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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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기다리면 보고 싶은 책이 나온다. 신기하게도 발테 벤야민의 책들을 체계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미 출판된 책들을 뒤적거리다 그만 둔 적이 몇 년 전부터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도서출판 <길>에서 선집 10권이 출판되었다. 선집도 다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인용되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2판과 3판을 나란히 번역해 놓은 책이 나왔다. <사진의 작은 역사>와 함께 매체미학에 대한 대표적인 그의 논문을 보며 20세기 초에 촉발되었을 논쟁들과 예술에 대한 혼란스런 개념들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확인하게 된다.

  1935년에 초판을 썼고, 1936년에 수정 보완된 제 2 판을 출판하려 했다. 그래서 제 2 판을 원판(Urtext)이라고 불렀다. 이후 독일어로 출간할 의도를 갖고 제 3 판을 쓰게되었다. 3판은 1963년이 되어서야 처음 출판된다. 현대 예술에 대한 미학적 접근의 출발을 의미하는 이 논문은 발터 벤야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의 세계관이 깨지고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시작된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한 변혁과 커다란 흐름의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출발이다. 기존 예술의 전면적인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새로운 장르의 탄생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중요한 개념인 아우라(Aura)는 신비적이고 비의적 요소로 유물론적 관점에서 브레히트나 하버마스의 비판을 판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아우라이다.(P. 47)”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우라 자체에 대한 개념의 모호성 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적으로 예술작품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자각일 것이다. 예술작품이 이제 더 이상 예술로서 의미와 위상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사진’과 ‘영화’의 탄생은 기존 예술에 대한 평가와 개념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의식에 근거를 둔 예술작품의 가치가 이제는 ‘정치’와 결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게 된 ‘영화’의 탄생이 이 논문의 기저를 이루는 정신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논문은 번역자의 평가대로 영화에 대한 이론이며 현대 예술론이고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지각과 경험에 대한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탁월한 한 편의 논문으로 사람들의 의식이나 관점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개방적인 태도로 기존의 틀과 개념들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았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 논문에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 우려하면서 아우라를 이렇게 짧게 정의한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 P. 50

  이제는 가정이나 직장 학교나 공공장소 등 어디에나 복제 미술품 액자를 걸어 놓고 있다. 원본 그림이 전시되고 기획적인 열리지만 사람들은 진품의 확인이나 진품 자체만이 가지는 고유한 아우라를 즐기러 가는 것 같지는 않다. 수많은 복제품을 통해 그 그림이 주는 이미지와 감상을 원본과 비교해 보거나 심지어 크기와 색감 실제 존재 여부의 확인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원본 없는 복제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LG 전자의 CF난 신문 광고가 보여주는 예술작품에 대한 모욕 혹은 장난은 자본주의와 상업예술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하다. 재밌고 즐거움이 미덕이 되는 시대에 예술작품은 원본과 복제품의 아우라가 아니라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데 더 골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예술과 그것을 무한 복제 가능한 시대에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발터 벤야민에 의해 오랜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복제가 가능한 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작을 알린다. 이 논문과 관련되 저자의 노트의 메모가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새로운 것이 승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가장 확실한 중개자는 옛것에 대한 지루함이다. - P. 219

  옛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그것의 복제품이든 말이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고 외치는 시인의 말처럼 이제는 새로움과 낯설음이 미덕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술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새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책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사진’과 ‘영화’는 이제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넘어 우리의 일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07122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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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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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 논문은 복제기술과 영화에 대한 이론이면서 현대예술론이고, 나아가 매체미학적 성찰이며, 이것은 다시 현대의 지각과 경험에 관한 이론과 접맥된다. - P. 11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아우라이다. - P. 47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 P. 50

“진정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의식에 근거를 둔다. - P. 51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 P. 58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 P. 105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가 있다. - P. 109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어내려고 했다. - P. 140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른 법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이 의식을 갖고 엮은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엮인 공간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 P. 168

새로운 것이 승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가장 확실한 중개자는 옛것에 대한 지루함이다. - P. 219

헉슬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도 수백만 개로 복제되면 흉측해진다”고 말했다. - 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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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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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청준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잠시 아득해진다. 20년 쯤 기억과 감정의 퇴행을 잠시 경험한다. 내게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처음 건드려 진 적이 있다면 이청준과 정호승에 의해서였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나 전혜린처럼 그들에게 다가간 것은 나였지만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은 그들의 글이었다. <새벽편지>와 <서울의 예수>의 빛바랜 표지처럼 <매잡이>, <당신들의 천국>, <퇴원>, <병신과 머저리>, <잔인한 도시> 등 헤아릴 수 없는 장단편을 통해 내게 문장의 힘을 보여 주었던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었다.

