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 불통의 시대, 소통의 길을 찾다
정관용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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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여전히 사용된다. 두 문장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반 ‘밖에’와 반 ‘이나’는 주관적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반이 남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된다.

  ‘밖에’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물이 없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민도 하고, 물이 줄어들지 않도록 절약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도 해야 한다.

  ‘이나’는 여유있고 행복하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배웠다. 하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가 부족하고 단순하고 좁은 시야를 갖기 쉽다. 대책없이 낙천적인 태도가 가져올 위험은 부정적 사고보다 훨씬 심각하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없이 남은 물을 과신하다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밖에’와 ‘이나’가 만나 토론을 나눈다고 가정해 보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는 정관용의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우리 사회의 대화와 토론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해온 저자는 참 할말이 많은 듯하다. 손석희라는 스타급 진행자에 가려 그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그의 중립적인 진행자의 자세와 진행 솜씨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손석희의 추천사가 붙어있다. ‘자아갈등을 넘어 소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곧 나올지 모를 손석희의 토론 책도 기대한다.

  실제 가정이나 직장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은 얼마나 어려운가. 열린 마음이란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사회에서 2차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똘레랑스’는 필요하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39페이지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면서 합의를 이루거나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주 간단한 정의지만 토론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토론은 지켜보는 사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다.

  귀를 막고 자신이 준비해 온 이야기만 하는 토론자, 상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수를 찾는데 혈안이 돼있는 시청자 그 누구도 ‘합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매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시청률과 형평성에 목을 맨 토론 프로그램을 잊어야 진정한 토론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방송토론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왜 대한민국은 불통 공화국이 되었는지 짚어보고 적대적 공존관계에 빠진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관용이 제시하는 대안들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 될 것 같다. ‘회색지대’에서 미래를 찾자는 사례 한 가지라도 고민하며 들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여러 가지 방법론은 우리의 척박한 토론 문화에서 필요한 도구들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소통의 구조 안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조금 더 넓고 깊게 들여다보려는 인식의 힘보다 조금 더 많이 낮게 가슴을 열어야 한다. 공정한 말과 열린 가슴이 아니라면 토론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소통의 벽을 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볼테르의 말처럼 제발 이제는 최소한 ‘말할 권리’ 만이라도 갖고 살고 싶다. 어쩌면 소통과 토론은 그 다음의 문제다. 1차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을 돌아보자. 아니,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 볼테르(1694~1778)


0912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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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성장의 유혹 -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
스탠 콕스 지음, 추선영 옮김 / 난장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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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자동차 타지 않기를 실천해 옮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년에 세운 유일한 계획 중 하나는 자전거 많이 이용하기다. 직장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적당한 거리에 있는데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이반 일리히의 말을 실천하려는 게 2010년의 계획이다. ‘책읽기는 실천이다, 지식은 실천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지키지 못한 것들을 이제는 행동에 옮겨야 한다.

  스탠 콕스의 <녹색성장의 유혹>을 읽으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둘 이상이 모여 사는 모든 사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 관계와 기득권에 관한 단상을 적어볼까 하다가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엉뚱한 생각의 흐름이지만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위대함에 비춰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오만함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높아진 에너지 효율성은 경제 확장에 기여해서 결국 더 많은 에너지 소비나 더 많은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는 제본스 패러독스Jevons Paradox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구시대적이고 무모한 산업 확장을 녹색 페인트와 첨단 기술로 포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과연 이것은 이념의 문제일까? ‘저탄소, 녹색성장’을 주창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 거품에 대한 저자의 경고는 단호하다. 바이오 연료, 태양전지, 원자력 에너지, ‘친환경’ 자동차, LED 전구를 아우르는 정부 주도의 계획들은 과연 제본스 패러독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녹색성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녹색과 성장은 합쳐질 수 없는 바탕을 갖고 있다. 다만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눈감고 머리만 낙엽에 처박은 꿩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이념과 무관한 듯 무관하지 않다.

  성장과 개발론자들이 ‘녹색’으로 포장하는 위장 전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4대강 사업의 본질, 세종시 논란의 핵심은 자연이냐 인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기적 욕망을 부정할 순 없지만 지역 이기주의와 국가 대계 그리고 환경과 개발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결국 적당한 타협과 포기로 귀결될 것이 뻔하다.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위로와 자책도 쏟아질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자. 환경 자체가 이념이 되어야 한다. 제본스 패러독스를 기억하자.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는 낯설지 않다. 전 지구적 양아치적 행태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고 오로지 자본과 성장의 논리로 저개발국에 가하는 폭력(?) 수준의 기업 행태를 하루, 이틀 접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만 이런 현실이 어떻게 지속 가능하며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고 널리 알리고 싶어졌다.

