사진처럼 자리잡은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 나타난 아이들의 고민은 평온하며 안전하며 일상적이다. 김리리의 <남친 만들기>, 이혜경의 <공주, 담장을 넘다>, 임태희의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은 귀여운 수준의 고민들이고 순수하고 깨끗한 동화같은 이야기들로 비춰진다. 항상 심각하고 아픈 상황만을 다룬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유익하겠느냐는 반문에는 할 말이 없지만 식상한 내용과 뻔한 전개와 결론이 보여주는 교훈적 혹은 전형적 스토리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박정애의 <첫날밤 이야기>는 형식면에서 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고 있다. 청소년문학도 ‘문학’이라면 내용은 물론이고 전달 방식이고 구성면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박정애는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훌륭한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금이의 <쌩레미에서, 희수>에는 유일하게 학생이 아닌 청소년이 등장한다. 제도권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교육의 범위를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고민들은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 사이의 교감을 다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 이용포의 <키스 미 달링>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다룬다. 도덕이나 사회적 제도나 틀로서 사랑을 규정하거나 묶을 수 없거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논리와 교훈이 아니라 재치있는 문장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가벼운 고민으로 넘겨 버리는 아쉬움이 있다.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시리즈이며 분명히 필요한 종류의 책들이 발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욕심이겠으나 보다 깊고 다양한 방식의 고민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들의 노력과 출판사의 기획이 요구된다. <호기심>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주제를 가지고 10대들의 ‘사랑과 성’을 다루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시절을 거쳐 온 성인들에게는 생에 첫 경험들을 통해 성숙해가는 수많은 후배들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 방학을 맞은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08010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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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0 0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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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2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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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2 2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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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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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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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성에 내재한 의미만큼 상징하는 바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다. gender와 sex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은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이든 개인적 관점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 있겠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3>에서 인간의 ‘성’을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들은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4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후 출판을 절대 반대했던 유언에 따라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권에서 저자는 전반적인 흐름과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직 전 단계로 전반적인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성의 역사 1>보다 ‘앎의 의지’라는 부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억압적인 시대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억압의 가설이나 성의 장치들 그리고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성’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성sexualite과 섹스sexe의 개념 차이에 대해 구별하며 번역자의 용어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순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개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성생활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과는 다르게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과 앎의 의지와 연관지어 사용한 용어인 ‘성sexualite’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17~18세기를 거쳐 근대에 확립된 성의 개념과 기독교적 억압 요소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가 ‘앎의 의지’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과연 ‘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는가? 그렇게 고착된 개념들과 태도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그것이 미셸 푸코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역사와 철학의 접점 속에서 끊임없이 정교해지는 억압의 구조였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한 기원후 1~2세기 혹은 기원후 4세기 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된 논의들과 저작들 속에서 먼지 묻은 ‘성’에 대한 개념들을 끄집어내는 저자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통시적 관점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혹은 ‘성’과 관련된 사건 혹은 현상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나아가 문헌들을 뒤적이며 그들이 주장했던 연애, 결혼, 가정, 동성애와 관련된 의미망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1권, P.70

  근대로 이행과정에서 성은 어둠 속에 침잠한다. 그것은 섹스를 ‘비밀’스런 것으로 운명지어버린 과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끊임없이 증폭되고 오해되고 억압받아 온 것은 아닐까? 기독교적 윤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원후 1~4세기 문헌들을 고찰하려는 미셸 푸코 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 발원지를 찾아 변형 혹은 왜곡 된 사적 과정을 고찰하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과 지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교묘하게 비틀고 가리고 헤집으며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택하는 저자의 개방적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론에 익숙하고 주장을 준비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게 1권이 끝나 버린다.

