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 사진하는 임종진이 오래 묻어두었던 '나의 광석이 형 이야기'
임종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하루 동안 나는 젖어 있었다. 오래된 조작적 기억과 얄팍한 감상과 지금의 나 사이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돌아오곤 했다. 창밖에 나무들이 보여주는 연녹색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던 시절을 더듬어야 했다. 동부전선 비무장 지대 GP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천지 사방 끝없이 쏟아붓는 눈과 아득한 백두대간의 능선들 사이로 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1월 6일이었다. 마지막 GP생활이었고 이 겨울만 견디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전방 초소에 올라가 근무 중인 소대원들과 킬킬거리다 체육관에 돌아오니 TV를 보던 병장 하나가 건네준 소식이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내 죽음도 그러하겠지만.

  불연속적 세계관을 무장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있던’ 김광석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가고 노래만 남았다.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아야했던 시간들이기 때문에 소형 카세트와 라면 박스로 배달되던 책들이 지루한 시간들을 꾸역꾸역 메우고 있었다. 김광석의 테입들은 하품하듯 늘어지기 시작했고 GP안의 책들도 바닥이 나고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도 말라가고 있었다. 30명 가까운 소대원 전체가 길고도 지루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망망대해의 섬처럼 GP는 비무장 지대의 외로운 섬이다. 그 안에서 광석이 형의 죽음을 맞았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손 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를 고이 접어 보내오


  김광석의 목소리 만한 가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 목소리와 어우러진 노래는 가슴을 후비고 영혼을 울린다.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눈은 자연스레 하늘을 향하게 되고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잠시 동작이 느려지고 사물이 멀게 보이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 감상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그의 노래는 때때로 폐부를 찌르는 알콜이나 니코틴처럼 혹은 보이지 않게 가슴까지 스미는 커피 향처럼 치명적일 때가 많다.

  사진하는 임종진의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는 오롯이 광석이 형에게 바치는 추모곡이다. 흑백 사진 속에 묻혀버린 그를 추억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임종진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또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책을 보는 동안 내내 이어폰으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죽음은 망각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면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잉게보르그 바하만의 <삼십세>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로 1년을 보냈던 스물 아홉. 청춘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사라졌음을 어느날 문득, 깨달아버렸다. 임종진의 넋두리처럼 ‘서른 즈음에’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아닐까?

  거실이 책장으로 채워지기 전, 한 밤에 홀로 불꺼진 거실에서 김광석의 DVD를 보며 홀짝였던 알콜 기운이 하루 종일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김광석과 안치환과 정태춘만 듣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재즈나 피아노나 바이올린보다 크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돌고 돌아 그에게로 온다. 종착역은 아니지만 시골 마을의 간이역처럼 그에게 쉬었다 걷고 또 쉬게 될 것이다.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는 그의 노래를 듣는다. 정호승의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처럼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그대여,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라.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080417-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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