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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껴 두는 아이의 마음-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절제가 아니라 충족이 주는 낯선 소멸과 허무 때문일지라도-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가 결국 땅거미 질 무렵 귀가 길의 비참함을 꿈에서 보아 버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김연수의 유일한 산문집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은근한 기대나 설렘과는 다르다. 애써 감춰 둔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 여부만 알고 있는 낡은 편지의 내용처럼 짐짓 모르는 척 하는 마음에 가깝다. 서른 다섯. 소설가는 청춘을 정리한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순간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그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 분명하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날씨를 핑계로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젖어있다. 현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순간이 발화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그 아쉬움을 달래듯, 자신의 젊음 혹은 과거의 한 찰나들을 정리한다. 과연 이런 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소설이 아닌 현실속의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이 아니라 현실 속의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마주하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의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시대적 공감이다. 동년배이거나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거나 생활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공통점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알고 있으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한다. ‘그때 그 시절’을 노래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흑백으로 포장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도 굳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과 삶의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서 한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꿈과 희망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먼지 묻은 뮤직 박스와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에 대한 기억,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의 죽음,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사랑한다는 고백, 중문 바다에 대한 회고,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삶의 불확실성…….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와 낄낄거리고 소주를 한 잔 했으며 어깨 겯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다가 김광석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반어적으로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 시편들, 노래들과 얽힌 추억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연수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은 맨 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어설픈 가난과 시간에 대한 불가해함을 읊조리는 문장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애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작가의 말대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먼 기억 속에서 안개처럼 모호하게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제발, 부디 오래도록 철들지 않고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을 기다려 본다.그와 함께.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08011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