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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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꾼다
  ― 장뤼크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선두 주자였던 고다르의 말이 심상치 않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게 하는 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는 장면 이외에도 전달 방식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서만 독자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의도된 오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는 어쩌면 더 이상 이미지의 생경한 전달에 그치는 장르의 시대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 우연에 기대어 김경주의 <기담>에 이어 강정의 <키스>를 읽었다. 두 시인은 따로 또 같이 시를 쓴 것처럼 보인다. 내게 그렇게 읽혔겠지만 재밌는 비교가 가능하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현재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묘한 퍼즐로 엮어질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문학을, 시를 더 이상 진지하고 깊은 고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가볍고 기괴한 말놀음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독자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시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기존의 문법대로 시가 주는 안락한 감성을 주문하는 것일까.

  두 시인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정의 <키스>는 낯선 이미지와의 접촉이며 일상을 비틀어보는 것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온 생의 감각 세포들을 되살려내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하지 못한다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말이다. 이 시집의 서시를 보자.

死後의 바람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확실성 시대에 시는 더욱 불안하고 인간의 마음들은 허공을 헤맨다. 시인은 서시에서 불타는 시간의 숲에서 인간이 짐승의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써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집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 그 매혹의 깊이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애무는 접촉이다. 관심이며 열정이고 몰입이며 안타까움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가꾸어 나간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 ‘키스’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각. ‘부드러움과 달콤함’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생경한 풍경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표현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고.

  시집 중간 중간 시인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부분이 극대화되고 생략된 신체는 기괴해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전면적인 접촉과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세계와 불편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리둥절할 것이고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과 이미지와 연결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뿐!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 ‘자멸의 사랑’ 중에서


  추상과 상징의 세계는 결국 현실의 메트릭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실 밖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어쩌겠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너머에 눈길을 던져본다.

  그저 한 몸 등 따시고 배부른 인생을 위해 질주하는 저 수많은 인간 군상들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은 통속적인 사랑의 결실도 아니고 즐거운 인생이라고 믿었던 신기루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너머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라 무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말란다. 서로를 속이는 감정의 게임에서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 따위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희미할 뿐이다. 절대적인 것과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애무일 뿐! 애무하라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라! 고 시인은 외친다.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집 해설에 간만에 밑줄 긋는다! 애무하기 좋은 밤이다.

애무를 넘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에는 고민도 순서도 있을 리 없다. 애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매혹되고 혀의 촉감에 넋 나간 사람이 다음 순간의 손놀림이나 자세 따위를 걱정할 틈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순간순간의 느낌에 몰두하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고 또 더듬을 뿐이다. 애무는 최종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애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기 수중에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 감지했지만 쉽사리 그 불가능을 수용할 수 없는 자의 절절한 몸짓이다. - [해설] ‘애무의 윤리(조연정)’ 중에서


09011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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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은 발걸음 - 작고 쉬운 실천을 통해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지혜
앨 세쿤다 지음, 최유나 옮김 / 경영정신(작가정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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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렷한 목표와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하루에 몰입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인생은 해가 뜨면서 시작되어 해가 지면서 끝난다. 하루 단위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새해가 되면 거창한 계획과 일 년간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진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연초에 담배 판매량이 급격하게 줄었다가 다시 제자리가 된다.

  목표를 세우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대충 사는 인생보다 값지다는 생각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기원했을까? 성실하게 일하고 부를 축적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던 시대는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본질적인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에 서투르며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않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꾸준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나 자신 없는 분야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새로움에 도전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때 누군가 먼저 실천에 옮긴 경험을 이야기해주거나 특별히 좋은 방법을 권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새로운 실천 의지를 다지게 된다.

  자기계발과 혹은 경제경영과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행복한 인생이나 즐거운 삶을 약속하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의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구체적이고 상세히 설명하여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나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위치과 계급으로 진입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나 뚜렷한 성과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소중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독려와 격려 수준의 책이다.

