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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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늘 환상 속의 그림자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동굴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현실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데아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플라톤이 말했다. 하지만 이데아의 그림자나 신기루는 그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실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다. 대부분.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의 본령이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방법과 시점에 따라 언제나 그대로인 대상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예술가가 아니라도 어느날 문득 ‘낯설게 하기’가 가능해진다면 일상에서 벗어나 드디어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외쳐도 좋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답 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나는 답을 찾아볼 용의가 있다. 물론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양한 방식의 질문과 간섭들에 대해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걸며 비틀고 뒤집는다. 그것을 즐길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예술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된다. 스스로 즐기고 타인의 시선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가깝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이 우리에게 늘상 새로움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거꾸로 우리가 소설에게 낯선 흥분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선과 상큼한 감각은 일차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여운과 생각의 찌거기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했거나 거시적 관점에서 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때때로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많은 독자들의 취향 속에서도 변함없이 대중의 취향을 읽어내거나 커다란 호응을 받은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더구나 해외 작가의 소설일 경우 이미 알려진 작가와 달리 낯설고 새롭지만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과 돈과 노력이라는 위험을. 프랑스 작가 뱅상 들르크루아의 <지붕 위의 신발>은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가 빚어낸 훌륭한 소설이다. 새롭게 소개되는 소설이 감내해야 하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읽을 만하다.

  장편소설이지만 9가지 이야기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는 ‘지붕 위의 신발’을 중심으로 한 서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복사기 판매원의 딸이 바라보는 ‘지붕 위의 신발’과 화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붕 위의 신발’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런 형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을 즐긴다.

  영화든 소설이든 내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동일한 것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모든 요소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만들고 때로 슬픔과 눈물을 만든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 배어난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독자와의 공감은 결국 작가의 영혼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한 편의 단편처럼 완결성을 띠면서도 전체 장편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철학자들의 주저가 등장하고 환상적인 요소도 삽입되어 조금 산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진리는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가?’에서부터 ‘미학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이야기가 맞물리고 배치되어 있다. 이웃들과 개인의 관계를 돌아보기도 하고 전체와 부분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고독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지닌 채 태어난 것이 인간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있다. 서로 다른 성별, 나이, 직업,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울만큼 고독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들의 이웃이며 나의 가족이고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개별적 존재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어차피 가족 이상의 전체를 고려해 보지 않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색적이고 평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 사람들조차 결국 외면하고 싶은 우리들의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마음과 생각의 갈피들을 짚어낼 지도 모르겠다. 국경을 넘어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신산스런 삶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닫고 살아야 하는 이유와 고독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주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외로운가 궁금하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그것은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무소의 뿔처럼 그저 혼자서 가면 되는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 아닌가.


09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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