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 사진하는 임종진이 오래 묻어두었던 '나의 광석이 형 이야기'
임종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하루 동안 나는 젖어 있었다. 오래된 조작적 기억과 얄팍한 감상과 지금의 나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돌아오곤 했다. 창밖에 나무들이 보여주는 연녹색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던 시절을 더듬어야 했다. 동부전선 비무장 지대 GP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천지 사방 끝없이 쏟아붓는 눈과 아득한 백두대간의 능선들 사이로 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1월 6일이었다. 마지막 GP생활이었고 이 겨울만 견디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전방 초소에 올라가 근무 중인 소대원들과 킬킬거리다 체육관에 돌아오니 TV를 보던 병장 하나가 건네준 소식이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내 죽음도 그러하겠지만.

  불연속적 세계관을 무장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있던’ 김광석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가고 노래만 남았다.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아야했던 시간들이기 때문에 소형 카세트와 라면 박스로 배달되던 책들이 지루한 시간들을 꾸역꾸역 메우고 있었다. 김광석의 테입들은 하품하듯 늘어지기 시작했고 GP안의 책들도 바닥이 나고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도 말라가고 있었다. 30명 가까운 소대원 전체가 길고도 지루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망망대해의 섬처럼 GP는 비무장 지대의 외로운 섬이다. 그 안에서 광석이 형의 죽음을 맞았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손 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를 고이 접어 보내오


  김광석의 목소리 만한 가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 목소리와 어우러진 노래는 가슴을 후비고 영혼을 울린다.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눈은 자연스레 하늘을 향하게 되고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잠시 동작이 느려지고 사물이 멀게 보이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 감상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의 노래는 때때로 폐부를 찌르는 알콜이나 니코틴처럼 혹은 보이지 않게 가슴까지 스미는 커피 향처럼 치명적일 때가 많다.

  사진하는 임종진의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는 오롯이 광석이 형에게 바치는 추모곡이다. 흑백 사진 속에 묻혀버린 그를 추억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임종진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또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책을 보는 동안 내내 이어폰으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죽음은 망각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면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잉게보르그 바하만의 <삼십세>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로 1년을 보냈던 스물 아홉. 청춘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사라졌음을 어느날 문득, 깨달아버렸다. 임종진의 넋두리처럼 ‘서른 즈음에’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아닐까?

  거실이 책장으로 채워지기 전, 한 밤에 홀로 불꺼진 거실에서 김광석의 DVD를 보며 홀짝였던 알콜 기운이 하루 종일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김광석과 안치환과 정태춘만 듣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재즈나 피아노나 바이올린보다 크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돌고 돌아 그에게로 온다. 종착역은 아니지만 시골 마을의 간이역처럼 그에게 쉬었다 걷고 또 쉬게 될 것이다.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는 그의 노래를 듣는다. 정호승의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처럼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그대여,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라.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080417-0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한다. 동무는 무엇이라고 규정될까? 단순히 정서적 동반자를 동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무는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다. 말과 살의 관계처럼 동무와 연인은 쉽게 단정 지어 그 관계를 말할 수는 없다. 그저 함께 걸어가야 할 동행이며 사상적 동지이자 거처이다. 연인과 동무는 멀리서 그리워하다가 하나로 겹쳐져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교수였다가 스피노자의 삶을 선택한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은 신문 칼럼 모음이지만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 깊은 책이다. 깊이와 넓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매력적이다. 지극한 상찬이 이어져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책은 스물 한 명의 서른아홉 명을 소개한다. 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묶어 그들의 관계가 동무이며 연인이고 친구이자 스승이었음을 증거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로 포문을 여는 저자의 이야기는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점착인 문장은 다음 문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단락은 완벽한 의미의 덩어리로 살아 움직인다. 글쓰기 교재로도 손색없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으며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준다. 이덕무와 박제가 하이데거와 아렌트, 프로이트 융, 윤심덕과 김우진, 매창과 유희경 등 동서양은 물론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팀을 이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말과 살과 삶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관계나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의 관계,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관계처럼 특이한 경우에 더 눈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다. 생의 비극과 열정, 부조리에 대한 보편성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 관계들은 이 책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사물화하고 객관하며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유형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슷한 경우의 수를 더듬어 볼 뿐이다. 이 책은 그것을 제공해 주고 있는 걸까?

  역사에서 눈에 띠는 특별한 관계들을 고찰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성과 감성은 말과 살로 분해되고 나와 세상은 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하는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은 동무와 연인을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종교와 연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인 관계들이 주는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는 것은 철학자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과 관계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순전히 저자의 힘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짤막한 경구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통찰은 열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혹은 그 안에서 얼마나 맹목적인 행복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아찔한 순간들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생의 뒤안길에서는 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 혹은 아쉬움과 미련에 잠 못 들어 하는 법이다.