  쾌락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저자가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2권, P. 41

  쾌락의 활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형식면에서 서론과 결론을 갖추고 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전 기독교 시대의 쾌락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논의됐던 쾌락의 종류와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을 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쾌락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관계 설정. 그것이 도덕과 결합될 때 빚어지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교묘한 틀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1권이 1976년에 발간되고 8년이 지나 2권과 3권이 출판된다.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을 저자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4권으로 출판 예정이었던 ‘육체의 고백’을 기다려 보면 조금은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2권, P. 64

  인류가 활용해 온 쾌락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로서 악이나 원죄로서 바라보아서는 결코 그 의미와 삶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결혼과 가정, 연애와 소년애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고찰은 그 갈피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어내야 한다. 미셸 푸코는 문장들 사이에 여백과 생략이 많다. 결론짓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독자에게 숙제로 남긴다. 아니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가능성과 상상력과 사유의 단초들을 열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지막 3권에서 내세운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그런데 이 자기 배려는 협소한 이기적 관점이 아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영속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태도나 어떤 질서 그리고 자연 질서와 합일되는 전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꿈꾸게 하고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진 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 전통과 결별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관점과 아내, 그리고 소년들을 통해 ‘성’과 사랑이 지닌 의미와 질서들을 일별하는 것이 3권의 내용이다.

  교양 있는 인간형이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조화롭게 계발된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상형은 이렇듯 쾌락을 조절하고 아내는 물론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 들이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개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들이 오늘에 되새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과 논의들 속에서 진정한 쾌락은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계들 속에서 맺어지는 ‘절제’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압과 권력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이 주는 행복에서 우리는 한 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3권, P. 135

  의사들과 철학자들의 공모로부터 기독교의 윤리는 시작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된 종교는 인간의 삶의 황폐화한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육체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종족이 보존되고 또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성’이 문화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탈근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닌가? 아니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을 위한 인식 도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가?


080108-0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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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앎의 의지

16세기 말부터 섹스의 “담론화”가 제한의 과정을 따르지 않고 반대로 증대하는 선동의 매커니즘에 종속되었다는 것, 섹스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기법은 엄격한 선별의 원칙이 아니라 반대로 다형적 성의 확산과 확립이라는 원칙을 따랐다는 것, 그리고 앎의 의지가 요지부동의 금기 앞에서 꺾이기는커녕 아마 많은 오류를 통해서일 터이지만 오히려 성의 과학을 구성하는 데 몰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 P. 36

근대 사회에 고유한 것은 근대 사회가 섹스를 어둠 속에 머물도록 운명지었다는 점이 아니라, 근대 사회가 섹스를 ‘전형적’ 비밀로 내세움으로써 언제나 섹스에 관해 말할 운명이었다는 점이다. - P. 56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P.70

우리의 작업은 그러한 앎의 의지에 내재하는 권력의 전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즉, 성이라는 명확한 사례를 대상으로 앎의 의지의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 P. 95

성의 장치에서 가족은 수정(水晶)이다. 즉, 가족은 성을 퍼뜨리는 듯하나 사실은 성을 비추고 회절(回折)시킨다. 가족은 자체의 투과성(透過性)과 외부 쪽으로의 이러한 회부(回附) 작용 때문에 성의 장치를 위한 가장 귀중한 전술적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 P.131

성은 원래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연속적 이동과 전환을 통해 특수한 계급적 효과를 유발한다고 단언할 필요가 있다. - P.147

19세기 동안에 성의 장치는 패권적 중심으로부터 일반화되었다. 극단적 경우에 한 가지 방식으로 갖가지 도구에 의해서일망정 사회체 전체는 “성적 육체”를 부여받았다. - P.147

억압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성의 장치가 확산되는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 억압의 이론은 모든 성이 법을 따라야 하고 게다가 법의 효력에 의해서만 성일 뿐이라는 원칙, 즉 성을 법에 종속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법에 복종함으로써만 성을 갖게 될 뿐이라는 원칙을 제기함으로써 성의 권위적이고 강제적인 확대를 정당화하게 된다. - P.147

성의 장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해방”이 성의 장치에 달려 있다고 믿게 하는데, 바로 여기에 이 장치의 아이러니가 있다. - P. 177