  <서편제>, <신화를 삼킨 섬> 등 수많은 작품을 읽어오면서 백발이 되어가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 동시대의 작가와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큰 행복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의미있는 작가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는 그의 문학 인생 40여년을 정리하는 듯하다. 70이 다 된 노년에 이르면 모든 책이 마지막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애틋하게 읽혔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말이다.

  일곱 편의 단편과 네 편의 에세이 소설을 묶어 놓은 이 책은 김윤식의 ‘아, 이청준’이라는 글로 시작해서 ‘소설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라는 이윤옥의 글로 마감된다. 독특한 형식만큼 새롭고 충격적이거나 특별함은 없다. 이청준다운 글과 소회들이 밝혀져 있고 그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혹은 그간 그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오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느낌과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청준에 따르면 “예술창작 작업은 사물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삶과 세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노릇”이다. 존재론의 핵심인 우리 삶의 비극적 실존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작가의 뒷모습은 견고한 바위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와 비극적 진실들을 드러내는 작업이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자칫 우울한 감상의 토로이거나 어설프고 작위적인 말장난에 그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청준이 하고 싶었던, 드러내고 싶었던 삶의 진실들은 ‘삶과 세계의 진정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단편 ‘천년의 돛배’나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 ‘지하실’은 죽음과 상실의 관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삶의 비극성을 조망하고 있다. 바다위의 떠 있는 섬은 떠날 수 없고 가라앉을 수도 없다. 치열한 생존의 조건에서 밀려나 망각과 실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와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는 경험적 서사를 통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선물’이나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 ‘조물주의 그림’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나 공동체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고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규정된다면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질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과 그것이 진실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웅숭깊게 자리를 잡는다. 결코 어려운 말과 난해한 문장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이청준의 문장들은 머리보다 가슴에 와 부딪히고 먼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그것이 ‘조물주의 그림’이다.

밤바다 가운데로 나가 있으면
섬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다가든다.
섬들이 어찌 나를 에워싸랴.
섬들은 저희끼리 밤 이야기 위해 서로 둥글게 다가앉는 것 뿐이다.
섬들 가운데에 나는 없다.
- ‘조물주의 그림’중에서(본문 261페이지)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인물들의 ‘종주먹질’이 없다면 이청준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보다 넓고 깊게 혹은 다양하고 새로운 소설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이청준에게. 남겨진 시간동안 그가 살아온 깊이만큼 보아온 세계만큼 삶과 세계의 진정성에 대해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길 바란다.

  그저 오래 소설을 써 왔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찬과는 거리가 먼 이청준의 소설은 그대로 우리들 삶의 역사이고 오래된 미래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읽는 소설로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간 이청준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라면, 혹은 이청준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좋은 책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07122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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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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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렌의 노래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로 나와
내 날개 아래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 낡은 배로 가자
갑판 가득 매달려 시시덕거리던 연인들
물속으로 퐁당
물고기들은 몰려들지, 조금만 먹어볼래?
들리지? 내 목소리,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

  별다방이라고 부르는 스타벅스의 심볼이 되어 버린 신화 속의 주인공 세이렌. 우리는 그녀를 이제 도심 한복판 커피 전문점에서 만난다. 여성성의 상징과 원형 그 유혹과 죽음의 그림자를 ‘세이렌’에게서 빌려 온 시인의 상상력은 명랑하다. 김이듬의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은 불안한 영혼과 자의식의 충돌들이 넘친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그 불편의 이유가 다양하지만 감성과 이성 어느 부분에서도 공감하거나 쉽게 해석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

  시는 항상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의 시대라고 명명되던 80년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서정윤의 ‘홀로서기’가 촉발한 대중적 감수성과 호기심을 넘어서지 못한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어찌됐든 밤하늘에 별처럼 밝게 빛나거나 오롯이 외로움을 간직한 채 빛나야 할 명징한 언어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시인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한 구석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시가 있다. 독자 개인의 평가이겠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기만 하는 노래 소리처럼 뱃사람을 유혹했던 세이렌의 노래 소리만큼 김이듬의 시가 독자들이 마음을 훔치지는 못하는 듯하다. 시가 전해주는 울림은 대개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먼저, 언어 자체가 주는 울림들과 언어의 직조 과정에서 빚어지는 관계들 사이의 아름다움이 주는 참신함이다. 내가 오규원을 좋아한 이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에서 제기된 ‘낯설게하기’는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하나로는 꽃이 되지 않는 꽃’이 안개꽃에 대한 이수익의 관찰의 결과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움이다. 셋째는 서사성이다. 시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산문적 요소이다. 역설적이지만 산문을 압축하고 운율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 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백석과 이용악은 물론 시의 내용이 주는 감동은 형식적인 측면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요소이다.