  세기의 연인도, 더없이 부러운 사제지간도, 그 둘이 합쳐진 사람들도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 뿐이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끝날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어떤 책이든 반은 독자가 만들어간다고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엮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이고 확인이자 전망이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 있지?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살을 만져 본 적은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소중하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080416-0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바흐친과 비슷하게)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물론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P. 17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小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중세는 신(神 )이 있다는 듯이 사는 세상이고 근대는 조국이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이며, 현대는 가족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 P. 21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무릇 사랑의 현명함을 가꾸려는 이들이라면 살과 말이 섞이는 묘경(妙境)의 이치에 세심해야 한다.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는 말을 매개로 삼아 살 이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 P. 42

신(神)의 시선이 특별히 나만을 주목하리라는 종교적 환상극, 애인의 관심이 오직 내게만 집중되리라는 연애 환상극, 그리고 엄마-아빠-나 사이를 잇는 완벽한 가족 삼각형의 환상극 등은 완악한 자기중심성의 존재인 인간에게 좀처럼 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식의 해석학적, 혹은 실천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와 얇은 번역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 P. 128

플로베르였던가,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그러나 한 순간이나마 제정신인 연인이라면 그 사실의 절절함에 절망하지 않을 자 그 누구던가? “더불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R. 바르트)는 연애의 진실은 연인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만고의 고민처럼 보인다. - P. 135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 P. 156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P. 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네아이라 재판소동
데브라 하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속성을 지니게 되는가? 사회학적 관점이나 철학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나는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특징에 대해 알고 싶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두 사람만 모이면 규칙이 생기고 순서가 정해져야 한다. 질서는 보다 편리한 공동생활의 규칙이며 이기적 욕망을 억누르게 하는 강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내면적 윤리의식의 함양이든 법과 제도적 장치이든 간에.

  아주 먼 그리스 시대의 직접 민주정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세 이상의 남성들만의 민주주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법과 제도의 정교함과 공평한 배심원 제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데브라 하멜의 <네아이라 재판 소동>은 흥미 진진한 추리 소설처럼 단숨에 읽힌다. 그리스의 오래된 연설문 하나로 살펴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상들, 법률 체계, 배심원 제도, 시민권 계승 문제 등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네아이라라는 고급 창녀의 재판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테오므네스토스가 네아이라를 고소한다. 고소 이유를 설명하는 테오므네스토스의  짤막한 연설과 뒤이어 그의 장인 아폴로도르스가 대리인으로 배심원들에게 한 연설문만으로 이 책은 완성된다. 전해지는 내용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네아이라의 남편 혹은 후견인인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의 원한에서 비롯된 이 재판은 네아이라의 삶을 고스란히 반추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그녀를 삶을 풀어낸다.

  니카레테의 유곽에서 시작한 고급 창녀 생활에서 아테네 시민의 삶을 누리게 되는 과정과 그 모든 과정이 파헤쳐지는 재판 과정은 당대의 그리스와 아테네를 이해하는 가장 흥미있는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한 여자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가늠하는 것은 어떤 방법보다도 경험적 토대를 제공하며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다가간다.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가 된 네아이라의 딸 파노의 인생역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네아이라보다 그의 딸 파노가 결혼한 남자의 정치적 지위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는지 모르겠다.

  파노가 네아이라의 딸인지 스테파노스의 딸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재판의 핵심은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 사이의 정치적 분쟁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 원한 관계가 결국 아테네 시민권 분쟁으로 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네아이라는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의 삶은 태양아래 발가벗겨진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생의 치부를 드러내야 했던 네아이라와 파노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여자는 아테네 법정에 설 수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나 가족이 대리인으로 나서야했다. 스테파노스의 연설문은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의 매력 혹은 아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 쪽의 연설문을 토대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수천년 전의 재판을 재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는 필자의 태도이다. 네아이라를 변호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실들과 문맥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논리의 허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필자가 심혈을 기울이는 대목이다.