  알 세쿤다의 <위대한 작은 발걸음>은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서점에 난무하는 각종 자기계발서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 무관심한 분야이기 때문에 거의 돌아보지도 않지만 <행복한 이기주의자>처럼 눈길을 끄는 제목이나 <위대한 작은 발걸음>처럼 역설적인 제목을 만나면 발을 멈추고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에 가까운 책이다. 비슷한 아류라고 하긴 어렵지만 같은 종류의 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테니스 코치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입문서를 책으로 발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경험만한 스승은 없는 법이다. 누구나 실패하고 좌절하며 또다시 시작한다. 이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 놓은 책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시작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고 생각하고 또다시 실천하고 생각해보자는 책이다.

  저자는 그것을 ‘15초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하루에 15초씩 투자하며 시작하자. 스스로를 용서하며 그렇게 작은 시작을 통해 커다란 성과를 이끌어내자는 유혹이다. 어렵지 않다. 15초라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행동에 옮기는 일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잔머리보다 낫다. 하지만 문제는 목표와 꿈이다. 무엇을 위해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이후에도 내 안의 훼방꾼과 맞서라, 더 이상 낡은 지도로 헤매지 말자, 즐거워야 좋은 여행이다, 삶의 시나리오는 언제든 고쳐 쓸 수 있다, 행복한 달인 등 여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각 단계에서 처음 대하는 방법이나 특별한 비법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들을 어떻게 엮어 나갈 것인가, 삶에의 적용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쓸쓸한가. 되는대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삶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을 꾼다는 것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남을까. 나이와 무관하게 이기적 욕망과 욕심만 가득한 비참한 인생이 있고 돈과 권력과 무관하게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도 있다. 그것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순 없지만 자신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먼저 경험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책과 함께 하고 싶은 욕심, 모든 욕망으로부터 조금 더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고 읽고 쓰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은 언제나 나의 꿈이었다. 불가능한 꿈도 아니지만 쉽게 이루어질 수도 없다. 뚜렷한 성과나 목표가 있는 꿈이 아니지만 더 이상의 꿈을 가져본 적도 없다.

  누구에게나 새롭게 혹은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작은 발걸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열정과 인내와 집중!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작은 목표를 이루어내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큰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도 작은 실천과 조용한 발걸음은 계속 될 것이라 믿는다. 소리 없이 주변의 발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09011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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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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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늘 환상 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동굴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현실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데아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의 그림자나 신기루는 그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실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 대부분.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의 본령이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방법과 시점에 따라 언제나 그대로인 대상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어느날 문득 ‘낯설게 하기’가 가능해진다면 일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외쳐도 좋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답 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나는 답을 찾아볼 용의가 있다. 물론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양한 방식의 질문과 간섭들에 대해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걸며 비틀고 뒤집는다. 그것을 즐길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 스스로 즐기고 타인의 시선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가깝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이 우리에게 늘상 새로움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거꾸로 우리가 소설에게 낯선 흥분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선과 상큼한 감각은 일차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여운과 생각의 찌거기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했거나 거시적 관점에서 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때때로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많은 독자들의 취향 속에서도 변함없이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거나 커다란 호응을 받은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더구나 해외 작가의 소설일 경우 이미 알려진 작가와 달리 낯설고 새롭지만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과 돈과 노력이라는 위험을. 프랑스 작가 뱅상 들르크루아의 <지붕 위의 신발>은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가 빚어낸 훌륭한 소설이다. 새롭게 소개되는 소설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읽을 만하다.

  장편소설이지만 9가지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붕 위의 신발’을 중심으로 한 서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복사기 판매원의 딸이 바라보는 ‘지붕 위의 신발’과 화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붕 위의 신발’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런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을 즐긴다.

