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아이라 재판소동
데브라 하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속성을 지니게 되는가? 사회학적 관점이나 철학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나는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특징에 대해 알고 싶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자명한 논리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두 사람만 모이면 규칙이 생기고 순서가 정해져야 한다. 질서는 보다 편리한 공동생활의 규칙이며 이기적 욕망을 억누르게 하는 강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내면적 윤리의식의 함양이든 법과 제도적 장치이든 간에.

  아주 먼 그리스 시대의 직접 민주정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세 이상의 남성들만의 민주주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법과 제도의 정교함과 공평한 배심원 제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데브라 하멜의 <네아이라 재판 소동>은 흥미 진진한 추리 소설처럼 단숨에 읽힌다. 그리스의 오래된 연설문 하나로 살펴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현상들, 법률 체계, 배심원 제도, 시민권 계승 문제 등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네아이라라는 고급 창녀의 재판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다. 테오므네스토스가 네아이라를 고소한다. 고소 이유를 설명하는 테오므네스토스의  짤막한 연설과 뒤이어 그의 장인 아폴로도르스가 대리인으로 배심원들에게 한 연설문만으로 이 책은 완성된다. 전해지는 내용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네아이라의 남편 혹은 후견인인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의 원한에서 비롯된 이 재판은 네아이라의 삶을 고스란히 반추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그녀를 삶을 풀어낸다.

  니카레테의 유곽에서 시작한 고급 창녀 생활에서 아테네 시민의 삶을 누리게 되는 과정과 그 모든 과정이 파헤쳐지는 재판 과정은 당대의 그리스와 아테네를 이해하는 가장 흥미있는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한 여자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가늠하는 것은 어떤 방법보다도 경험적 토대를 제공하며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다가간다.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아르콘 바실레우스의 아내가 된 네아이라의 딸 파노의 인생역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네아이라보다 그의 딸 파노가 결혼한 남자의 정치적 지위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는지 모르겠다.

  파노가 네아이라의 딸인지 스테파노스의 딸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재판의 핵심은 스테파노스와 아폴로도르스 사이의 정치적 분쟁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 원한 관계가 결국 아테네 시민권 분쟁으로 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네아이라는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의 삶은 태양아래 발가벗겨진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생의 치부를 드러내야 했던 네아이라와 파노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여자는 아테네 법정에 설 수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나 가족이 대리인으로 나서야했다. 스테파노스의 연설문은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책의 매력 혹은 아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 쪽의 연설문을 토대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수천년 전의 재판을 재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는 필자의 태도이다. 네아이라를 변호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실들과 문맥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논리의 허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필자가 심혈을 기울이는 대목이다.

  당연하게도 힘없이 당해야만 했을 네아이라에게 동정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당했을 억울함을 이제와서 풀어주겠다는 공명심이 아니라 과연 아폴로도르스의 논리는 그 법정에서 어떻게 작용했을까? 아쉽게도, 숨 막히는 극적 반전이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결론은 없다. 이후의 재판 결과나 네아이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이 이토록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수많은 그리스 시대의 연설문 중에서 특별한 내용과 방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검사도 변호사도 없었다. 배심원은 매년 6천 명이나 선발되는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되었으며 원고와 피고는 스스로 변론하고 연설하며 배심원들을 설득시켰다. 이 때 배심원들도 조용히 경청하는 오늘날의 배심원과는 달리 야유를 퍼붓거나 소리를 지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공적 재판의 경우 501명 이상의 배심원이 하루에 선고까지 마쳐야하기 때문에 배심원들끼리의 토론이나 회의는 불가능했고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네아이라 재판을 둘러싼 과정들을 시간 순서를 짜맞춰가며 재구성하고 있어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피고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법률 위반 사실을 주장하는 연설문만으로 원고의 입장과 숨겨진 사실들, 과장된 논리와 과잉반응들을 찾아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아테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시대의 단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네아이라의 재판을 선택했고 아폴로도르스의 연설문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게 기원전에 존재했던 한 고급 창녀에 관한 재판 기록이 아니다. 민주정치의 토대가 되었던 아테네의 재판 제도와 진행과정은 물론 ‘시민권’이 갖는 역사적 의미, 사상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실과 재미를 제공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적 정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이기적 욕망, 제도와 질서에 대한 회의, 권력과 금전의 위력 등에 대해 고대 사회와 현대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은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식이 더 발전되어왔고 정교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법은 여전히 돈과 권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08041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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