  당연하게도 힘없이 당해야만 했을 네아이라에게 동정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당했을 억울함을 이제와서 풀어주겠다는 공명심이 아니라 과연 아폴로도르스의 논리는 그 법정에서 어떻게 작용했을까? 아쉽게도, 숨 막히는 극적 반전이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결론은 없다. 이후의 재판 결과나 네아이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이 이토록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수많은 그리스 시대의 연설문 중에서 특별한 내용과 방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검사도 변호사도 없었다. 배심원은 매년 6천 명이나 선발되는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되었으며 원고와 피고는 스스로 변론하고 연설하며 배심원들을 설득시켰다. 이 때 배심원들도 조용히 경청하는 오늘날의 배심원과는 달리 야유를 퍼붓거나 소리를 지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공적 재판의 경우 501명 이상의 배심원이 하루에 선고까지 마쳐야하기 때문에 배심원들끼리의 토론이나 회의는 불가능했고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네아이라 재판을 둘러싼 과정들을 시간 순서를 짜맞춰가며 재구성하고 있어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피고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법률 위반 사실을 주장하는 연설문만으로 원고의 입장과 숨겨진 사실들, 과장된 논리와 과잉반응들을 찾아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아테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시대의 단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네아이라의 재판을 선택했고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게 기원전에 존재했던 한 고급 창녀에 관한 재판 기록이 아니다. 민주정치의 토대가 되었던 아테네의 재판 제도와 진행과정은 물론 ‘시민권’이 갖는 역사적 의미, 사상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실과 재미를 제공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적 정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이기적 욕망, 제도와 질서에 대한 회의, 권력과 금전의 위력 등에 대해 고대 사회와 현대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은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식이 더 발전되어왔고 정교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법은 여전히 돈과 권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080414-0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화의 상대적 개념은 미개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문질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를 일컫는 미개사회나 미개인이라는 말은 상대를 낮잡아 보려는 편견이 내재해 있다. E. 사이드의 개념으로 보면 타문화에 대한 유럽의 관점에 다름 아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사회, 기계적 합리주의와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지 않은 사회를 우리는 여전히 미성숙된, 미발달된 사회로 본다. 학교에서 아무리 문화적 상대주의에 대해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도 나와 다른 삶에 대한 편견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만난 것은 인류의 지성사에 축복도 재앙도 아니다. 단순한 친분관계나 학문적 동종 교배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당대의 지적 흐름에서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배태된 구조주의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실존주의를 앞세운 사르트르의 말과 글들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역사란 인간 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의식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역사적 발전이라는 연속선에서 우월한 양식과 열등한 양식을 구분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구조주의가 마르크스 지향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구조적 분석이 변증법적 방법을 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역사적, 비실존적 정신으로 인간을 추상적, 이념적으로 파악했으며 현실적인 요구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사실들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 치중하는 기계론적 형식주의에 빠졌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양차 대전을 겪으며 최연소 철학교수 자격 시험을 통과한 유대계 프랑스인의 지적 편력은 그의 기나긴 생애만큼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프랑스에서 브라질 다시 프랑스와 미국으로의 망명 등 그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앙가주망을 외쳤던 사르트르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 대한 모색과 탐구의 열정을 놓지 않았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슬픈 열대>는 멀고도 길었던 브라질 여행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기록물이다.

  1935년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 교수로 부임한 27세의 레비-스트로스는 1938년 카두베오족과 보로로족, 남비콰라족과 투피 카와이브족 등 브라질 원주민 사회를 조사한다. 그리고 15년 후 1954년 10월부터 1955년 3월까지 역작 <슬픈 열대>를 집필한다. 이후 <구조인류학>, <야생의 사고>, <신화학> 등 대표적인 책들이 출간되지만 <슬픈 열대>은 조금 특별한 책이다.

  철학으로 출발한 학문적 토양이 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을 만나기까지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처음부터 방법론이나 신념을 정해 놓고 시작한 연구가 아니라 원시사회의 모습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진 경험의 산물이며 문명화된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연대기적 서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미국 뉴욕으로 밀항하는 과정으로 시작되는 1부를 추억담으로 할애하고 있다. 2부에서 4부까지는 시간을 거슬러 브라질로 가는 과정과 예비답사 내용이다. 5, 6, 7, 8부가 바로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을 조사하게 되는 과정과 각각의 원주민 사회의 문화가 소개, 분석되어 있다. 마지막 9부는 돌아오는 길에 인도와 파키스탄 여행기가 추가되어 그가 경험했던 인류학적 연구의 문제점들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있다.

  문화인류학의 고전으로 빈번하게 언급되며 원전을 보지 않은 채 인용된 부분이나 혹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 사상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다른 책을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할 목적으로 두툼한 책에 매달려 꼬박 닷새 동안 책 속에 파묻혔다. 70여 년 전 이기는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아마존에 생존했던 원시 공동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충격에 가까웠다. 책의 앞쪽에는 그들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책을 읽다가 앞으로 돌아와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보며 대화를 시도한다. 우리 인류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할 길에 대한 낭만적 상상에 빠지기도 하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관심이나 <슬픈 열대>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하는 과거의 인류를 만난 느낌이었다. 저자의 독특한 시선이나 그들의 삶에 대한 애정, 객관적 관찰과 분석, 철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꼭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는 말은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생각할 여유가 있을 나이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지금 만났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관점에서 문화라는 관점에서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꾸던 인간이 이제는 사람을 우주 정거장에 보내놓고 그곳의 생활을 생중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눈이 부시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의 원형은 어떠했으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문명인이며 그들은 야만인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인류학적 상상력이 극한까지 발휘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레비-스트로스가 살아있었다면 이 시대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다. 1981년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가 100세의 나이로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인류의 삶은 계속되고 생태학적 상상력은 점점 축소되고 있지만 개발의 논리와 자본의 횡포는 지칠 줄 모르고 인류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지식과 학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삶의 철학과 생활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와의 대화를 시도한다면 독자들은 보다 진지하고 풍요로운 저자와의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080413-0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