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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ㅣ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성에 내재한 의미만큼 상징하는 바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다. gender와 sex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은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이든 개인적 관점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 있겠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3>에서 인간의 ‘성’을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들은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4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후 출판을 절대 반대했던 유언에 따라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권에서 저자는 전반적인 흐름과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직 전 단계로 전반적인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성의 역사 1>보다 ‘앎의 의지’라는 부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억압적인 시대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억압의 가설이나 성의 장치들 그리고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성’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성sexualite과 섹스sexe의 개념 차이에 대해 구별하며 번역자의 용어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순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개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성생활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과는 다르게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과 앎의 의지와 연관지어 사용한 용어인 ‘성sexualite’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17~18세기를 거쳐 근대에 확립된 성의 개념과 기독교적 억압 요소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가 ‘앎의 의지’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과연 ‘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는가? 그렇게 고착된 개념들과 태도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그것이 미셸 푸코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역사와 철학의 접점 속에서 끊임없이 정교해지는 억압의 구조였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한 기원후 1~2세기 혹은 기원후 4세기 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된 논의들과 저작들 속에서 먼지 묻은 ‘성’에 대한 개념들을 끄집어내는 저자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통시적 관점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혹은 ‘성’과 관련된 사건 혹은 현상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나아가 문헌들을 뒤적이며 그들이 주장했던 연애, 결혼, 가정, 동성애와 관련된 의미망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1권, P.70
근대로 이행과정에서 성은 어둠 속에 침잠한다. 그것은 섹스를 ‘비밀’스런 것으로 운명지어버린 과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끊임없이 증폭되고 오해되고 억압받아 온 것은 아닐까? 기독교적 윤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원후 1~4세기 문헌들을 고찰하려는 미셸 푸코 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 발원지를 찾아 변형 혹은 왜곡 된 사적 과정을 고찰하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과 지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교묘하게 비틀고 가리고 헤집으며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택하는 저자의 개방적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론에 익숙하고 주장을 준비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게 1권이 끝나 버린다.
쾌락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저자가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2권, P. 41
쾌락의 활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형식면에서 서론과 결론을 갖추고 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전 기독교 시대의 쾌락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논의됐던 쾌락의 종류와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을 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쾌락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관계 설정. 그것이 도덕과 결합될 때 빚어지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교묘한 틀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1권이 1976년에 발간되고 8년이 지나 2권과 3권이 출판된다.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을 저자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4권으로 출판 예정이었던 ‘육체의 고백’을 기다려 보면 조금은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2권, P. 64
인류가 활용해 온 쾌락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로서 악이나 원죄로서 바라보아서는 결코 그 의미와 삶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결혼과 가정, 연애와 소년애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고찰은 그 갈피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어내야 한다. 미셸 푸코는 문장들 사이에 여백과 생략이 많다. 결론짓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독자에게 숙제로 남긴다. 아니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가능성과 상상력과 사유의 단초들을 열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지막 3권에서 내세운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그런데 이 자기 배려는 협소한 이기적 관점이 아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영속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태도나 어떤 질서 그리고 자연 질서와 합일되는 전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꿈꾸게 하고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진 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 전통과 결별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관점과 아내, 그리고 소년들을 통해 ‘성’과 사랑이 지닌 의미와 질서들을 일별하는 것이 3권의 내용이다.
교양 있는 인간형이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조화롭게 계발된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상형은 이렇듯 쾌락을 조절하고 아내는 물론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 들이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개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들이 오늘에 되새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과 논의들 속에서 진정한 쾌락은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계들 속에서 맺어지는 ‘절제’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압과 권력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이 주는 행복에서 우리는 한 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3권, P. 135
의사들과 철학자들의 공모로부터 기독교의 윤리는 시작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된 종교는 인간의 삶의 황폐화한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육체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종족이 보존되고 또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성’이 문화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탈근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닌가? 아니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을 위한 인식 도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가?
080108-00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