  공정무역이나 공정거래 커피, 공정 여행에 관한 인식이 점차 싹트고 있는 현실에서 병원산업이나 제약회사의 탐욕과 두 얼굴에 대해 직시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사들의 기득권과 제약회의의 약 팔기 권법 그리고 끊임없이 환자를 생산하고 불안 마케팅을 통해 병원과 약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현대인들의 관계는 암울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 부풀리기와 환자와 의사를 상대로 한 영업 전략을 통해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생태를 고발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는 하나로 모아진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건강한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자. ‘환경’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까지는 아니어도 더 많이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가 개인의 도덕에 의존할 문제는 아니다.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선진국이 나서지 않는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은 전세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0%를 내뿜고 있다. 건강한 지구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문제로 귀결된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이유진(녹색연합 기후에너지 국장)의 칼럼 ‘지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주일’이 목에 걸렸다.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곧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완고한 현실의 벽이 조금씩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외면하고 개인적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조금 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결국 커다란 손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녹색은 성장과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아무리 유혹해도 녹색은 성장을 사랑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0912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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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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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선택의 십계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얼마 전 이웃 블로거를 만나 즐겁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통과 교감은 오래 된 친구를 찾은 것처럼 유쾌한 일이었다. 그가 다닌 학교의 ‘직업선택의 십계’의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럽지 않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종교적 신념이나 특별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직업선택의 기준을 참고할 리 없다. 물론, 선언적 의미가 강하겠지만 지나온 내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때때로 돌아보지만,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웠노라고 미화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100년이 넘은 서울의 평범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그가 생각하는 교육과 삶과 세상의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얄팍한 지식 나부랭이를 배우러 가는 곳이 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완고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박재원과 윤지은이 번역하고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 박재원이 해설을 붙여놓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을 읽었다. 읽는 동안 가슴이 답답했다. 견고한 현실의 벽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뻔 했다.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울했다. 나의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치고 싶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이윤창출과 무한 경쟁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육제도는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념의 문제도 정치적 논리도 이기적 욕망도 이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자식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태도와 고등학교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와 직업선택의 첫째 조건이 ‘돈’이어야 하는 미래에서 우리의 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난달에 수능이 끝나고 지난주에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의 얼굴은 복잡해 보인다. 새학기가 되면 대학 이름과 합격생 수를 적어 현수막을 내건다.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들은 특별히 학과와 이름까지 적어 따로 교문 위에 걸어둔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아이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에게 학교는 패배감과 두려움을 선물한다. 이름이 내걸리지 못한 모든 아이들은 좌절감을 맛본 채 스무 살의 봄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강요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현실이다. 무한 경쟁 체제인 대한민국의 교육은 1% 승리자를 위해 모든 시스템이 가동된다. 똑같은 머리, 똑같은 교복, 똑같은 공부, 똑같은 목표, 똑같은 생활, 똑같은 꿈!

시험을 향해 짜여진 교육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해 규칙을 정해버리기 때문에 교육의 본래 목적인 능력향상을 제한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어버린다. - P. 22

“핀란드의 학교는 잘못하는 아이들을 끌어가긴 하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잘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율적으로 배우도록 키우면 아이들은 교사나 어른을 뛰어넘어 뻗어나간다. - P. 54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모아놓고 가르쳐야만 제대로 수월성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 - P. 55

다른 학생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수월성 교육이 아니라 동반 성장하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핀란드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 P. 55


  진보적 교육 운동가의 해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책을 집어 던져도 좋다. 하지만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박재원의 문제제기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관찰은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해서는 안된다. OECD회원국의 학력을 알아보기 위한 PISA의 통계를 보면 객관적 자료를 통해 각국의 학력과 핀란드 교육의 우수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썼겠지만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월성 교육 문제의 핵심에 놓인 특목고와 외고 사태, 교원평가의 본질과 방법, 대학입시 제도와 대학교육의 문제 그리고 교육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교육 전문가다. 저자가 핀란드 교육 현장을 통해 얻은 것과 해설을 쓴 사교육의 첨단에 서 있는 박재원의 단상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과 바른 인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능 성적표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 혁명이 주는 어감이 싫다면 혁신을 사용하라. 교육혁신은 교실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핀란드의 모든 시스템을 받아들이자는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우리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0912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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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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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중에서


  나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내 인생의 이틀은 지났을까?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배경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온전하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이 뿐이라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인간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 환경과 유전의 관계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논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노력과 선택으로 변화 가능한 것인 인생일까? 또 찰나에 불과한 인생에서 ‘구월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언제 찾아올 것인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책 없는 질문이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인간의 의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의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고 또한 그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 혹은 계기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리고 동과 서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우열이 있다.