2권 쾌락의 활용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 P. 41

아프로디지아는 어떤 형태의 쾌락을 제공해 주는 행위, 몸짓, 접촉이다. - P. 55

‘육체’와 ‘성’에 대한 기독교적 경험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주체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점이 될 것이다. 즉, 유연하고 위험스러우며 소리 없는 어떤 힘의 발현을 자주 의심해보고 저 멀리서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 P.56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P. 64

절제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도시국가 내에서 신분, 지위, 책임이 있는 자들이 특권적으로 지니고 있는, 아니면 적어도 지녀야 할 자질들 중의 하나로 제시된다. - P.79

성적 행동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도덕적 성찰은 금지들을 정당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자유, ‘자유인’인 남자가 자신의 활동 속에서 행사하는 자유를 양식화하려는 것이었다. - P. 119

삶의 기술로서의 관리법의 실천은 질병을 피하거나 그것의 치료를 끝내기 위한 예방법들의 총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해 적절한, 필요 충분한 배려를 하는 주체로 세우는 방식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총괄하는 배려이다. - P. 131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닮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부모들이 성행위 시에 그들이 그 순간에 하고 있는 행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음이 동요되었기 때문이다. - P. 148

“성 관계에 대하여 성스러운 히포크라테스의 견해는 이러했다. 그는 그것을 우리가 간질병이라 부르는 끔찍한 질병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인용한다. 성교는 경미한 간질병이다.” - P. 151

성행위는 만약 절제하지 않고 적절히 배분되지 않는다면, 의지를 넘어선 힘의 폭발, 에너지의 쇠진, 고귀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죽음, 이러한 결과들을 초해하게 되는 것이다. - P. 163

여성의 경우, 이 의무는 그녀가 남편의 권한하에 있는 한에서 그녀에게 강요된다. 남성의 경우에 그가 성적 선택을 제한해야 하는 것은 그가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권한을 행사하는 데에서 자제력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하고만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내의 경우 그녀가 남편의 권한하에 있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반면, 남편이 아내하고만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은 자기 아내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인 것이다. 이후의 도덕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등함에 대한 예시보다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 불균형의 양식화이다. - P. 176

“당신의 아내보다 더 많은 중요한 일들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라고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레스에게 묻는다. - P. 179

고대 그리스의 모랄리스트들에게서 절제는 부부생활을 하는 두 배우자에게 규율로서 명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 각자에게서 자기 자신과 맺는 상이한 관계 양태에 속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미덕은 순종적 행동 방식의 보증이자 그것의 상관물이었다. 반면 남자의 엄격함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일종의 지배 윤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 P. 213

구애의 기술에서와는 달리, “사랑의 대화술”은 여기서 두 연인에게 똑같은 감정의 움직임을 유발한다. 사랑이 두 사람에게서 그들을 진실로 향하게 하는 움직임인 이상,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 P. 274

성적 엄격함은, 도덕적 체험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법전의 역사보다도 더 결정적인 하나의 역사에 속해 있다. 그것은 개인을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서 이해된 ‘윤리’의 역사이다. - P. 283


3권 자기 배려

정신적 질병 중에서 심각한 것은 병이 감지되지 않고 감지되지 않고 간과되거나 혹은 질병을 미덕으로(분노를 용기로, 정욕을 우정으로, 선망을 대항의식으로, 비겁함을 신중함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났을 경우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다. - P. 78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P. 135

물론 성적 금욕이 의무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며 성행위가 악처럼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4세기의 의학적,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이미 명시화되었던 논지들이 발전되면서, 우리는 어떻게 모종의 굴절이 발생하는지를 보게 된다. 즉 성적 활동이 낳는 결과의 모호성에 대한 주장, 유기체 전체를 통해서 성적 활동에 인정된 상관관계들의 확장, 유기체 자체의 취약함과 그것의 병리학적 힘에 대한 강조, 양성에 있어서 금욕행위에 대한 가치부여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 P. 146

