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이청준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잠시 아득해진다. 20년 쯤 기억과 감정의 퇴행을 잠시 경험한다. 내게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처음 건드려 진 적이 있다면 이청준과 정호승에 의해서였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나 전혜린처럼 그들에게 다가간 것은 나였지만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은 그들의 글이었다. <새벽편지>와 <서울의 예수>의 빛바랜 표지처럼 <매잡이>, <당신들의 천국>, <퇴원>, <병신과 머저리>, <잔인한 도시> 등 헤아릴 수 없는 장단편을 통해 내게 문장의 힘을 보여 주었던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었다.

  <서편제>, <신화를 삼킨 섬> 등 수많은 작품을 읽어오면서 백발이 되어가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 동시대의 작가와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큰 행복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의미있는 작가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는 그의 문학 인생 40여년을 정리하는 듯하다. 70이 다 된 노년에 이르면 모든 책이 마지막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애틋하게 읽혔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말이다.

  일곱 편의 단편과 네 편의 에세이 소설을 묶어 놓은 이 책은 김윤식의 ‘아, 이청준’이라는 글로 시작해서 ‘소설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라는 이윤옥의 글로 마감된다. 독특한 형식만큼 새롭고 충격적이거나 특별함은 없다. 이청준다운 글과 소회들이 밝혀져 있고 그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혹은 그간 그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오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느낌과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청준에 따르면 “예술창작 작업은 사물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통해 삶과 세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노릇”이다. 존재론의 핵심인 우리 삶의 비극적 실존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작가의 뒷모습은 견고한 바위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와 비극적 진실들을 드러내는 작업이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자칫 우울한 감상의 토로이거나 어설프고 작위적인 말장난에 그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청준이 하고 싶었던, 드러내고 싶었던 삶의 진실들은 ‘삶과 세계의 진정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단편 ‘천년의 돛배’나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 ‘지하실’은 죽음과 상실의 관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삶의 비극성을 조망하고 있다. 바다위의 떠 있는 섬은 떠날 수 없고 가라앉을 수도 없다. 치열한 생존의 조건에서 밀려나 망각과 실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곳을 다시 잊어야했다’와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는 경험적 서사를 통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선물’이나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 ‘조물주의 그림’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나 공동체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고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규정된다면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질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과 그것이 진실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웅숭깊게 자리를 잡는다. 결코 어려운 말과 난해한 문장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이청준의 문장들은 머리보다 가슴에 와 부딪히고 먼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그것이 ‘조물주의 그림’이다.

밤바다 가운데로 나가 있으면
섬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다가든다.
섬들이 어찌 나를 에워싸랴.
섬들은 저희끼리 밤 이야기 위해 서로 둥글게 다가앉는 것 뿐이다.
섬들 가운데에 나는 없다.
- ‘조물주의 그림’중에서(본문 261페이지)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인물들의 ‘종주먹질’이 없다면 이청준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보다 넓고 깊게 혹은 다양하고 새로운 소설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이청준에게. 남겨진 시간동안 그가 살아온 깊이만큼 보아온 세계만큼 삶과 세계의 진정성에 대해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길 바란다.

  그저 오래 소설을 써 왔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찬과는 거리가 먼 이청준의 소설은 그대로 우리들 삶의 역사이고 오래된 미래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읽는 소설로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간 이청준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라면, 혹은 이청준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좋은 책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071226-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