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바흐친과 비슷하게)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물론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P. 17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小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중세는 신(神 )이 있다는 듯이 사는 세상이고 근대는 조국이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이며, 현대는 가족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 P. 21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무릇 사랑의 현명함을 가꾸려는 이들이라면 살과 말이 섞이는 묘경(妙境)의 이치에 세심해야 한다.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는 말을 매개로 삼아 살 이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 P. 42

신(神)의 시선이 특별히 나만을 주목하리라는 종교적 환상극, 애인의 관심이 오직 내게만 집중되리라는 연애 환상극, 그리고 엄마-아빠-나 사이를 잇는 완벽한 가족 삼각형의 환상극 등은 완악한 자기중심성의 존재인 인간에게 좀처럼 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식의 해석학적, 혹은 실천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와 얇은 번역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 P. 128

플로베르였던가,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그러나 한 순간이나마 제정신인 연인이라면 그 사실의 절절함에 절망하지 않을 자 그 누구던가? “더불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R. 바르트)는 연애의 진실은 연인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만고의 고민처럼 보인다. - P. 135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 P. 156

호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껏해야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이거나 생물학적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족관계만큼 극명하게 증명하는 곳도 없다. ‘호의로 포장된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모든 가족적 관계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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