  이 소설은 두 세계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과 반 그리고 합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의 변증법적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 금과 은은 정이며 반이고 합이며 그 합은 또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되며 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한 환경과 사회적 배경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광주의 시민운동가 출신 청와대 보좌관 아들 금. 부산의 실패한 사업가 아들 은.

  소설은 각자 다른 사정 때문에 광주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 두 집안을 연결시킨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금과 은. 질긴 운명처럼 혹은 계속되는 우연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교양 과목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대학생활은 동아리 선택 문제, 여자 문제,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이 된 시민 운동가 출신, 금의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 봉양을 대가로 큰 형 집에서 외제차를 굴리며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정부와 바람이 났다가 가족을 본 후 쓰러진다. 아버지 세대의 몰락은 지위와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다음 세대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은의 작은 아버지는 뉴라이트 교수다. 올드 라이트를 소개받은 은은 새로운 대학생 우파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금과 은은 우정을 넘어 사랑을 나눈다. 늙은 올드라이트 퇴직 교수와 몸을 섞는 은의 모습은 동성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넘어 실제 모델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 P. 133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언제였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에 빠진다.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의식을 결정했던 이틀은 언제였을까? 소설의 주인공 금과 은은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이틀을 만나게 된 것일까.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다가올 순간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 현실의 필연적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념적 지향이나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반어와 풍자로 읽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숨과 냉소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후기’에서 장정일은

그런 뜻에서 내가 가장 공들였던 인물인 은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어떤 면에서는 야비하기도 하고 이중인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 P. 336

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 진정한 우파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가 아닌 새로운 기대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인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 좌파만큼 어려운 이상적 우파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척점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금의 아버지나 거북 선생은 이제 금과 은으로 화하여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 같기는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처럼 금과 은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자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허생의 ‘섬’이나 홍길동의 ‘율도국’ 만큼이나 부질없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금과 은이 함께 들은 문학 강의 첫 시간(아마도 작가의 강의 경험 그대로일 것인 그것)이 주는 울림이 전부다. 본문에 나와있듯 ‘좋은 책이란, 나한테 절실한 책’이다. 깊은 성찰의 결과이거나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아 내겐 혼란스럽게 좌충우돌하는 치기 어린 19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도 작가에게도 기대와 희망을 꿈꾸지는 않는다.


09120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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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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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이란 말이 내게 만들어준 이미지는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통영여중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청마. 딸 하나를 둔 채, 스물 한 살에 청상이 된 이영도를 사랑하게 된 청마. 그는 철벽같은 현실 앞에 좌절했을까?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그리움에 행복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는 기막힌 아이러니는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는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조차 청마의 「행복」에 대한 변주로 들린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해가지고 을씨년스런 겨울 하늘과 아파트 지붕의 경계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짓을 바라보는 이 푸른 시간이 어쩌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루시드 폴의 ‘날개’를 들으며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내다볼 수 있는 이 작은 평화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플라톤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작은 배움과 노력으로 성취할 수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70년 전에 러셀은 ‘경쟁, 권태, 자극, 피로, 질투, 피해망상, 죄의식,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복이 우리의 곁을 떠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열정, 사랑, 일, 폭넓은 관심, 노력’ 등이 우리를 행복으로 안내한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한 행복론이다. 그러나 러셀의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뻔한 관점으로 말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종교적인 계명에 순종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는 행복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에 도달한다. 자신의 욕구와 관심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불행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의 생존을 지탱해주고 나에게 행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통한 교류 없이는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행복한가?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평생 우리를 지켜줄 행복에 대한 관점을 만들고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네모난 틀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런 말로 행복해지는 법을 달콤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깊은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로부터 길어 올린 사색의 결과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 P. 75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 P. 82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충족감을 주는 행복이다. - P. 119


  문장 하나하나가 벽에 붙여두고 음미할 만한 금언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세상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냉철하게 인식했던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인간이었던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이성과 감성을 갖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러셀이 전해주는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조건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하루에 3천 단어 이상을 사용해서 매일 글을 썼다는 러셀의 글은 깊고 아름답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반성하게 하는 『행복의 정복』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깊은 겨울,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 P. 246


0912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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