  어떤 요소로도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든 기대 이하일 때 독자들은 본전 생각을 한다. 내게 김이듬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나는 겨울 저수지 냉정하고
신중한 빙판 검게 얼어붙은 심연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로 나를 지쳐줘
한복판으로 달려와 꽝꽝 두드리다가
끌로 송곳으로 큰 구멍을 뚫어봐
생각보다 수심이 깊지 않을 거야
미끼도 없는 낚시대를 덥석 물고
퍼드덕거리며 솟아오르는 저 물고기 좀 봐
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이렇게 행간을 건너뛰는 의미망에 갇혀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감동과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다. 나를 위해 시를 써 줄 시인은 없겠지만 공감의 진폭과 울림이 큰 시들을 여전히 기다린다. 작가의 독자의 팽팽한 긴장의 끈은 항상 적당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비록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말이다.


07122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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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을이다 - 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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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자기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의지박약이나 의존적, 외부적, 타인 지향적, 책임 회피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은 것이 인생이다. 절대로 공평하지 않으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개인의 입장에서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를 조망하는 일은 결코 객관활 될 수 없다. 알면서도 아쉽고 허탈할 때가 많은 법이다.

  자기 삶의 중심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직업과 연령, 성별과 지역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생에 대한 태도는 다양하기만 하다. 문화인류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조한혜정의 렌즈에 투영된 세상은 어떤 것일까. <다시, 마을이다>는 그 기록의 한 켠을 보여주는 칼럼집이다.

  신문에 실린 칼럼들은 시론時論이기 때문에 철지난 노래처럼 들릴 수도 있고 지나간 신문 뭉치처럼 거북하게 여기질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책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거의 7, 8년 전 칼럼부터 최근의 글들까지 다양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기억이 아득할 수도 있고 최근의 일들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나와 다른 관점, 혹은 조금 빗겨선 자리에서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몇 가지 생각의 갈피들을 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사회학적 평가는 타당한가. 저자는 이론적으로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접근할 수가 없는 분량과 지면이다. 착한 국민 콤플렉스나 미국의 애국주의 혹은 천수만 개발 반대를 위한 삼보 일배 등을 통해 개발 독재 시대와 환경 문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근대성을 발견한다. 도심 한복판 인사동에서 벌어지는 추석 축제를 통해 우리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개별 가정의 구조와 편의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마을을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조건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하자센타(http://www.haja.net)’를 운영하면서 이 땅의 청소년들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일탈과 방황의 원인 그리고 그 대안과 미래를 고민하는 저자의 열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우리들의 미래인 그들의 모습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들 스스로가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보여주고 가르쳐준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가장 불행한 세대라는 ‘88만원 세대’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과거와 결과물일 뿐이다. 책임 소재를 밝혀보자는 말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과 다함께 고민을 나눠야 할 문제라는 공통된 인식부터 필요하지 않은가.

  내 아이는 사교육비를 처발라 일류대를 목표로 경쟁에서 이기고 있으니 니들끼리 얘기해라, 다른 아이는 몰라도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지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등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부모라면 지금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이데올로기, 이념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한 후 이제는 가족과 개인의 행복과 이기적 욕망들이 더욱 거세게 넘쳐날 것이다. 대안교육과 홈스쿨링 등 대안들이 모색되고 공교육 자체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경쟁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떻게 규정될까? 어느 시대나 갈등과 문제는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고민들이 사회를 지탱해 왔겠지만 끝없는 경쟁과 시험, 취업 전쟁과 육아 전쟁을 거쳐 주택과 노인 문제로 이어지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에서 희망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희망은 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

  새로움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시간만 흘러간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는 어떤 사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반의 지지’ 혹은 ‘절대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 이명박은 우리에게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손 놓고 기다릴 일이 아니다. 내 손등을 찍고 싶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행동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를 찍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07122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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