  영화든 소설이든 내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동일한 것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모든 요소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만들고 때로 슬픔과 눈물을 만든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 배어난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독자와의 공감은 결국 작가의 영혼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한 편의 단편처럼 완결성을 띠면서도 전체 장편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철학자들의 주저가 등장하고 환상적인 요소도 삽입되어 조금 산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진리는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가?’에서부터 ‘미학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이야기가 맞물리고 배치되어 있다. 이웃들과 개인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전체와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고독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지닌 채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다. 서로 다른 성별, 나이, 직업,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울만큼 고독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들의 이웃이며 나의 가족이고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개별적 존재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어차피 가족 이상의 전체를 고려해 보지 않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색적이고 평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사람들조차 결국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의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마음과 생각의 갈피들을 짚어낼 지도 모르겠다. 국경을 넘어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신산스런 삶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닫고 살아야 하는 이유와 고독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주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외로운가 궁금하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것은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무소의 뿔처럼 그저 혼자서 가면 되는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09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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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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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언어의 감옥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유의 도구가 언어이며 삶의 방편도 언어이다. 말과 글이 없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 언어의 힘은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언어의 세계는 인간의 한계이며 숙명이다.

  태초에 말은 생존을 위한 의사소통의 도구였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보다 나은 수렵과 농경을 위해 힘없는 존재였던 원숭이들은 손과 언어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말로 전수된 기술과 생활의 지혜는 지식으로 축적되고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록을 시도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만히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삶은 결국 언어가 가져다 준 선물임을 알게 된다. 고급한 문화를 향유하고 문명을 이루어 살게 된 인간의 언어는 그칠 줄 모르는 실험과 도전과 모험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그 첨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삶의 기록으로 혹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기능한 시는 여전히 우리에게 정밀하고 깊이 있는 사유의 극단을 보여준다. 시인들이 짊어진 천형의 고통은 또 다른 희열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는 그 고통의 결과물이다. 한 편 한 편 쏟아낸 실험의 결과물들, 감정의 편린들, 이성적 사유들을 우리는 한 권의 시집을 통해 만나게 된다.

  김경주의 <기담>은 오랜만에 언어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시집이었다. 전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은 이미 시인의 재기발랄함을 넘어서 버렸다. 극한 언어적 실험극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며 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다. 언어의 진경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시(詩)와 극(劇)을 결합하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이 책은 시집의 통념을 깨고 있다.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시의 거센 물결이 밀려오던 시절이 떠올랐다. 모진 세월을 견뎌야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서정시로 도피했던 사람들에게 실험적 시도들은 낯선 경험이었고 새로움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그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희곡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무대 위에 올릴 수 없는 추상과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파괴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드러난 현실은 독자들이 감당하게 버겁다. 무엇보다도 실제 사진이나 시집 표지를 패러디한 시도 등 책 속에 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언어의 양면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읽혔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이 시집 읽기는 황망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게 했다. 어차피 시가 아니 문학이 허구의 세계라면 시인은 그 극단을 만져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언어들은 낯설고 기묘하다.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구체적인 상황과 서사구조를 읽어낼 수도 없다. 뒤틀리고 이질적인 것들은 현실을 뛰어넘고 존재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드러내지 않을 지도 모른다. 때 묻고 익숙해진 습관들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물에 불과하다.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켜켜이 먼지 묻은 세월의 더께만 어깨를 짓누른다. 말과 사물은 제각기 갈길을 떠난 지 오래고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는 언어만을 더럽힌다.

  투명한 유리벽 안에 놓여 있는 개별자들과 통합할 수 없는 존재들의 마주침은 우연이거나 혹은 숙명이거나. 이기적 욕망들과 한없는 외로움의 만남은 세상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으로 만들어버린다. 언어는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서로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시인은 언어들이 만들어 낸 극(劇) 속에서 길을 찾았을까? 당연하게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없는 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차피 낯설거나 익숙한 곳이므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시인 혹은 독자의 몫이므로…….