쾌락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아마도 의사보다는 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로 전해졌을 것이다. - P. 169

기원후 초기 두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성적 활동과 성적 쾌락에 대한 모든 성찰은 엄격함의 주제들이 어느 정도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의사들은 성행위의 결과를 걱정하여 행위를 삼가도록 기꺼이 권고했으며,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는 순결을 지키는 것이 더 좋다고 공언했다. 철학자들은 혼외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비난하고, 부부가 서로에 대해 예외 없이 엄격하게 정절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결국 소년애를 이론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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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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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의 이름을 처음 본 순간 그 의미와 무관하게 코를 간질이는 맵싸한 풋고추가 생각났다. 강렬한 자극만큼 그의 인상 또한 선명하다.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헤어스타일(?)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우선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와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외계인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를 만나면서 글을 통해 만난 그는 더욱 그러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철학자의 글들에 비해 좀 나은 편이지만 역사적 관점, 특히 17~8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관점에서 발원한 그의 사유의 세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감시와 처벌>을 거쳐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번엔 <성의 역사>를 만날 차례다. 순서와 무관하게 시간 날 때마다 한 권씩 손이 가는 이유는 탁월한 안목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가르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찡그리며 눈을 뜨고 피곤에 지쳐 밤에 잠이들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지 모르겠다. 일상에 대한 반추, 일을 하기 위한 고민 이외에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유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미셸 푸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68혁명의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행동하는 양심과 실천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현재적 유용성에 대한 사유의 밑거름이다. 삼십대 초반부터 정점에 달한 그의 사유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불과 몇 백년을 거치면서 우리의 ‘신체’와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탐구하기 위해서 그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체에 깃든 규율과 통제, 절차, 질서 등은 근대적 일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군대와 학교에서 병원과 직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의 병영을 방불케 한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움직이는 우리들의 신체는 이미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을 벗어나기 어렵다.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다. 무언의 억압과 규율을 만들어낸다. 신체를 조절하는 것은 효과적이고 특별한 장치들이 동원된다. 벤담이 개발한 판옵티콘과 광인을 다루는 수용소와 병원이 그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역사적 관점으로 판별해야 하는 변곡점이 되고 개인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의 한계는 점점 좁하지기만 한다.

  양운덕의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천착해온 ‘신체’와 ‘권력’이 빚어내는 근대의 주체 문제를 거론한다. 권력을 보는 과점이나 근대적 신체를 만드는 규율의 기술, 신체를 훈련 시키는 권력 장치, 생명을 관리하는 성의 문제 틀에 대해 핵심적인 관심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서구 역사에서 계몽은 진리의 진보와 자유의 역사를 결합시키는 시도였다. 즉, 계몽은 진리의 성장이 바로 주체의 자유를 확대시킨다고 믿는다. 푸코는 이런 믿음에 따라서 계몽에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는 태도가 바람직한지를 질문한다. - P. 84

  푸코의 질문의 핵심은 항상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장의 뉘앙스에 놓여있다.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것이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 그의 태도는 판소리의 창자와 유사하다. 슬쩍 빗겨서서 딴지 걸고 돌아서 시침떼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놓지만 방향을 제시하거나 굵고 강렬한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참 맥빠지는 게릴라 전술같은 글쓰기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푸코는 스스로를 주체로 아는 개인들을 말하고, 행위하고, 사고하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면서 고고학적이며 계보학적인 비판적 방법을 사용한다. - P. 85

  필연적 역사라고 믿는 것들 사이에 구멍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성이라고 부른다.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기도 하고 인연이 되기도 한다. 현재 사회 구성원들의 기계적인 작동원리와 역사 원칙들은 그렇게 우연적이 것들과 필연적인 실제 사이의 경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는 그 경계를 밝히거나 그 언저리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아닐까? 이제 그의 글을 좀 더 신경써서 읽어 볼 차례이다.


08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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