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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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한다. 동무는 무엇이라고 규정될까? 단순히 정서적 동반자를 동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무는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다. 말과 살의 관계처럼 동무와 연인은 쉽게 단정 지어 그 관계를 말할 수는 없다. 그저 함께 걸어가야 할 동행이며 사상적 동지이자 거처이다. 연인과 동무는 멀리서 그리워하다가 하나로 겹쳐져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교수였다가 스피노자의 삶을 선택한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은 신문 칼럼 모음이지만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 깊은 책이다. 깊이와 넓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매력적이다. 지극한 상찬이 이어져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책은 스물 한 명의 서른아홉 명을 소개한다. 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묶어 그들의 관계가 동무이며 연인이고 친구이자 스승이었음을 증거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로 포문을 여는 저자의 이야기는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점착인 문장은 다음 문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단락은 완벽한 의미의 덩어리로 살아 움직인다. 글쓰기 교재로도 손색없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으며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준다. 이덕무와 박제가 하이데거와 아렌트, 프로이트 융, 윤심덕과 김우진, 매창과 유희경 등 동서양은 물론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팀을 이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말과 살과 삶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관계나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의 관계,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관계처럼 특이한 경우에 더 눈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다. 생의 비극과 열정, 부조리에 대한 보편성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 관계들은 이 책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사물화하고 객관하며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유형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슷한 경우의 수를 더듬어 볼 뿐이다. 이 책은 그것을 제공해 주고 있는 걸까?

  역사에서 눈에 띠는 특별한 관계들을 고찰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성과 감성은 말과 살로 분해되고 나와 세상은 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하는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은 동무와 연인을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종교와 연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인 관계들이 주는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는 것은 철학자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과 관계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순전히 저자의 힘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짤막한 경구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통찰은 열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혹은 그 안에서 얼마나 맹목적인 행복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아찔한 순간들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생의 뒤안길에서는 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 혹은 아쉬움과 미련에 잠 못 들어 하는 법이다.

  세기의 연인도, 더없이 부러운 사제지간도, 그 둘이 합쳐진 사람들도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 뿐이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끝날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어떤 책이든 반은 독자가 만들어간다고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엮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이고 확인이자 전망이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 있지?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살을 만져 본 적은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소중하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080416-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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