기담(奇談)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090109-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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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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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북부 판자촌에 사는 주부들은 저녁이면 냄비에 돌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밥이 될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그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어미가 느끼는 수치심을 감히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 P. 10

  어쩌자고 장 지글러는 이런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는가. 마음이 울컥하여 한동안 눈이 매웠다. <탐욕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투쟁은 아는 것에서 출발하며, 투쟁을 통해서만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 약육강식 체제를 파괴시키는 일이 세계 시민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레지 드브레(1940~. 프랑스 출신 철학자, 교수, 기자.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 동지로 지낸 일화로 유명하다 - 옮긴이)는 “지식인의 의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의무는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P. 17

  폐타이어나 고무로 하반신을 감싼 채 바닥을 기는 걸인을 가끔 외면한 적이 있다. 손에 집히는 동전이라도 넣어 주지 못하고 지나칠 때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마음은 표현하기 힘들만큼 괴로운 법이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있겠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세상의 진실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 보이는 장 지글러를 사르트르가 보았다면 매우 반가워했을 것이다. 이 책은 연초에 읽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대한민국이 전부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기아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그 가공할 만한 위협들 앞에서 우리의 삶은 안온하기만 한 것일까. 이 책은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는 2008년 4월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책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과 만났다. <탐욕의 시대>는 또 다른 진실에 대해 우리에게 짙은 감동과 아픔을 전해준다. 전자가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면 후자는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존재한다. 알지 못하는 사실들도 많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와 수치가 전하는 의미가 이토록 사무치게 전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깊은 한숨과 회의를 갖게 한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들은 오히려 위험하다. 객관적일 수 없는 해석과 지나친 분석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통계와 수치를 제공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통계치를 통해 기아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다. 남반구 대부분의 나라들 즉,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서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을 직접 방문해서 경험한 이야기들은 생생한 지구촌에 관한 21세기의 보고서이며 기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집이다. 저자는 단순한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아의 원인으로 신흥 봉건제후로 명명된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보다 앞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물론 제국주의의 폭력이다. 부채와 기아의 관계를 파헤친 1장과 2장은 이면에 감추어진 국가적 이기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혁명을 이야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상황의 봉건적 질서를 떠올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혁명가들의 외침을 다시 살펴보고 시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저자의 의도는 세계의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다.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의 도움을 얻어야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를 이루어나갈 수 있으며,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 사회를 이루지 않고 사는 인간, 역사가 없는 인간,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가역성(可逆性), 상호 보완성, 연대감 등의 관계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 P. 329

  이 책에 인용된 끔찍한 숫자와 현실들을 다시 인용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자가 이 책을 쓴 진정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문학작품만이 아니다.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눈물을 자극했고 한숨 쉬게 했으며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오만한 물결 앞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고 있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건설 지상주의 대한민국의 현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저자의 말대로 다시 시작하자. 무엇을?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들 우연의 희생자 한 명 한 명은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 나의 친구 혹은 나의 삶을 구성하며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다. - P. 330

  나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아니며,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한 명의 지식인일 뿐이다. 나의 책은 내가 돌아다니며 목격한 세계에 대한 나의 진단을 제시한다.
  현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 P. 332


  나는 저자의 끝맺는 말을 읽다가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내 삶의 ‘우연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한 것 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도 인민해방전선의 리더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들의 몫에 대해 보다 깊이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작은 지식과 인식조차도 무의하다.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뜻과 행동이 모여 다시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돌려놓고 길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다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꺾어버린 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파블로 네루다) - P. 344 

 0901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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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탐욕의시대] 우리에게는 수치심의 권력이 있다!!
    from Green Monkey Blog** 2009-02-06 14:12 
    [탐욕의시대] 우리에게는 수치심의 권력이 있다!! '수치심의 권력'에 조롱당할 수 밖에 없는 명텐도MB정권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 원제 L’empire de la honte 장 지글러 (지은이), 양영란 (옮긴이) | 갈라파고스 게을러서 뒤늦게 읽기 시작한 책 . '다시 연대만이 희망이다'란 제목의 말머리부터 심상찮은 포스가 느껴진다. 저자인 장지글러는 1776년 신생 미합중국 최초의 주 프랑스대사로 임..
 
 
반딧불이 2009-01-1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올 한해도 님의 성실한 책읽기의 덕을 톡톡히 볼 것 같아요. 늘 고맙습니다.

sceptic 2009-01-17 16:50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반딧불이님도 즐거운 책읽기 이어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