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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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꾼다
  ― 장뤼크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선두 주자였던 고다르의 말이 심상치 않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게 하는 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는 장면 이외에도 전달 방식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서만 독자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의도된 오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는 어쩌면 더 이상 이미지의 생경한 전달에 그치는 장르의 시대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 우연에 기대어 김경주의 <기담>에 이어 강정의 <키스>를 읽었다. 두 시인은 따로 또 같이 시를 쓴 것처럼 보인다. 내게 그렇게 읽혔겠지만 재밌는 비교가 가능하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현재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묘한 퍼즐로 엮어질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문학을, 시를 더 이상 진지하고 깊은 고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가볍고 기괴한 말놀음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독자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시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기존의 문법대로 시가 주는 안락한 감성을 주문하는 것일까.

  두 시인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정의 <키스>는 낯선 이미지와의 접촉이며 일상을 비틀어보는 것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온 생의 감각 세포들을 되살려내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하지 못한다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말이다. 이 시집의 서시를 보자.

死後의 바람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확실성 시대에 시는 더욱 불안하고 인간의 마음들은 허공을 헤맨다. 시인은 서시에서 불타는 시간의 숲에서 인간이 짐승의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써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집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 그 매혹의 깊이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애무는 접촉이다. 관심이며 열정이고 몰입이며 안타까움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가꾸어 나간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 ‘키스’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각. ‘부드러움과 달콤함’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생경한 풍경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표현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고.

  시집 중간 중간 시인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부분이 극대화되고 생략된 신체는 기괴해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전면적인 접촉과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세계와 불편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리둥절할 것이고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과 이미지와 연결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뿐!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 ‘자멸의 사랑’ 중에서


  추상과 상징의 세계는 결국 현실의 메트릭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실 밖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어쩌겠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너머에 눈길을 던져본다.

  그저 한 몸 등 따시고 배부른 인생을 위해 질주하는 저 수많은 인간 군상들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은 통속적인 사랑의 결실도 아니고 즐거운 인생이라고 믿었던 신기루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너머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라 무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말란다. 서로를 속이는 감정의 게임에서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 따위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희미할 뿐이다. 절대적인 것과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애무일 뿐! 애무하라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라! 고 시인은 외친다.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집 해설에 간만에 밑줄 긋는다! 애무하기 좋은 밤이다.

애무를 넘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에는 고민도 순서도 있을 리 없다. 애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매혹되고 혀의 촉감에 넋 나간 사람이 다음 순간의 손놀림이나 자세 따위를 걱정할 틈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순간순간의 느낌에 몰두하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고 또 더듬을 뿐이다. 애무는 최종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애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기 수중에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 감지했지만 쉽사리 그 불가능을 수용할 수 없는 자의 절절한 몸짓이다. - [해설] ‘애무의 윤리(조연정)’ 중에서


09011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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